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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3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13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 모두발언하고 있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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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선된 후 신뢰를 어기는 배신의 정치는 결국 패권주의와 줄 세우기 정치를 양산하는 것으로 반드시 선거에서 국민이 심판해 주셔야 할 것입니다."

아마도, 올해의 어록은 떼 놓은 당상이지 싶다. 주연 배우는 물론 박근혜 대통령.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를 저격하기 위해 "배신의 정치를 심판해 달라"던 대통령의 비수는 아마도 두고두고 부메랑이 되어 박근혜 대통령을 괴롭힐 것이다. 자신의 발언을 손바닥 뒤집듯 하는 '셀프 배신'을 잊을 만하면 한 번씩 하고 있으니 말이다.

단, 전제가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발언을 기억하는가, 그 발언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적확하게 가늠하고 있는지가 관건일 터. 그도 아니면 비서실장을 비롯한 참모진이 하나하나 수첩에라도 적어드리며 그 의미를 되새김질해줘야 할 것이고. 그러나 불행히도, 박근혜 대통령은 기억력이 좋지도, 측근들의 도움을 받는 것 같지도 않는 것 같다. 14일 천명한 광복 70주년 특별사면 계획이 딱 그런 짝이다(관련 기사 : 박 대통령의 광복절 특사, 원칙없는 경제인 사면?).

"경제인 사면은 국민적 합의 필요"하다던 박 대통령의 기억상실증

박근혜 대통령은 지난 13일 오전 청와대에서 열린 대통령 주재 수석비서관회의에서 '광복절 특사'를 언급했다. 한데, 그 명분이 참으로 구태의연하다. "국가 발전"과 "국민 대통합"이라니, 그리고 그 근거가 "국민의 삶에 어려움이 많다"라니.

어쩜 이리도 하나같이 구닥다리인지 통탄을 금할 수가 없다. 국민 대통합과 말만 바꾼 국민 대화합은 김영삼 전 대통령이 전두환·노태우 두 전 대통령의 사면을 검토했던 1997년 4월에도 등장했던 수사다. 어차피, "국민들의 삶" 운운을 보며 '경제인 사면'을 염두에 둔 것이라는 해석이 나올 것이 빤했는데도, 국민 대통합이라니.

차라리 이명박 정부에서도 7차례 특별사면이 이뤄졌다고 왜 말을 못 하나. 여기 저기, 대통령의 기억상실증 혹은 셀프 배신에 대한 지적이 잇따르고 있다. 당연한 순서다. 소름 돋는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 내뱉은 그 말의 향연들이 너무나도 확고하고 뚜렷해서다. 짧고 굵게 돌려 드려도 이만큼이다.

"대기업 지배주주, 경영자의 중대 범죄에 대한 사면권 행사 제한" (2012년 박근혜 후보 대선공약)

"과거 대통령들의 임기 말에 이뤄진 특별사면 관행은 그 고리를 끊을 필요가 있다. 부정부패나 비리에 연루된 사람들에 대한 사면은 국민을 분노케 할 것이다." (2013년 1월 26일 대통령 당선인 시절)

"기업인이라고 해서 특혜를 받는 것도 안 되겠지만, 기업인이라서 역차별을 받아서도 안 된다." (2015년 1월 12일 신년 기자회견)

"사면은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한다. 특히 경제인 특별사면은 납득할 만한 국민적 합의가 있어야 가능하다." (2015년 4월 28일 대국민 메시지)

아니, 무슨 박근혜 도플갱어라도 있는 건가. 그도 아니면 진정 기억상실증이라도 걸린 건가. 지난 4월까지만 해도 경제인 특별사면에 필요했던 '국민적 합의'가 '메르스 사태'이후 바뀌기라도 한 건가. 특히 4월 당시의 발언은 성완종 리스트가 정국을 강타한 시점에 나온 것이다. 노 전 대통령을 겨냥해 '국민적 합의'를 언급했던 박근혜 대통령이 '메르스 사태'와 '유승민 정국'을 버텨낸 직후 '셀프 배신'을 한 것을 두고 납득할 이가 얼마나 될까. 

회의스러운 것은 바로 이 부분이다. "관련 수석께서는 광복 70주년 사면에 대해서 필요한 범위와 대상을 검토해주기를 바란다"라는 대통령의 발언을 들어 청와대는 아직 재벌 총수들의 특별 사면은 단정하기 이르다는 분위기를 흘리고 있다. 반면, "해석은 언론인의 몫"이라는 청와대 입장에 부합하듯, 특사 범위에 경제인들이 들어갈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그런데, 재벌 총수들을 사면하면 진짜 경제가 활성화되나. 

김영란 전 국민권익위원장의 한 마디를 기억하라

<경향신문>에 따르면 2012년 1월, '김영란법'을 탄생시킨 김영란 당시 국민권익위원장은 오찬간담회에서 기자들을 만나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부패지수가 낮은 결정적 이유 중 하나는 횡령·배임했다고 (수감했던) 대기업 총수들을 계속 풀어주고 사면 복권해주기 때문이다. 부패지수가 계속 떨어지는데 올해도 올라갈 전망이 없다."

"판사들 머릿속에는 '대기업 총수에게 중형을 선고하면 회사가 망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는 것 같은데 이제 바뀌어야 한다. 해보지도 않고 왜 맨날 그러는지, 우리나라 양형은 너무 낮고 온정적이다."

판사만 그런 게 아닌 듯싶다. 박근혜 대통령과 참모진의 머릿속에도 "대기업 총수들이 없으면 회사가 망한다"거나 "경제가 이 모양인 것 재벌 총수들이 감옥에 있어서"와 같은 케케묵은 생각들로 가득 찬 거 같다. 뒤집어서, 경제사범들을 풀어줘야 경제가 산다면 박근혜 대통령이 주창했던 '지하 경제 양성화'는 전과자들이 부흥시키는 것인가? 이 말은 대기업들의 경제 활동이 범죄로 얼룩져도 눈감아 주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2014년 국제투명성기구가 발표한 부패인식지수(CPI)에서 한국은 100점 만점 기준에서 55점을 받았다. 50점을 넘겼다고 기뻐할 일이 아니다. 조사 대상 175개국 중에서 43위고, OECD 회원국 34개국 중 27위다. 이명박 정부 들어 순위가 더 떨어져 OECD 하위권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경제만 살리면 된다고? 도대체, 경제사범들을 사면하는 것과 경제 활성화의 상관관계는 누가 어떻게 증명하는가.

재계는 재벌회장이 있을 때와 없을 때 효과가 다르다고 부르짖는다. 하지만 그런 구태의연한 오너 체제를 걷어 버리고 재벌 기업들 스스로 투명한 지배 구조를 갖춰야 한다는 지적은 이제 상식이 됐다.

남북 문제가 해외 투자자들에게 걸림돌로 작용하는 것 마냥 불투명한 지배 구조와 부패가 한국 기업들의 문제점으로 지적된 지도 오래다. 이런 마당에 '국민적 합의'는 내팽개친 채 경제인 사면 분위기를 솔솔 흘리고 있는 박근혜 정부의 안면몰수에 박수를 보내고 싶을 지경이다.

박근혜 정부의 경제관은 '(범죄)지하 경제 활성화'?

"근데 이번 광복절날 사면하실 성완종들은 누구랍니까?" (동양대 진중권 교수)

"기업인들을 보면 어떤 개인적 실수로 들어간 사람들이 아닌 경제 사범이고 특히 특정 경제가중처벌법 대상이 대부분이다. 이런 분들을 경제 활동을 위해서 풀어준다면 마치 조직 폭력배를 풀어주는 논리가 사회정의를 위해서 풀어주는 것과 뭐가 다른가."(노회찬 전 정의당 대표)

"기업 총수들도 다른 생계형 서민 범죄자들과 똑같은 원칙이 적용돼야 된다."(박영선 새정치민주연합 의원)

"'나는 사면권 남용을 거부하겠다'는 게 박 대통령의 단호한 대선 공약이다. 마지막 남은 이 공약마저 파기할 것인가?" (박찬종 변호사)

박근혜 대통령의 사면 언급 직후, SNS와 방송에서 비판적인 의견들이 쏟아지고 있다. 대면 보고도 받지 않고 '마이웨이'를 정주행 중이신 박근혜 대통령이 이러한 비판적인 의견을 들을 리 만무하다는 점, 모르는 바 아니다. 그럼에도, 따질 건 따지고 물을 건 물어야 하지 않겠나.

최근 한국은행은 추가경정예산을 집행하더라도 상반기 경제 성장률이 2.8%를 유지하기 힘들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미 '메르스 사태' 직격탄을 맞은 내수 경제 역시 회복세로 돌아서려면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전망이 지배적이다. '최경환 노믹스'의 효과도 신통치 않다. 이런 시점에서 박근혜 대통령이 '특사' 카드를 들고 나온 것은 그 의도가 훤히 들어다 보이는 '한없이 투명한' 꼼수에 가까워 보인다.

자, 다시 '배신의 정치'로 돌아가 보자. 자신의 의도대로 유승민 전 원내대표를 끌어 내리고 새누리당을 '친박'으로 채워갈 박근혜 대통령은 이제 거칠 것이 없을 것이다. '경제민주화'니 '복지'니 이제껏 제대로 자신의 공약을 지켜본 일이 없는 박근혜 대통령의 '셀프 배신'은 어디까지 이어질 것인가. 그 배신의 부메랑이 독화살이 되어 날아갈 날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 편집ㅣ조혜지 기자



태그:#박근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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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및 작업 의뢰는 woodyh@hanmail.net, 전 무비스트, FLIM2.0, Korean Cinema Today, 오마이뉴스 취재기자, 현 영화 칼럼니스트, 시나리오 작가, '서울 4.3 영화제' 총괄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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