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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가 오는 2018년부터 보급될 초등학교 3학년 이상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하겠다는 계획을 밝힌 후 논란이 가열되고 있다.

한글문화연대를 비롯하여 한자 표기 반대론자들은 국민운동본부를 발족하고, '한자 병기는 반민족, 반역사적 망국 정책'이라 부르짖으며1000만 서명 운동에 돌입하였다. 그들은 줄곧 한글만으로도 뜻 전달에 탈이 없다고 한다. 과연 한글 표기만으로 우리말 표현이 옳게 전달될까?

우리말에는 토박이말(순우리말)과 한자말은 물론 들온말(외래어)까지 한데 어우러져 있다.
세 가지 종류의 말은 우리말을 더욱 다채롭고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세계화 시대를 거스를 수 없듯이 외래어의 쓰임도 비켜갈 수 없다.

전통적인 한자문화권 국가인 우리나라에서 한자말의 지위도 절대적이다. 입에 척 달라붙는 구수한 맛을 내는 토박이말은 우리의 정체성을 지켜주는 고귀한 사명을 띤다. 이렇듯 토박이말, 한자말, 들온말은 저마다의 역할을 소화하며 우리말을 든든히 떠받쳐 주고 있다.

그러나 각기 다른 성질의 세 가지 말을 '한글 표기'만으로 오로지하매 교과목 학습에 지장을 주기도 한다. 학생들은 낱말에 혼동이 있거나 정확한 의미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때에는 본뜻을 어렴풋이 알고 넘어간다. 이런 낱말이 많아질수록 학습 효과가 떨어진다.

다음의 예를 보자.

"오늘은 아주 슬픈 영화를 한 편 '감상(1)'하겠습니다. 다 보고 난 뒤에는 '감상(2)'문을 한 편씩 써내기 바랍니다. 한 가지 조심할 것은 영화의 내용이 슬프다고 해서 감상문이 너무 '감상(3)'적으로 흘러서는 아니 되겠습니다."

'감상'이란 한자말이 여러 차례 나온다. 뜻과 쓰임은 전혀 다르지만 한글만으로 표기된 이 낱말은 우리말을 배워나가는 어린 학생들이 온전히 구분하기 쉽지 않아 섞어 쓰기 쉽다. 그러나 한자를 표기하고 그 뜻을 훑으면 훨씬 이해가 또렷해진다.

(1) 鑑賞 즐기고 평가
(2) 感想 느낌과 생각
(3) 感傷 슬퍼 찢어지는 감정

한자는 한자말에서만 위력을 떨치지 않는다. 토박이말에서도 한자 표기를 뒷받침해야 하는 경우가 꽤 널려있다. 학생들 국사 교과서 안으로 들어가 보자. 철기시대 '잔무늬거울'이 나온다.

여기서 말하는 잔무늬란 무엇인가? 물음을 던져본다. 컵(cup)을 뜻하는 '잔(盞)'일까? 아니다. 잔무늬거울의 '잔'은 바로 '가늘고 작은'을 뜻하는 토박이말이다. 주로 접두사로 쓰여 '잔가지, 잔꾀, 잔털'과 같은 파생어를 만든다. 이제서야 잔무늬의 뜻이 오롯이 드러난다. '잔'은 한자 '가늘 세(細)'자로 갈음된다. 그래서 잔무늬거울을 '세문경(細文鏡)'이라고도 이른다.

교과서에 오로지 한글만 써 넣지 않고 한자인 '가늘 세'를 덧그려 '잔[細]무늬거울'이라고 표기했다면 그 뜻이 금방 눈에 들어올 것이다. 한자를 모르더라도 '가늘 세(細)'자를 책장 아래 각주에 실으면 된다.

'잔'을 갈음할 한자 '가늘 세'를 익혔으면 이제 어휘를 넓혀 활용해 보자. 구석기, 신석기말고 그 사이에 '잔석기 시대'가 있다. 앞서 살폈듯, 이 '잔'은 '잔(컵)'이 아니다. 잔석기의 '잔'자 옆에 '가늘 세(細)'자를 곁붙이면 본뜻이 비친다. 구석기는 돌을 깨뜨려 도구를 만들던 뗀석기 시대였다면, 돌을 깨뜨리는 기술이 발달해 좀 더 자잘하고 날카로운 도구를 제작한 시대가 이른바 잔(細)석기 시대이다. 의미 파악이 수월해지지 않는가?

고구려 고분의 모줄임천장. 네모꼴 모를 조금씩 줄여가며 천장의 매듭을 짓는 양식.
▲ 모줄임천장구조 고구려 고분의 모줄임천장. 네모꼴 모를 조금씩 줄여가며 천장의 매듭을 짓는 양식.
ⓒ 최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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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고구려 고분에서 드러나는 양상인 '모줄임천장' 구조'가 있다. 한글 이름만으로는 그 구조가 쉽사리 와 닿지 않는다. 토박이말 '모'는 네모꼴을 이르는 '모 방(方)'자와 그 뜻이 잘 맺어진다. 따라서, 네모꼴 위에 작은 네모꼴을 엇갈려 얹어놓고 다시 그 위에 더 작은 네모꼴을 얹으면서 점점 줄어드는 양식으로 천장을 매듭지은 것이 '모(方)줄임천장'이다. 이제 머릿속에 잘 그려지리라고 본다.

마지막으로 다룰 국사 용어는 '고인돌'이다. 고인돌의 어원이 무엇인지 생각해 보았는가? 돌로 만든 무덤이니 돌(石) 뜻은 알겠는데 '고인'이 문제로다. 뭇 학생들은 언뜻 죽은 사람을 일컫는 '고인(故人)'을 떠올려 '죽은 사람의 돌' 즉 '고인(故人)돌'이려니 상상할지도 모른다.

먼저 한자말로 바꿔 접근해보자. 고인돌은 한자말로 '지석묘' 또는 '탱석'이라고 불린다. 지(支)와 탱(撐)은 나란히 '지탱하다, 떠받치다'의 의미를 갖고 있다. '지'와 '탱'을 합쳐 '지탱'이란 말을 흔히 쓰지 않는가?

돌아와서, 고인돌의 '고인' 동사원형은 '고이다'이고 줄임말은 '괴다' 로, "턱을 괴고 앉아 있다"라든지 "장롱이 기우뚱하여 한쪽을 종이로 괴었다"와 같이 쓰인다. 다시 말해, 고인돌이란 '괸돌'이다. 두 덩이의 돌을 양쪽에 고이어(괴어) 그 위에 또 하나의 넙적한 돌은 얹힌 게 고인돌 아니었던가? 따라서, '고인(支撐)돌'로 표기 하면 좋다.

"제 나라 제 겨레의 쉬운 말글을 두고 어려운 한자를 쓰자는 주장은 터무니 없는 억지"라고 대차게 외치는 한자 병기 반대론자들에게 묻고 싶다. 잔무늬의 '잔'과 모줄임의 '모' 그리고 고인돌의 '고인'에서 보았듯, 순우리말에서조차도 한자 표기를 보충해야 비로소 이해가 빠르고 학습에 좀 더 효과적이지 않았던가? 하물며 한자말의 경우엔 어떻겠는가?

한자 병기가 한자 학습을 불러오고 그로 인해 사교육 부담과 아이들의 학습량 증가로 이어진다는 논리도 사실 얄팍하다. 한자를 모르더라도 각주에 해당 한자의 뜻과 음을 인쇄해 넣으면 아무 문제 없이 교과서를 읽고 의미를 집어낼 수 있는 걸 앞서 보았다. 한자를 모를 경우 본뜻을 건너짚어 잘못 알게 되거나 뜻 짐작이 안 되어 무조건 암기하는 학습 태도를 갖는 부작용도 피할 수 있다.

현 어문정책은 각기 다른 성질의 토박이말, 한자말, 외래어로 구성된 우리말을 한글 표기만으로 오로지하매 학생들에게 혼동을 주거나 본뜻을 얼버무려 알도록 한다. 이제는 한자를 한글과 옆에 나란히 표기하여 그 뜻과 정체를 고스란히 학생들에게 전달하도록 하고 공부도 좀 더 효과적으로 할 수 있도록 안내해야 한다.


태그:#한자, #한글, #국사, #교육, #우리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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