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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미동부터는 영천시내권이다

영천 시내에 들어선 조선통신사 옛길걷기 일행
 영천 시내에 들어선 조선통신사 옛길걷기 일행
ⓒ 이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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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통신사 옛길걷기 행렬은 이제 오미동에 이른다. 오미동은 금호강의 지류인 고현천의 동쪽에 펼쳐진 동네다. 천문로라는 길이 고현천을 따라 남북으로 길게 이어진다. 걷기팀은 오미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영천 시내로 향한다. 길은 오르막이다. 뒷고개로 알려진 작은 고개를 넘으면 영천의 도심이 시작된다. 천문로는 창구동, 중앙동, 성내동으로 이어진다.

행렬이 중앙동에 이르자 농악대의 풍물소리가 들린다. 옛길걷기팀을 환영하는 20명 정도의 농악대다. 상쇠가 꽹과리를 치면서 농악대를 리드한다. 걷기팀도 두 줄로 나란히 서서 농악대를 따라 간다. 주민들도 관심을 가지고 농악대와 걷기팀을 바라본다. 조용한 시골 도시 영천에 활기가 돈다. 일행은 드디어 중앙사거리에 이른다.

조양공원으로 들어 서는 옛길걷기팀
 조양공원으로 들어 서는 옛길걷기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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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곳에서 남쪽으로 똑바로 가면 금호강에 놓여있는 영천교를 건너 영천역에 이른다. 그리고 좌회전해 최무선로를 따라가면 영천시청에 이른다. 조선통신사 옛길걷기팀을 위한 전별연이 조양각에서 있기 때문에, 우리 일행은 좌회전해 조양공원으로 향한다. 조양공원은 2003년 현재의 모습으로 조성된 영천 시내의 대표적인 공원이다. 이곳에는 조양각, 사현대, 황성옛터 시비, 영천지구 전승비, 산남의진비 등이 있다.

조양공원과 조양각 이야기

영천 조양각
 영천 조양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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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각은 금호강 북쪽 벼랑(청석바위) 위에 남동향으로 앉아 있다. 1638년 군수 한덕급(韓德及)이 명원루 터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중층 누각을 짓고 조양각이라 불렀다고 한다. 그 후 여러 차례 중수와 해체 복원을 거쳐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양각 안에는 이곳을 지나간 시인묵객들의 시가 걸려 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것이 포은 정몽주의 '청계석벽(淸溪石壁)'이다. 당시 조양각의 이름은 명원루(明遠樓)였다.

석벽 아래 맑은 시내 고을을 굽이돌고                    淸溪石壁抱州回
새로 지은 누각에 다시 오르니 눈앞이 탁 트인다.     更起新樓眼豁開
남쪽들의 황금물결, 시절이 무르익음을 알겠고        南畒黃雲知歲熟
서산의 상쾌한 기분, 아침이 온 줄 알겠네.              西山爽氣覺朝來
풍류를 즐기는 태수는 쌀 이천 석을 내고                風流太守二千石
오랜만에 만난 친구와 술 삼백 잔을 나눈다네.         邂逅故人三百盃
곧 이어 밤이 깊어 옥피리 불어대니                       直欲夜深吹玉笛
높이 뜬 밝은 달이 함께 흘러가누나.                      高攀明月共徘徊

전별연 플래카드가 걸린 조양각 공연장
 전별연 플래카드가 걸린 조양각 공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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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길걷기 일행은 25㎞나 걸어 피곤한 근육을 맨손체조로 푼다. 그리고는 조양각 앞에 마련된 행사장으로 향한다. 행사장에는 전별연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분주하다. 무대 뒤로 "영천시 포은문화예술단 '찾아 가는 전별연'"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이들 예술단은 시조창, 화관무, 민요, 국악공연을 우리 옛길걷기 일행에게 보여주고 들려줄 예정이다.

전별연을 위해 마련한 노래와 춤

조선통신사 옛길걷기팀을 위한 이번 전별연은 영천문화원이 주도적으로 준비했다. 영천문화원 회원들이 조양각 동쪽에서 시조창을 연습하고 있다. 그리고 조양각 안에서는 여섯 명의 무용수들이 화관무를 연습하고 있다. 또 영천초등학교 국악합주단은 국악과 양악을 연습하고 있다. 아마도 영천에서 전통예술을 한다는 사람들이 이곳에 다 모인 것 같다.

시조창을 준비하는 영천문화원 원로회원들
 시조창을 준비하는 영천문화원 원로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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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별연은 영천문화원 원로회원들의 시조창으로 시작되었다. 이들이 부른 시조는 정몽주의 '단심가'다. 남성회원 4명, 여성회원 4명, 여승 1명이 대금 소리와 장구 장단에 맞춰 노래를 부른다. 6분 30초 정도 되는 길이로 부르는 긴모리 형식이다. 두 번째 공연은 화관무다. 족두리 같은 화관에 비녀를 꽂고, 한삼(汗衫) 자락을 휘날리며 덩실덩실 춤을 춘다. 모두 6명이 공연을 한다.

다음으로는 남자 1명 여자 4명으로 구성된 민요팀이 장구 장단에 맞춰 '배따라기'를 부른다. 이 노래는 산천가, 영천 아리랑으로도 불린다. 영천 아리랑은 중국과 북한에서 불리다 국내에 소개되었다.

화관무
 화관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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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린가 쓰라린가 영천인가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소.
머루야 다래야 더 많이 열려라
산골집 큰애기 신바람 난다.
누구를 주자고 산열매 따나
큰애기 말없이 웃기만 하네.

그리고는 영천초등학교 국악합주단이 영상회상 중 '세령산(細靈山)'을 연주한다. 세령산은 상영산, 중영산 다음에 불러지는 빠른 영산회상이다. 음악이 빠르려면 음표를 잘게 쪼개야 하기 때문에, 세령산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다. 그래서 세령산을 잔영산이라 부르기도 한다. 세령산 연주 다음에는 남자와 여자 무용수가 나와 서양음악에 맞춰 춤을 춘다. 국악으로 연주하는 'Let it be(렛 잇 비)' 등이 인상적이다.

국악합주단과 함께한 민요팀
 국악합주단과 함께한 민요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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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으로는 국악합주단의 반주에 맞춰 민요팀이 나와 민요를 부른다. 그리고 또 다시 정몽주의 단심가를 부른다. 그러고 보니 영천이 내세우는 가장 중요한 인물이 포은 정몽주다. 그는 이곳 영천 출신으로, 고려말 일본을 방문하고 <정포은봉사시작(鄭圃隱奉使時作)>을 남겼다. 포은의 시를 이곳에서 듣고 보게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그런데 국악합주단의 수준이 높질 않아 감동은 덜한 편이다. 기본적으로 현에서 너무 끽끽 소리가 난다. 연습을 좀 더 해야 할 것 같다. 일반적으로 현은 부드러운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공연이 끝나고 영천시장과 시민 그리고 조선통신사 옛길걷기팀이 참여한 공식적인 환영행사가 열렸다.

조양각에서의 기념 촬영
 조양각에서의 기념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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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행사에서 김영석 영천시장은 2015년 한·일 수교 50주년을 맞아 서울에서 동경까지 걸어가는 조선통신사 옛길걷기팀을 환영하는 인사를 했다. 그리고 선상규 한국측 대표와 엔도 야스오 일본 대표가 답사를 했다. 그리고 시장과 양측 대표가 서로 기념품을 주고받았다. 환영행사가 끝난 후 이들은 조양공원에서 기념식수를 했다. 나무 옆에는 '조선통신사의 길'이라는 표지석을 세웠다.

기념식수 후 조선통신사 옛길걷기팀은 영천시장, 전별연 공연자와 함께 기념사진을 찍었다. 그들 모두는 부산을 거쳐 동경까지 계속될 걷기에 무운장구를 비는 파이팅도 외쳤다. 이들 행사를 끝낸 시간이 오후 6시 30분이다. 모든 행사가 끝난 후 이들은 저녁식사를 하러 시내로 이동한다. 영천에서의 하루는 여러 가지 행사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길었다.

조양각에서 행해진 조선통신사 전별연 기록

경기도 고양에 있는 역관 김지남의 묘
 경기도 고양에 있는 역관 김지남의 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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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관 김지남(金指南)이 쓴 <동사일록(東槎日錄)>에 보면, 1681년(壬戌) 5월 20일 영천 조양각에서의 연회가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이 때 삼사는 정사 윤지완(尹趾完), 부사 이언강(李彥綱), 종사관 박경후(朴慶後)다. 그리고 삼사를 포함한 일행은 473명이었다.

"맑음. 아침밥을 먹은 후에 먼저 떠나서 영천에 도착하여 잤다. 이날 또 역마를 갈아탔다. 본도(本道) 방백(方伯)이 아홉 군(郡)으로 하여금 각각 세 사행(使行)에게 전별 잔치를 차리도록 하여 아홉 군의 풍물(風物)이 모두 여기에 모였다. 정사의 일행에겐 합천·삼가(三嘉)에서 접대하는 것으로서 음식이 정결하고 또 풍부하다. 삼사와 방백은 객사 동헌에 잔치를 열었는데 앉을 자리가 비좁기 때문에 잔치상을 일행의 하처(下處)로 나누어 보내고, 겸해서 위로하는 말을 보냈다. 각 관원과 노자들의 곳으로도 잔치상을 보내었다. 이것은 만 리 바닷길을 가는 것을 정중히 대접하기 때문이다."

전별연에 참가한 옛길걷기팀
 전별연에 참가한 옛길걷기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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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63년 이곳 영천을 지나던 통신정사 조엄(趙曮)은 <해사일기(海槎日記)>에서 전별연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전별연에 참가한 사람이 만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 대단한 행사다.

"맑음. 영천(永川)에 닿았다. 도백(道伯) 김상철(金相喆)이 보러 오고, 이어 전별연을 조양각(朝陽閣) 위에다 차렸으니 전례이다. 내가 비록 상중(喪中)이나 가지 않을 수 없었지만 그 때문에 풍악을 울리고 상을 받을 때엔 방안으로 피해 들어갔다. 반나절을 감사와 세 사신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개 이는 영남의 성대한 모임이므로 구경하는 사람이 거의 만 명에 이르렀다."


태그:#영쳔 조양각, #전별연, #노래와 춤, #전별연 기록, #한일 수교 50주년 기념 조선통신사 옛길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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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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