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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산하의 성장소설 <양철북> 표지그림.
▲ 양철북 이산하의 성장소설 <양철북> 표지그림.
ⓒ 양철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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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4·3의 진실을 담은 장편서사시 <한라산>을 통해 알려졌고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형을 살다 출소해 10년간 절필했던 이산하 시인. 그가 쓴 성장 소설 <양철북>이 양철북 출판사에서 다시 나왔다.

이산하의 <양철북>은 독일 작가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을 떠올리게 한다. 귄터 그라스의 장편 <양철북>은 3살 이후 성장을 멈춘 오스카의 눈으로 나치 점령 시기부터 2차 대전이 종결되기까지 독일 사회를 그려냈다.

이산하의 <양철북>은 광복 이후 제주 4.3 유신 체제 하의 부마항쟁, 박종철 고문치사 등 암울한 시대적 배경을 바탕으로 한다. 작가 지망생인 주인공 '양철북'이 외할머니가 주지로 있는 '수구암'이라는 작은 절에서 만난다. 시대적 암울함과 구도자로 사는 삶을 고민하는 '법운'이라는 스님과 동행하며 보고 느낀 내용의 자전적 성장소설이다.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서 주인공 오스카가 나치와 주변의 부조리에 저항하고 시대를 깨우는 도구로 양철북을 두드렸다면 이산하의 <양철북>에서는 주인공 양철북이 예리한 펜으로 자신의 온 삶을 던져 시대를 일깨우는 양철북이 되려 했다는 점이 다르다.

<양철북>을 영화로 독일문화원에서 보던 당시의 충격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도망자인 한 남자를 감자를 캐던 오스카의 할머니가 페치코트처럼 넓은 치마를 벌려 가랑이 사이에 숨겨주던 장면, 그 치맛자락 속에서도 물리적 욕망을 억제하지 못하고 강간을 하던 남자. 죽은 말머리에서 꿈틀거리며 끊임없이 기어 나오던 뱀장어, 오스카가 엄마의 불륜 정사 장면을 문틈으로 지켜보던 장면. 어쩌면 오스카는 의식적으로 성장을 멈춘 채 첨탑에 올라 부조리하고 부패한 세상을 내려다보며 세상의 침묵을 비웃으며 양철북을 두드렸는지도 모른다.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희망의 전언

이산하의 소설 <양철북>의 주인공인 양철북은 작가 지망생이다. 펜을 예리하게 벼려 이성의 칼날과 어머니 품 같은 감성의 바다에서 세상을 향한 큰 일깨움으로 진짜 시다운 시를 을 쓰고 싶어 한다.

법운 스님은 부조리한 세상과 불평등한 개인의 삶을 뛰어넘기 위해 구도자의 길을 택한 사람이다. 화두를 찾아 헤매며 토굴에서 면벽 수행을 하고 때론 깡소주를 마시기도 하며 자신을 일깨울 화두와 각성을 위해 번민한다. 법운을 따라 다니며 양철북은 자신의 삶을 반추하며 삶과 죽음, 인연과 세상의 부조리에 대해 차근차근 되짚어간다.

마침내 양철북은 법운과 헤어져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다. 법운 역시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있다는 적멸보궁에서 자신의 손가락을 면도날로 베어 피로 팔만대장경을 베껴 쓰는 '혈사경'을 통해 깨우침을 얻고자 한다. 어느 날 법운은 문예장학생으로 대학에 가고자 시 작업과 입시 공부에 열중하는 양철북에게 편지로 '혈사경'을 통해 깨우침을 얻으려는 자신의 의지를 밝힌다.

법운 스님의 편지를 빌어 '네가 네 스스로를 버리지 않는 한 아무도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라고 전한다. 이 말은 작가 자신을 다시 일으켜 세워 삶을 지탱하기 위한 자기 응원가로 보인다. 동시에 암울한 동시대를 살며 저마다 삶의 무게를 등에 진 채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 속에서 때로 생의 끈을 스스로 잘라버리고 싶은 유혹에 시달리는 작가의 분신들, 우리 모두에게 건네는 희망의 전언처럼 들린다.

문예장학생으로 대학생이 된 주인공은 제주 4·3의 진실을 <한라산>이라는 장편서사시로 세상에 알린다. 필화사건과 국보법 위반으로 추적당하다 잡혀가며 법운 스님의 편지 마지막 구절을 반복해 되뇌는 장면은 귄터 그라스의 <양철북>에서 종전 후 오스카가 첨탑 꼭대기서 양철북을 두드리던 장면과 겹친다. 그러면서 시대가 우리에게 던지는 화두를 생각하게 한다.

4·3의 진실을 알려 고통의 세월을 살았던 시인 이산하처럼 누군가는 온몸으로, 누군가는 예리하게 벼린 시대의 펜으로, 누군가는 홍성담의 '사월오월' 같은 작품으로. 각자 시대의 암울함과 잠든 양심을 침묵에서 깨우는 양철북이 되었으면 좋겠다.

떠도는 구름이 쉴 곳을 찾아 땅으로 내려오면
비는 깨달음의 법수가 된다.
깨달음은 마치 산에서 내린 빗방울들이
골짜기에 모여 개울이 되고
다시 강으로 합류해 바다로 가는 것과 같다.
누구에게나 똑같이 내리는 이 비를 맞는 자는
빗방울 속의 바다를 찾아 멀고 험한 길을 고행하고
그러다 마침내 문득 자신이 깨달음의 바다에
도달해 있음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때까지 네가 네 스스로를 버리지 않는 한
아무도 너를 버리지 않을 것이다.

나는 앞으로 네가 시인으로 살아가게 될 것을 믿는다.
무릇 시인은 시를 쓸 때마다 최후의 한 사람이므로
항상 백척간두에서 한발 내딛는 마음으로 쓰게 될 것도 믿는다.

- 1978년 12월 30일 오대산 적멸보궁에서 법운 합장(본문 중에서)

덧붙이는 글 | <양철북>(이산하 지음/ 장호, 김병하 그림/ 양철북/ 2015.9.11/ 1만1000원)



양철북

이산하 지음, 양철북(2015)


태그:#이산하 성장소설 양철북, #양철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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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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