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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이코프 탄광마을에서 일하던 한인 노동자들.
 브이코프 탄광마을에서 일하던 한인 노동자들.
ⓒ 최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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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양력 8월 15일이면 러시아 동부의 섬, 사할린이 들썩거린다. 한민족 최대의 명절인 '추석'을 쇠기 때문이다. 음력이 아닌 이유는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가 일본으로부터 해방된 날을 기리는 '해방절'과 함께 지내기 위해서다. 날짜는 다르지만, 우리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벌초를 하고 차례를 지내며 잔치를 벌인다. 야외경기장에서는 씨름대회도 열린다.

비단 '추석'만이 아니라 평소 풍경도 한국과 꼭 닮아있다. 이곳 재래시장과 상점에서는 담근 김치를 쉽게 구입할 수 있다. 식당에서는 오징어무침도 나온다. 봄이면 소쿠리를 들고 고사리를 뜯으러가는 풍경도 펼쳐진다. 바로 '한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왜 이곳에 살게 됐나... 멈춰버린 시계

얼어붙은 섬에 뿌리내린 한인의 역사와 삶의 기록 <사할린>
▲ 책표지 얼어붙은 섬에 뿌리내린 한인의 역사와 삶의 기록 <사할린>
ⓒ 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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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까지, 외국에서도 옹기종기 모여 사는 화목한 민족의 정이 떠오르는가? 미안하지만, 틀렸다. 이제 애써 떨쳐 내오던 진실과 만날 시간이다. 이들의 이면에는 우리가 외면했던 처절한 삶이 녹아있다. 최상구 작가는 이곳을 오가며 기록한 진실을 낱낱이 적었다. <사할린>은 그 결과물이다.

1910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자. 우리를 강제 병합한 일제는 토지조사사업을 벌이면서 한국인의 토지를 빼앗고 소작농으로 전락시켰다. 그 과정에서 생존을 위해 고향을 떠나 우리 국민 일부는 국외로 나가게 됐다. 선택이 아닌 강요였다. 이게 바로 동북아 재외동포의 역사가 시작된 가슴 아픈 배경이다.

특히 1930년대 '전시강제동원체제'는 이런 경향에 더욱 불을 댕겼다. 일본기업에 노동자를 조달하기 위해 소위 '감옥노동'이 횡행했다. 탄광, 벌목장, 도로공사, 높은 강도와 위험이 수반되는 곳이라면 한국인을 데려갔다. 사할린도 그 중 하나였다.

"한 집에서 한 명은 가야 한다고 해서 둘째인 내가 왔어요. 장가간 지 얼마 안 돼 바로 왔지. 2년만 일하면 된다고 하니까. 그때 나와 같이 강제로 끌려온 이들이 180명인데, 대구 칠곡군에 전부 모여 기차 타고 바다 건너 왔어요. 한 번 올 때 그렇게 몰아서 왔어. 그 180명 중에 지금 살아남은 이가 나까지 넷뿐이야." - 배용권씨, <사할린>에서 재인용

이들을 기다리는 건 감시와 통제 속의 중노동, 그리고 형편없는 식사였다. 책에 따르면 이들이 착취당한 임금은 일본 우정성이 확인한 액수만 1억8300만 엔으로, 현재가치로 따지면 약 4조4506억 원에 달한다.

그러나 일본은 당시 쓰던 통장을 가져오라며 버텼다. 수십 년 전 통장을 가지고 있는 이가 얼마나 되겠는가. 분통 터지는 일이다. 이마저도 아베 정권 출범 이후에는 "개인청구권은 소멸됐다"고 주장하는 실정이다.

사할린 한인문화센터에 있는 1905년부터 1945년 사이에 이루어진 한인들의 사할린 이주 경로. 자유롭게 이주한 경로는 점선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되어 이주한 경로는 실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사할린 한인문화센터에 있는 1905년부터 1945년 사이에 이루어진 한인들의 사할린 이주 경로. 자유롭게 이주한 경로는 점선으로, 일제에 의해 강제동원되어 이주한 경로는 실선으로 표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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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광기에 스러져간 목숨, 사할린 한인 학살

강제 이주와 고된 노동만 이들을 괴롭힌 건 아니었다. 러시아의 기록에 의하면 제2차 세계대전 사이에 사할린 거주 한인의 절반 가까이가 사라졌다. 정황으로 '학살'이 의심됐지만 구체적인 증언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다 2012년 11월, 사할린에 사는 황순영씨가 이모부와 이모부 동생이 일본군에 의해 학살됐단 소식을 어머니에게 전해 들었다고 증언함으로써 소문으로만 떠돌던 '학살'이 최초로 밝혀지게 됐다.

일본의 패색이 짙던 당시, 초조했던 그들은 불안감을 해소할 대상이 필요했다. 희생양을 찾던 집단 광기는 가장 약한 계층을 덮쳤다. 바로 한인이다. 사할린의 '가미시스카 학살사건'과 '미즈호 학살사건'은 그나마 증언을 통해 세상에 알려진 대표적인 살육의 현장이었다.

사할린의 중심부에서 멀리 떨어진 레오니도보의 어느 공터에는 '통한의 비'가 세워져 있다. 이는 학살의 광풍에 아버지와 오빠를 잃은 김경순씨가 조성했다. 김씨의 증언에 따르면 "일본 헌병과 경찰이 경찰서에 있던 조선인들을 살해"했다고 한다.

천신만고 끝에 일본으로 도망친 김씨는 훗날 유골이라도 찾고자 다시 이곳을 방문했지만 허사였다. 대신 일본군의 만행을 알리고 참혹하게 죽어간 한인들의 넋을 기리고자 이 비를 세웠다. 김경순씨는 한국전쟁 당시 여군으로 활동해 국가 유공자로 지정될 만큼 활동적이었지만 사할린 한인 문제 해결을 보지 못하고 끝내 작년 7월, 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레오니도보의 어느 공터에 세워진 통한의 비. 일본군에 의한 사할린 한인 학살의 진상을 알려주고 있다.
 레오니도보의 어느 공터에 세워진 통한의 비. 일본군에 의한 사할린 한인 학살의 진상을 알려주고 있다.
ⓒ 최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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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일본인 남자들과 조선인들만 남게 된 마을 분위기는 스산하고 흉흉했다. 자국의 패전과 소련군의 진격 소식에 불안해한 일본인 사이에서 '조선인들은 스파이'라는 소문이 떠돌기도 했다. 하지만 그 누가 짐작이나 할 수 있었을까. 마을에서 서로 알고 지내던 일본인들이 광기 어린 살인마로 변해 조선인 전체를 그처럼 처참하게 살해할 줄. - <사할린>에서

한인이라면 누구나 바랐을 고국의 해방이 마침내 도래했지만, 그 누구도 마음 놓고 기뻐할 수 없었다. 일본과 소련의 전쟁 틈바구니에서 그 어느 쪽에도 속할 수 없었던 사할린 한인들은 얼마나 막막하고 두려웠을까.

아직 끝나지 않은 사할린 한인들의 '잔혹사'

그렇다면 그들은 왜 해방 후에도 고국으로 돌아오지 못했을까. 그런 고초를 겪었으면 어서 한국으로 돌아오면 될 게 아닌가, 이런 생각을 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게 그리 간단치 않은 문제였다.

1945년 8월, 소련은 대일선전포고와 함께 일본인의 출국을 금지했다. 당시 조선인은 일본 국적으로 취급됐기에 당연히 사할린을 벗어나지 못했다. 거기다 사할린의 점령국이 일본에서 소련으로 바뀌면서 전쟁 후 사할린에서 처리돼야 할 모든 문제는 연합국 총사령부와 소련에게로 넘어가버렸다.

따라서 그들에 대한 처우는 국제 정세나 상황 논리에 따라 그때그때 달라졌다. 어제는 승전국민으로 대접받다가 오늘은 패전국민으로, 내일은 난민으로 치부되는 등, 일정하지 않았다.

"1945년부터 1948년까지 조선인에 대하여서는 일본 당국이 조선인들을 일본 공민으로 간주하지 말 것을 공식 요청하였습니다. 그래서 조선인은 무국적자로 소련에 영주하게 되었습니다." - 소련 적십자사 총재, <사할린>에서 재인용

나서야 할 한국 정부는 시간이 지나도 미적거렸다. 이승만 정권은 재외동포 전체에게 상당히 비우호적인 태도를 보였다. 반공주의를 국시로 삼은 이승만 대통령은 재외동포의 본국 출입과 국내 정치 참여를 극히 제한했다. 그러다가 일본은 1951년, 사할린 한인들의 일본 국적을 박탈해버렸다.

그렇게 그들의 '창살 없는 감옥' 생활이 다시 시작됐다. 그 후로 이런저런 논의가 진행됐지만 어느 것 하나 이들의 눈물을 닦아줄 수 없었다. 최근 수년간 징용 1시대의 영구 귀국이 추진됐지만, 사할린 현지에 남은 후손과 생이별을 견딜 수 없어 결국 다시 돌아가거나, 귀국을 미루고 있는 실정이다. 또다시 이산가족이 될 수는 없잖은가.

더 늦기 전에 그들의 눈물이 닦일 수 있기를

한인들의 묘가 밀집되어 있는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제1공동묘지. 역설적이게도 일본인 위령탑 근처에 한인의 묘가 많다.
 한인들의 묘가 밀집되어 있는 유즈노사할린스크의 제1공동묘지. 역설적이게도 일본인 위령탑 근처에 한인의 묘가 많다.
ⓒ 최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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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러니하게도 사할린에는 일본 정부가 2005년 건립한 '사할린한인문화센터'가 있다. 이들에게 일본이 어떤 의미일까. 우리 정부가 손 놓고 있는 사이, 사할린 한인들은 자신들의 정체성을 찾을 변변찮은 시설 하나 갖지 못했다.

많이 늦었지만, 올해 들어 사할린 역사기념관과 추모관 건립을 위한 계획이 추진 중이다. 이마저도 시민단체가 주도하고 있다. 모금활동 상황에 따라 건립을 하지 못할 수도 있다고 한다.

사할린 한인의 슬픈 역사는 사라져가고 있다. 그들의 꽃다운 시절, 행복한 웃음, 엄혹한 시대, 비참한 눈물까지 모두가 우리의 역사다. 역사는 '기록'되어야 한다. <사할린>의 최상구 저자는 기자와 한 이메일과 전화 인터뷰에서 이렇게 호소했다.

"해방이 된 지 70년이고 소련의 국경이 열린 지도 25년이 흘렀습니다. 그럼에도 영주귀국사업, 그것도 자식은 못 데려가는 비인도적인 사업 이외에 사할린 한인들에게 이렇다 할 손길이 미치지 못했습니다. 한일협정 50년이 지났습니다. 지난 2005년 한국정부는 한일협정의 의제에 사할린 한인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밝혔습니다. 그로부터 또 10년이 지났지만, 이 문제에 대해 일본과 어떤 교섭이 있었는지, 어떤 성과가 있는지 묻고 싶습니다." 

그들은 간절히 외치고 있다. 듣는 이 없어도 여기, 이곳에 사람이 산다고, 한인이 산다고, 자신들을 내친 한국의 전통을 간직하며 여전히 산다고. 쫓겨 오고 방치된 채 돌아갈 수 없지만, 고향 그리워 김치 먹고 씨름 하며 추석 쇠는 '사람'이 있다고 말이다.

일본 정부는 사할린 한인들에 대한 법적 책임을 인정하지 않고 있고, 한국 정부는 '일본이 책임지라'며 뒤짐만 지고 있다. 그러는 사이, 지금 이 순간에도, 사할린에는 한인들의 무덤만 늘어가고 있다.

이제 이주 1세대는 단 천명도 남지 않았다. 이들이 고향땅을 밝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우리의 관심에 달려있다. 이미 상당수는 강제노역으로 사망하거나 일본의 패전 이후 방치되다시피 한 채 생을 마감했다. 냉전체제는 이들의 정체성을 빼앗고 군국주의는 이들의 목숨을 빼앗았다. 더 늦기 전에, 그들의 눈물이 닦이길 간절히 소망한다.

사할린 한인 2세가 자필로 쓴 편지


맞춤법이 틀리고 어색한 표현이 있더라도, 쓴 사람의 진심을 고스란히 전하기 위해 고치지 않고 그대로 옮깁니다. - 기자말

사할린 한인 2세가 자필로 쓴 편지
 사할린 한인 2세가 자필로 쓴 편지
ⓒ 최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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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신 국회원님
저는 싸할린에서 사는 박정순입니다.

저의 아버지는 1942년도에 강제징용으로 싸할린으로 오시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총각으로 싸할린에 오셨습니다. 싸할린에서 어머님과 결혼하게 되었습니다. 싸할린에서 6남매가 태어났습니다. 탄광에서 힘들은 일을 하셨습니다. 어렸을 때 생각이 저의 아버님이 1945년 8월 15일 싸할린이 해방되자 한국으로 떠나갈 기회가 없어졌습니다. 부모님들은 항상 부모 형제 생각하며 눈물로 남은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쏘련 여권을 받지 않고 내공민증을 받았습니다. 내공민증을 가진 사람들은 사는 도시에서 다른 도시로 떠나기가 불가능했습니다. 꼭 허락을 받아야 했습니다. 1998년부터 한국으로 영주귀국을 하게 되었습니다. 싸할린에 계신 세들이 거진 다 한국고향으로 떠났습니다. 저의 어머님 연세는 89세입니다. 친구들이 다 귀국하시고 어머님은 이 싸할린에서 외롭게 사시고 있습니다. 해방이 되고 부모형제를 그리워하신 마음을 잊지 못하시고 한국으로 떠나면 싸할린에 있는 자식들을 보고 싶어서 못 가시는 이유입니다. 어머님은 고향을 그리워하시면서 자식들을 두고는 못 가신.

존경하신 국회원님 2세 3세 문제도 빨리 해결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기 전에 어머님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싸할린 특별법안의를 속히 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 편집ㅣ최유진 기자

덧붙이는 글 | <사할린> (최상구 지음 / 일다 펴냄 / 2015.01 / 1만3500원)



사할린 1

이규정 지음, 산지니(2017)


태그:#사할린, #일다, #최상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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