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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의 절은 그 절반 이상을 원효와 의상, 도선이 지었다. 절을 소개하는 안내문만을 읽으면 분명히 그렇다. 그러나 그 많은 절을 세 스님이 창건했다는 사실에 고개를 갸웃하지 않을 수 없다. 회룡사도 의상대사가 창건했다고 적혀 있지만 그걸 입증할 문헌이나 비문은 보이지 않는다. 동진, 혜거 같은 고승이 절을 중창했다는 이야기도 다만 이야기에 그칠 뿐이다. 고승의 이름을 언급할수록 권위가 서리란 생각이 출처불문의 이야기를 양산한 것으로 보인다.

중략)회룡사가 꼽는 성보 가운데 으뜸은 돌확이라고 부르는 석조다. 서산 보원사지 석조에 버금가는 대형 물그릇으로, 물론 돌로 만든 것이다. 절에 가면 저마다 다른 이름을 현판으로 내건 전각들이 보인다. 대웅전이나 관음전처럼 불보살을 모신 전각에는 전(殿)자를 붙인다. 산신각이나 칠성당처럼 불보살과는 다른 신격체를 모신 건물에는 각(閣)이나 당(堂)자를 붙인다. 옛 스님들은 우물이나 약수에도 전각을 지어 수각이라 불렀다. 물 또한 불성이 깃들었으므로 경배해야 할 대상이라는 스님들의 자연관이다. -<저 절로 가는 길>에서

<저 절로 가는 길>(홍반장 펴냄), '망월사 가는 길' 편에서 함께 다룬 망월사와 가까운 회룡사에 대한 한부분이다. 절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 중 '우리나라의 절은 그 절반 이상을 원효와 의상, 도선이 지었다'는 부분에 고개를 끄덕일 사람들이 많으리라. 

'세 스님은 평생 절을 창건하는 것만으로 수행을 했나? 아니 손오공처럼 날아다니며 여의봉을 휘둘러 뚝딱 절을 지었나?' 싶을 정도로 절의 역사에 세 스님을 거론한 절들이 많다.간혹 자신이 다니는 절이 이처럼 역사적으로 유명한 스님이 창건했다는 사실을 강조하면서 뻐기기도 하는 사람들을 보기도 한다. 오류가 적힌 안내문도 그렇고, 그런 불자들을 만나면 또 다른 불자로서 마음이 불편해지곤 한다.

일부 스님들은 왜 자신이 적을 두고 있는 절의 정확한 역사를 밝히는 것에 큰 관심이 없는 것일까. 아니, 그처럼 역사적으로 유명한 스님들을 언급해야만 불자들이 대단한 절이라 생각할 거라고 착각하고 알면서도 눈을 감고 있는 건 아닐까?

그 절의 어떤 사정과 상관 없이 오래된 절의 역사는 최대한 솔직하게 밝혀야 한다. 오랜 세월 우리 민족과 함께 해온 종교인만큼 우리의 역사나 풍습, 정서, 문화 등이 스며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설령 부끄럽거나 치욕스런 부분이 있더라도 사실대로 밝혀야 당연하지 않을까.

걷기 좋은 절길

<저 절로 가는 길> 책표지.
 <저 절로 가는 길> 책표지.
ⓒ 홍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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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로 오랫동안 살아오면서 오래 전부터 스님들이나 불자들에게 드리고 싶던 말이라 책의 힘을 빌어 말씀드려 본다. 아울러 드리고 싶은 말은 이 책의 바탕이 되는 걷는 사람들, 그들의 발길처럼 적어도 절에 가는 길 만큼은 걸어서 가는 불자들이 많았으면 좋겠다는 것이다.

시각을 다툴 만큼 바쁜 일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무거운 짐을 날라야 하는 사정도 있어서 어쩔 수 없이 차에 의지해야만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아닌, 절 마당까지 차를 이용해 가는 것이 기본 생활 방식으로 보이는 스님들이나 불자들이 갈수록 많아짐을 느끼는 것은 나만의 지나친 생각일까?

100% 힌트는 될 수 없을 것이나, 불자인 나는 감히 '어떤 절이 그 절의 스님들을 큰 길에서 절까지 이르는 길을 어떻게 조성했을까' '주차장은 어떤 식으로 만들었을까?' 등으로 지레짐작, 판단해보곤 한다. 사회적으로, 그리고 불자들에게 명망이 높은 스님일지라도 그 스님이 주지로 있는 절이 자연 환경을 무시하고 있음이 보이면 솔직히 좀 그 절은 낮아 보인다.

많은 사람이 알고 있는 공공연한 사실대로 전국의 명산마다 제일 좋은 곳, 생태적으로 매우 중요한 곳 거의 대부분에는 절이 들어 앉아 있다. 청소년기와 청년기에 그 어떤 종교나 사상보다 불교에 매력을 느꼈던 큰 이유 중 하나는 불교의 생명과 자연에 대한 가치관이었다.

흙이나 그에 깃들어 살아가는 생명들이 숨 쉴 수 있는 작은 틈조차 허용하지 않고 시멘트를 바른 길, 즉 자동차를 사람보다 우선하는 듯한 절로 가는 길과 주차장을 조성한 스님들이 물에도 불성이 깃들어 있노라 건물을 짓고 이름까지 짓고 경배한 옛 스님들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탁발을 하며 자신을 끝없이 낮추는 한편 고통 받고 사는 중생들을 헤아림으로 수행했다는 옛스님들의 정신을 이해할 수 있을까? 

차를 타고 절로 오가는 눈에, 일주문까지 내달리는 눈에 자연이 제대로 보일까? 꽃이 피고 지는 것이 제대로 보일까? 아마도 굵고 커다란 나무나 너른 벌판은 보일 것이다. 그러나 그에 깃들어 사는 작은 풀꽃들의 보여주는 생명의 경이로움이나, 차가 달리는 시멘트 길, 그 아래 숨죽인 흙들의 고통은 볼 수 없을 것이다.

얼마전까지 왕의 측근으로 정치적 동료이자 학문과 사상의 친구였던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당하지 않았다면 '다산'이란 호도, 저 유명한 <목민심서>나, <경세유표><흠흠신서>도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아마도 초당의 주인 다산의 삶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다산초당 올라가는 이 '뿌리의 길'은, 다산초당~백련사 길은 언제든, 몇번이고 걷고 싶은 길이다. 힘들 때마다 생각나는 길이다.(2014.11.15)
 얼마전까지 왕의 측근으로 정치적 동료이자 학문과 사상의 친구였던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당하지 않았다면 '다산'이란 호도, 저 유명한 <목민심서>나, <경세유표><흠흠신서>도 나오지 못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아마도 초당의 주인 다산의 삶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는 듯한 다산초당 올라가는 이 '뿌리의 길'은, 다산초당~백련사 길은 언제든, 몇번이고 걷고 싶은 길이다. 힘들 때마다 생각나는 길이다.(2014.11.15)
ⓒ 김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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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절로 가는 길> 이 책은 산행과 걷기 여행 모임인 '서울불교산악회'와 '저절로가는길' 회원들이 함께 한 700여 차례의 산행과 걷기 여행, 그 일부 여정을 정리한 책이다. 프로필에 의하면 '스님, 산악인, 주부, 할머니, 법조인, 시인, 대졸 미취업자, 공무원, 구두닦이 등 다양한 연령대와 직업의 사람들이 '도반'으로 참여했다'고 한다.

지난 7년 동안 많은 사람이 걷고 걸어 절을 찾아다녔다는 그 흔적이라, 그 길에서 들려주는 이야기들이라 반가움이 크다. 책 속에선 불교가 길에서 시작돼 길에서 이뤄진 종교라는 것과, 동서고금을 통틀어 역사적으로 중요한 것들을 남긴 수많은 선지식이 산책을 즐겼다는 것, 점점 갈수록 많은 사람이 걷는 것으로 걷기의 중요함을 말해주고 있음을 설명하고 있다.

책은 종교와 상관 없이 도시인들의 쉼터가 되고 있는 조계사와 만해의 심우장, 우리나라 최초 한글대장경을 편찬한 석주스님의 정신이 살아있는 칠보사 찾아가는 길을 시작으로 사실상 정약용의 사상과 학문을 꽃피게 한 길, 그리고 수많은 스님과 선지식이 걸었던 길, 그 길에서 만나는 불교와 우리 역사와 사상, 풍습, 문화, 생명들의 신비 등을 들려준다.

송광사 공양간에서처럼 보리밥집에서도 비빔밥이 나왔는데, 반찬이 무려 12가지에 이른다. 들기름에 달달 볶은 도라지와 취나물이 번쩍 눈에 띈다. 넓적한 간장 종지에 자작하게 담긴 깻잎의 잎맥에서 남도의 산맥이며 강줄기가 아른거린다.

송광사 사찰음식이 잘 벼린 조선낫 같은 느낌이라면, 이곳 보리밥집에서 나온 음식은 각종 농기구를 마당에 부려 놓은 것처럼 다양하다. 낫으로 끊어낸 미나리, 호미로 긁어낸 취나물, 쟁기로 걷어낸 상추는 덜어내고 빼낸 사찰음식과 달리 저잣거리의 풍경처럼 푸짐하다. 그런 넉넉함에 술이라면 젬병이라는 도반까지도 한잔 걸치고, 다들 풀어진 눈동자 속에서 큰 재를 하나 넘고 편백나무 숲을 지나야 닿을 수 있는 선암사 가는 길이 서역인 듯 멀고 아득했다. -<저 절로 가는 길>에서.

지난해 5월 선암사에서 송광사로 가는 길 앞에서 서성이다 아쉽게 돌아왔다. 이후 언제든 걸어보리라 마음먹고 있던 길. 그래서 위 '굴목재길을 걸어 서역에 가다' 부분을 더욱 인상 깊게 읽었다. 보름 후 휴가에 남편과 이 길을 걷기로 했다. 마침 이즈음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미처 챙기지 못해 다른 길을 갔으리라. 덕분이다.

책은 지역별로 구분해 엮었다. 이런지라 길을 나서기에 앞서 참고해도 좋겠고, 혹은 다녀온 길을 되돌아보며 찾아 읽기 쉬울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저 절로 가는 길>(고원영) | 홍반장 | 2015-05-12 | 20,000원



저절로 가는 길

오선장 지음, 예일미디어(2015)


태그:#서울불교산악회, #걷기모임, #조계사, #회룡사, #나뭇잎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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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제게 닿아있는 '끈' 덕분에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었습니다. '책동네' 기사를 주로 쓰고 있습니다. 여러 분야의 책을 읽지만, '동·식물 및 자연, 역사' 관련 책들은 특히 더 좋아합니다. 책과 함께 할 수 있는 오늘, 행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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