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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의 역사가들은 1910년 8월 29일을 일제에 의해 '국권 피탈'을 당한 치욕의 날로 기록해왔다. 하지만 훗날의 역사가들은, 여기에 더해 새로이 2015년 10월 12일을 박근혜 새누리당 정권에 의한 '국민주권 박탈'의 날로 기록할 것이다. 바로 정부여당이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일방적으로 선언한 날 말이다. 아울러 우리는 이날 북한을 비난하는 자들이 정작 하는 행태와 사유방식에 있어선 북한과 다를 바 없는 이율배반의 역설을 목도하였다.

이제 우리에게는, 우리사회가 민주사회라는 믿음을 버려야 할 때가 왔다. 사실 지난 8년간 우리는 이 믿음 속에 이명박근혜 정권의 폭주를 눈 뜨고 당해왔다. 그러나 역사교과서의 국정화가 이루어지고, 게다가 한국사회의 미래 향방을 좌우할 이런 중대한 조치가 대통령의 의지만으로 관철되는 사회라면, 우리사회는 민주사회라 할 수 없다.

사실 이번 사태에서 우리가 더욱 우려해야 할 점은, 이런 조치가 대통령의 의지만으로 '손쉽게' 관철되고 마는 현재 우리 사회의 의사결정 구조와 과정에 있다. 이는 한국사회의 정치, 사회, 언론 시스템과 담론, 문화의 전반적 퇴행과 붕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마 훗날의 역사는 한국사회가 이날을 전후해 자체 견제, 조정 능력과 역동성을 상실하고 민주주의 원리에서 벗어나 '(이승만, 박정희, 친일파) 신화'만이 지배하는 경직된 체제로 이행했다고 평가할 것이다.

지금 정부여당은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좌우 이데올로기의 문제처럼 다루고 있지만, 실상 이 문제의 본질은 오직 '독재'냐 아니냐의 여부에 있을 따름이다. 기실 국정교과서 발행과 좌우 이념 간에 무슨 상관관계가 있단 말인가?

한편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발표 당일, 국사편찬위원장 김정배는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이번 조치가 자유민주주의를 위한 것이며 근현대사 분야 집필에는 역사학자뿐만 아니라 다양한 전공자들을 초빙할 것이라 밝혔다.

그러나 정부에서 역사교과서를 딱 하나로 지정해 가르치는 것이 어떻게 '자유'나 '민주주의'라는 어휘에 부합하는 것인가? 이는 '상식'을 떠나 '기초 어휘'의 차원에서 보아도 말이 성립되지 않는 궤변이다.

또 다양한 전공자를 초빙하겠다는 말은, 결국 근현대사 집필진에 뉴라이트 인사들을 초빙하겠다는 의미로 들리지 밖에 않는다. 왜냐면 뉴라이트 인사들 중 실제 역사(학) 전공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만일 사태가 이렇게 전개된다면, 그 교과서의 내용은 굳이 읽어보지 않아도 뻔한 것이 아니겠는가? 지난번 교학사 역사교과서 사태의 악몽이 다시 떠오를 뿐이다.

일찍이 역사가이자 항일해방투사요, 아나키스트였던 단재 신채호는 그의 명문 <조선혁명선언>에서 일제 식민지 시기의 학교를 두고 '노예양성소'라 표현한 바 있다. 그런데 단재가 이토록 비난한 일제조차 국정 역사교과서를 발행하지는 않았다. 우리 역사에서 국정 역사교과서가 발행된 시대는 오직 박정희 유신체제기 뿐이었다.

그렇다면 이제 이 정권은, 교육현장과 미래세대를 '기억 속 유신'의 노예, 새누리당의 노예, 집권 보수 기득권 세력의 노예, 자본권력의 노예로 양성할 참인가? 그러면 노예의 양성이 역사(학)과 역사교육의 본질이자 목표인가? 결코 아니다. 역사(학)은 현재와는 다른 '삶의 방식'을 확인함으로써 현재를 넘어설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을 내포한 '반역의 학문'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역사는 인간과 현실사회에 대한 통찰력을 기를 수 있는 학문이다. 때문에 이번 조치는 철저히 권력의 입장에서 역사(학)을 죽이는 짓이나 다름없다. 결국 국정 역사교과서 발행 선언은, 역사를 죽여서 노예를 양성해 대대손손 영구집권과 기득권을 유지해나가려는 현 정권의 의사 표명에 불과한 것이다.

한마디로 이제 한국민은 주권을 행사하는 '국민'이 아닌 왕 또는 권력에 복종하는 '충순한 신민'으로 재규정된 것이다. 얼마 전 청와대는 왕조시대 '신민'에게나 쓰던 '하사'라는 표현을 써 빈축을 샀는데, 이것이 이제 역사교과서 국정화를 통해 현실화된 셈이다. 역사교과서 국정화의 상징성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울러 작금의 사태는, '자율'이란 '보장'받는 것이 아닌 스스로 '쟁취'하는 것이며, 동시에 쟁취한 자율성을 유지하려는 노력을 부단히 지속하지 않을 때 그 자율성은 의미를 상실할 수 있음을 현실로 보여준다. 다행히도 당장 학생과 시민사회, 역사학계, 야당이 국정화 저지를 위해 행동에 나섰다.

이러한 저항, 불복종과 더불어 무엇보다 역사학계, 시민사회, 일선 교육현장 간의 네트워크 구축과 이를 토대로 한 새로운 역사교육 체계 수립을 도모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우리는, 이번 사태를 이전보다 더 자율적이고, 더 다양한 역사교육 체계 수립을 위한 '안티 해프닝'으로 전락시킬 수 있을 것이다. 퇴행적이고 반역사적인 권력은 '저항의 대상'인 동시에 '대체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영구집권#국정 역사교과서#역사교육#박근혜 새누리당 정권#불복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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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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