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2년 전 '느림의 미학'으로 야구계를 홀린 유희관은 올 시즌 리그 최고의 좌완 선발로 거듭났다. 2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최고 구속은 130km대 중후반에 불과하지만 나름대로 롱런 중이라는 게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그리고 지난 13일, 2년 전 유희관을 떠올리게 한 투수가 나타났다. 부상으로 이탈한 니퍼트를 대신할 '임시 선발'의 임무를 맡은 허준혁이 그 주인공이다. 불리한 매치업이라는 편견을 깨고 NC 타선을 무실점으로 꽁꽁 묶었다.

허준혁은 지난 13일 서울 잠실구장에서 열린 2015 타이어뱅크 KBO리그 NC와 두산의 정규시즌 7차전에 선발 등판해 6이닝 동안 무실점을 기록하며 환상적인 피칭을 선보였다. 기대 이상의 활약에 모두가 놀랐다.

허준혁, 완급 조절로 NC 제압했다

불펜에서 몸푸는 허준혁 지난 13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2015 타이어뱅크 KBO리그 NC와 두산의 정규시즌 7차전이 시작되기 전 두산 선발 허준혁이 몸을 풀고 있다. 위 사진에 대한 무단 배포를 금합니다.

▲ 불펜에서 몸푸는 허준혁 지난 13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2015 타이어뱅크 KBO리그 NC와 두산의 정규시즌 7차전이 시작되기 전 두산 선발 허준혁이 몸을 풀고 있다. 위 사진에 대한 무단 배포를 금합니다. ⓒ 유준상


니퍼트를 대체할 선발이 마땅치 않았던 건 사실이다. 니퍼트는 지난 7일 목동 넥센전에서 1회 갑작스럽게 강판당한 이후 검진을 받아본 결과 '오른쪽 어깨 충돌 증후군'이라는 진단을 받았고 1군 엔트리에서 말소돼 당분간 재활동에만 전념해야 한다.

대체 토종 투수들을 아무리 찾아보더라도 무게감이 떨어질 뿐만 아니라 이닝 소화에 있어서도 검증이 되지 않은 투수가 대부분이었다. 일각에서는 7일 경기에서 4.1이닝 동안 1실점으로 호투한 이현호가 후보로 거론됐는데 김태형 감독의 시선은 1군이 아닌 2군을 향했다.

코칭스태프의 상의 끝에 퓨처스리그에서 가장 컨디션이 좋았던 허준혁이 마운드에 올랐다. 조금은 의외의 선택이었을 법도 한데 이미 팀 내에선 1군행이 유력한 투수 중 한 명이었다. 퓨처스리그 평균자책점 4.60으로 전체 6위, 북부리그 내에선 1위를 마크하면서 김 감독의 레이더망에 걸려들었다.

상대인 NC 입장에서도 별다른 자료를 준비하기엔 1군 등판 기회 자체가 많지 않았다. 그래서인지 빠른 구속이 나오지 않았음에도 멀티히트를 기록한 김종호와 나성범 정도를 제외하면 그다지 돋보이는 활약을 펼친 타자가 없었다. 허준혁을 처음 접하는 타자도 있었다. 결론적으로 타순이 두 바퀴를 돈 시점에서도 무기력한 타선은 달라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반대로 허준혁 입장에서는 이를 이용해 완벽한 완급조절로 5회를 채우고 6회까지 책임지며 퀄리티스타트(QS)까지 기록했다. 4회나 5회까지만 막아줘도 선방이었던 시나리오는 두산이 생각했던 그 이상으로 전개되면서 팀의 승리까지 이어졌다.

이날 최고 구속은 130km대 중반을 넘지 않는 공이었고 100km대 중후반의 커브를 섞어가면서 타자들의 타이밍을 완전히 빼앗았다. 최고 구속과 최저 구속의 차이는 어림을 잡더라도 20km가 넘었다.

컨디션 난조까지 겹친 NC의 외국인타자 테임즈는 무안타에 그쳤고 전날 5안타를 기록한 박민우도 두 번째 타석에서 기록한 3루타 한 개가 전부였다. '낯설음'과 '완급 조절'이 적절히 섞인 허준혁의 완벽한 승리였다.

팬들에게 인사하는 허준혁 지난 13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2015 타이어뱅크 KBO리그 NC와 두산의 정규시즌 7차전이 종료된 이후 방송사 인터뷰 도중 허준혁이 관중석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위 사진에 대한 무단 배포를 금합니다.

▲ 팬들에게 인사하는 허준혁 지난 13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2015 타이어뱅크 KBO리그 NC와 두산의 정규시즌 7차전이 종료된 이후 방송사 인터뷰 도중 허준혁이 관중석을 향해 인사하고 있다. 위 사진에 대한 무단 배포를 금합니다. ⓒ 유준상


2년 전 유희관이 떠올랐던 허준혁의 피칭

시간을 2년 전 5월 초로 돌려보자. 당시 두산은 LG와 어린이날 시리즈 3연전을 치렀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어제와 마찬가지로 2차전에 선발 등판 예정이었던 니퍼트의 몸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져 대체 선발이 필요했다.

김진욱 감독(현 sky SPORTS 해설위원)은 4월 한 달간 주로 원포인트의 역할을 맡은 유희관 카드를 선택했다. 선발로 나서는 것은 시즌 개막 후 처음이었고 익숙하지 않은 이름에 두산팬들은 걱정 반 기대 반으로 경기를 지켜봤다.

그런데 보란듯이 예상을 엎어버리고 5.2이닝 동안 단 한 점도 내주지 않았다. 피안타 5개와 사사구 2개에도 흔들리지 않고 위기를 넘어간 게 발판이 됐다. 좌완 자원이 부족했던 두산에겐 소금과 같은 존재가 등장한 셈이었다.

빠른 구속보단 제구력 위주의 피칭을 선호했고 5~6이닝에 만족했던 이닝 소화도 2년이 지난 지금은 7이닝 이상 소화도 충분히 가능하다. 지난 달 10일 잠실 한화전에서는 완봉승을 거두기도 했다. 어쩌면 이것이 허준혁이 꿈꾸는 본인의 모습일지도 모른다.

알고 보면 유희관과 허준혁 두 투수의 공통분모는 많다. '에이스' 니퍼트를 대신해 올라온 것도, 시리즈의 두 번째 경기를 책임진 것도, 무엇보다 이전에는 꿈도 꾸지 못했던 두산의 '좌완 왕국 건설'에 한 몫을 했다는 것마저 비슷하다.

경기 후 인터뷰에서 허준혁은 "자만하지 않고 계속 1군에서 남을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승리 소감을 밝혀 팬들의 큰 박수를 받았다. 잊을 수 없는 승리의 기억을 이어나가면서 본인의 뜻을 이룰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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