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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설고 물선 여서도에서 하룻밤 묵고 아침 7시배로 청산도에 왔다. 여서도 아침하늘이 무겁더니 결국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몸도 발걸음도 더 늘어지게 생겼다. 슬로시티(slowcity), 청산도라 오히려 잘된 거겠지. 

청계마을 다랭이논과 농부  비오는 날, 청계마을 다랭이논에서 한 농부가 논을 고르고 있다
▲ 청계마을 다랭이논과 농부 비오는 날, 청계마을 다랭이논에서 한 농부가 논을 고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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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일가는 부잣집 딸도 쌀 한말 먹지 못하고 시집갔다'는 여서도인데 청산도는 어땠을까? '큰 애기 쌀 서 말도 못 먹어보고 시집간다' 했다. 섬 생활이야 여서도나 청산도나 '도진개진'이지만 떠도는 전설로는 청산도가 그래도 양반인 셈이다.

청산도 얼굴, 다랭이논과 구들장논

당리언덕 정경  ‘서편제’와 ‘봄의 왈츠’ 촬영장소인 당리언덕, 청산도 최고의 관광명소다. 예쁘다!
▲ 당리언덕 정경 ‘서편제’와 ‘봄의 왈츠’ 촬영장소인 당리언덕, 청산도 최고의 관광명소다. 예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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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산도 최고 관광명소로 누구나 당리언덕을 꼽는다. '서편제'와 '봄의 왈츠' 촬영장소다. 이 언덕 너머에 청산도 서정이 깊게 밴 마을들이 있다. 청산도 '얼굴마담' 노릇하는 마을들이다. 매봉산을 비롯한 일곱 개 청산(靑山)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그 아래에 여덟아홉 마을이 어머니 치맛주름에 얼굴 파묻듯 파고들었다. 청계, 신풍, 부흥, 양지, 중흥, 원동, 상서, 동촌, 모두 산자락에 등고선 같은 다랭이논 하나씩 갖고 있다.   

'큰 애기' 쌀 한 톨 더 먹이려 산으로 한 뼘 한 뼘 땅 늘려, 계단논을 만들었다. 아버지 이마에 훈장 같은 주름 하나 생길 때마다 논 계단 하나 올라가고 주름깊이 깊어질수록 손바닥만 한 땅 한 조각 늘어났다. 누가 가르쳐서 한 일은 아니고 절박감에 가슴 조이며 일궈낸 숙명 같은 결과물이다.

청계마을 다랭이논 우리 눈에는 대지예술, 노동예술로 보이는 다랭이논은 절박감 속에 만들어진 운명 같은 산물이다
▲ 청계마을 다랭이논 우리 눈에는 대지예술, 노동예술로 보이는 다랭이논은 절박감 속에 만들어진 운명 같은 산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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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박하다 하여 조급해하지 않았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로 세대를 이어 느리게 만든 위대한 산물로, 마을사람들이 들으면 못마땅해 하겠지만 예술로 치면 땅에 그은 대지예술이요, 거친 노동으로 탄생한 위대한 노동예술이다.

땅만 늘리면 뭐하겠나, 물을 대고 3일이면 다 빠져나가는 돌 성분 많은 '돌땅'인 것을. 천하에 몹쓸 땅이었다. 그래서 논에 구들장 놓아 구들장논을 만들었다. 논바닥에 구들장 놓아 고래에 연기(煙氣) 대신 물을 흘려보낼 생각은 어떻게 했는지. 등 따습게 하는 연기는 벼에게는 물이라 생각한 게지. 벼를 자식같이 생각한 거야.

세상 어디에서 구경하지 못한 독창적이고 기발한 것이라 입을 모은다. 최근 유네스코세계식량기구(FAO)에 의해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애당초 구들이라는 것이 우리 고유문화여서 다른 나라는 흉내조차 내기 어려운 것이니 그럴만하다.

부흥리 구들장, 다랭이논 구들장논과 다랭이논은 청산도의 얼굴이다. 트랙터와 다랭이논은 잘 어울리지 않지만 어찌하겠는가, 농사지을 일손이 부족한 것을...
▲ 부흥리 구들장, 다랭이논 구들장논과 다랭이논은 청산도의 얼굴이다. 트랙터와 다랭이논은 잘 어울리지 않지만 어찌하겠는가, 농사지을 일손이 부족한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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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랭이논과 구들장논은 청산도 얼굴. 자연에 순응한 산물이라 하는 이도 있으나 난 거기에 동의하지 않는다. 자연에 순응했다 하면 그들의 처절한 노동을 폄하하는 것이요, 자연을 거역했다 하면 그들을 욕되게 하는 것이다. 순응과 거역 사이에서 절묘하게 타협을 하며 살아온 그들이기 때문이다.  

상서마을, 동촌마을 돌담

상서마을 돌담 상서마을 담은 돌로만 쌓은 강담이다. 돌 모양도 여러 가지다. 거친 섬생활을 닮았는지 모나고 거칠다. 그러나 돌담은 마을사람 심성 닮아 반듯하다
▲ 상서마을 돌담 상서마을 담은 돌로만 쌓은 강담이다. 돌 모양도 여러 가지다. 거친 섬생활을 닮았는지 모나고 거칠다. 그러나 돌담은 마을사람 심성 닮아 반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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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햇발 대신 빗발이 퍼부었다. 수백 년 걸쳐 만든 구들장논과 다랭이논의 템포에 맞춰 천천히 상서마을로 들어갔다. '황토분'을 바른 마을길은 먼지 없는 황톳길로 정갈하였다. 물건만 명품이 있는 게 아니었다. 마을은 국립공원명품마을로, 돌담은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청산도 첫 동네는 상서마을에서 조금 떨어진 덜리(걸리 乞里)라 들었다. 여기에 터 잡은 지는 400년 가까이 되었다 하나 입으로 전해질뿐 자료는 없다. 덜리에는 60년대까지만 해도 10여 가구가 살았지만 지금은 빈터로 남아있다. 

상서(上西)마을은 복되고 길하다는 의미의 상서(祥瑞)마을로 알려져 있으나 마을돌비석에는 상서(上西)로 되어있다. 상서(祥瑞)라는 이름이 더 그럴듯해 보이나 마을이름을 대놓고 멋지게 짓지 않은 것이 우리의 고운 마음씨다.

옛 마을이름의 유래를 읊어보면 큰 나루터가 있어 한개마을이요, 옻나무가 많으면 옻골이다. 지초(芝草)가 많아서 지전마을이요, 학을 품어 학동마을이고 큰 밤나무마을이라 한밤마을이다. 널다리가 있어 판교, 반교마을이요, 대나무 많아 죽정마을이다. 양지바른 동네라 양지리요, 음지 땅이라 음지리다. 성 너머에 있으면 성너머요, 당골 서쪽에 있어 서당골이다. 

상서마을 담은 흙 없이 돌로만 쌓은 강담이다. 섬사람의 거친 삶이라도 닮은 걸까, 돌은 거칠고 모가 났다. 정 맞은 것처럼 모난 산(山)돌이다. 모양도 가지가지. 송곳니 같은 송곳돌, 개 이빨 닮은 견칫돌, 딴딴하고 미끈한 먹돌, 몸집 큰 왕돌, 몸집 작은 잔돌, 호박 같이 둥근 호박돌, 푸석푸석한 푸석돌, 납작한 구들돌, 넓적한 널돌, 봉곳 돋은 봉곳돌, 짱구 닮은 짱구돌, 하나라도 같은 돌이 없다.

상서마을 돌담길  상서마을 돌담길은 이리저리 굽었다. 굴곡진 삶이라도 닮은 걸까
▲ 상서마을 돌담길 상서마을 돌담길은 이리저리 굽었다. 굴곡진 삶이라도 닮은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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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도 잘도 쌓았다. 돌 쌓는 기술로 따지면 이 마을사람들 따라갈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논에 구들을 놓은 그들인걸. 건성건성 쌓은 것 같지만 올지다. 틈을 두어 바람에게 양보할 만하지만 이 마을사람들은 그럴 생각이 없다. 담을 뚫지 못한 바람은 이리저리 굽은 고샅을 구불구불 비켜갈 뿐.

성서마을 돌담 정경 '황토분'을 바른 마을길은 정갈하다. 바람 무서워 지붕까지 돌담을 올렸다
▲ 성서마을 돌담 정경 '황토분'을 바른 마을길은 정갈하다. 바람 무서워 지붕까지 돌담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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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모난 돌, 산돌이라 하여 모나고 딱딱하게 쌓으면 하수다. 돌담은 반듯하고 적당히 굽어 부드럽다. 반듯한 것은 마을사람들의 고운 마음씨 닮아 그런 것이고 굽은 것은 마을사람들의 굴곡진 삶을 닮아 그럴게다. 지붕이 낮은 건지 돌담이 높은 건지 돌담은 지붕에 닿았다. 바람 무서워 그런 거다.

돌담길은 이웃마을 동촌(東村)으로 이어졌다. 매봉산 동쪽에 있어 동촌이라 불린다. 신라시대 때부터 사람이 살았다 하는데 마을머릿돌에는 '이조 선조(李朝 宣祖) 때 임란으로 타지에 피난, 탈출하였다가 300여 년 전 인조 때 다시 돌아왔다'는 내력이 적혀있다. '이조'라는 말이 거슬리긴 해도 마을내력이 비교적 자세히 적혀있어 눈여겨볼 만하다.

돌담은 동촌이 상서마을보다 낫다고 말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동촌의 세월을 담았나, 훗훗한 마을사람을 닮았나, 온 마을을 휘감은 돌담은 두툼하다. 반기는 사람 하나 없어도 온기가 느껴지는 것은 비 맞은 내 몸에서 솟는 훈김 때문은 아니겠지. 마을 한가운데 돌담 끝에서 400년 묵은 할머니나무가 나를 반기며 은은하게 내뿜는 온기일거야.  

 동촌마을 정경 동촌은 온기가 있다. 휘어진 돌담 끝에서 할머니나무가 내뿜는 기운일거야
▲ 동촌마을 정경 동촌은 온기가 있다. 휘어진 돌담 끝에서 할머니나무가 내뿜는 기운일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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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촌마을 돌담   동촌 돌담은 깊지도, 높지도 않지만 두툼하다. 훗훗한 마을사람 닮아 그런 것이다. 마을사람들 정이 ‘S’자 돌담타고 이어졌다
▲ 동촌마을 돌담 동촌 돌담은 깊지도, 높지도 않지만 두툼하다. 훗훗한 마을사람 닮아 그런 것이다. 마을사람들 정이 ‘S’자 돌담타고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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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같은 길만 바삐 오가고 축 늘어진 어깨에 핏기 없는 얼굴로 사소한 일에 핏대 세우는 소시민인 나는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상서와 동촌마을에서 이방인이 되었다. 과속방지턱이라도 되는 걸까, 마을 곳곳에 붙어있는 '슬로길'과 '느림은 행복이다' 글귀는 빨라지는 내 발걸음을 붙잡지만 '빠름병'에 걸린 내 몸은 앞으로 쏠리고 있었다.

정말 느림은 행복인가. 불치병 같은 '빠름'이 몸에 밴 우리는 정녕 행복해질 수 있는 걸까. 느리게 걷는 것만으로 '느림의 행복'을 얻을 것이라는 희망은 일치감치 포기하고 그냥 느리게 살아가는 청산도 마을사람들의 느린 일상을 훔쳤다.

‘느림은 행복이다’   ‘느림은 행복이다’는 과속방지턱 마냥 내 발걸음을 잡는다
▲ ‘느림은 행복이다’ ‘느림은 행복이다’는 과속방지턱 마냥 내 발걸음을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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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빠름병'을 앓고 있는 나는 청산도에서 느리게 살아가는 섬사람들의 행복을 훔친 행복도둑놈이 되었다. 그래도 이 짧은 순간 나는 행복했다. 느리게 살아가는 행복한 삶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구나.

덧붙이는 글 | 5/29-30, 완도군 여서도, 청산도에 다녀와 쓴 글입니다.



#상서마을#동촌마을#청산도#돌담#구들장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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