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자신의 자택에서 "기자 양반, 내 말 한 번 들어 볼텨"라며 이야기 보따리를 풀어 놓는 박제원(79, 경기도 안성 금광면 장죽리) 할아버지. "내 생전에 이야기해야 이런 이야기가 사라지지 않을 거 같아 그려"란 말을 보태며 그가 들려준 이야기가 흥미롭다. 마치 '흥부와 놀부' 같은 그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 이야기는 박 할아버지가 지금 사는 마을의 옆 마을 석하리 양지편마을('흰돌리마을'이라고도 함) 이야기다. 1920년에 일본 사람들이 그 마을에 광산을 발굴해 '은옥광산(지금도 그 마을 땅 속엔 폐광이 잠자고 있다)'이라고 이름 지었다. 은이 많이 나온다 하여 '은옥'이라 했지만, 지금부터 들려 줄 이야기는 금덩이에 대한 이야기라 아이러니하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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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제완 할아버지 올해 79세인 박제완 할아버지는 6.25 한국 전쟁 때, 이 골짜기에 피난 와서 자리를 잡았다. 이 기사에 들려주는 이야기들은 할아버지의 선배와 아버지 벌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이런 이야기를 자기 생전에 해야 할 거 같다는 마음이 들었다고 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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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씨네는 금으로 부자가 된 겨""대동으로 조씨란 사람이 아들 다섯을 데리고 이사 온 겨. 근디 그 조씨 부인이 밤마다 꿈에 '묘지에서 사람이 나와 나를 위하면 좋은 일이 생길겨"라 하더랴. 그래서 그 부인이 날마다 '고시레(산이나 들에 성묘하고 남은 음식을 던지는 풍습)'를 한 겨. 그 귀신 먹으라고 말여.
조씨는 광산의 잡부로 일했단 말이여. 신기하게도 조씨 눈에만 금 조각이 가끔 눈에 띄더란 말이지. 그랴서 조심스러웠던 아내가 조씨에게 꿈을 이야기 하니 무릎을 친 겨. '그래서 그랬구나' 하면서.
그 후로도 금 조각을 주워서 조씨네는 돈을 좀 벌었쟈. 지금도 그 산을 조씨네산(석하리 대동마을쪽)이라고 그랴. 조씨 큰 아들(조한일)은 나랑 같이 학교도 다녔는디, 지금은 서울서 잘 살고 있재."
여기서 이 이야기가 끝나면 재미없다. 흥부가 박씨를 통해 부자가 된 걸 보고 놀부가 제비다리를 부러뜨렸다거나, 혹부리 영감이 도깨비에게 혹을 떼어주고 금을 얻으니 옆 마을 혹부리 영감이 도깨비에게 혹 주러 갔다 혹 더 붙인 이야기와 같은, 스펙터클한 이야기가 이어진다.
금덩이 판 지폐를 마당에서 다 태우다니, 왜?"송말에 구복이 형제 이야기는 이 골짜기에서 유명한 이야기제. 지관(묘지 자리 봐주는 사람)이 묘지 방향만 잘 잡으면 복이 온다고 구복이 형제에게 말한겨. 그이들이 나보다는 10살 이상 더 위일겨. 암튼 조씨네 횡재 소식을 들은 그 형제도 한몫 잡아보려고 아버지 묘소를 이장 시킨겨.
아니나 다를까. 덕시골에서 그 형제가 지게 다리만한 금덩이를 주은겨. 크기로 말하면 40~50cm니 얼마나 큰겨. 횡재한 거지.
이 금덩이를 안성읍내 금방 사람에게 보여주니 입이 딱 벌어지면서 '지금 돈이 다 안 되니 내일 다시 오소'라 한겨. 당시 안성읍내 유일한 조흥은행에서 돈을 찾아 구복형제에게 줬는디, 100원 지폐를 비료 가마니에 하나 가득 눌러 담아준 거 아녀. 당시엔 시골서 300원만 있어도 부자소리 듣던 때 였는디.
그런디 말여. 어느 날, 그 돈을 마당에서 태우더랴. 왜? 일본이 항복하고 후퇴했응게 이 돈은 못 쓸 거라며 태웠다는겨. 그 많은 돈으로 그 형제가 산 거라 곤 '베 다섯 필과 보리쌀 다섯 말'이 고작이라 이 말이여. 사실은 몰라서 그런 거제. 환전하면 될 것인디. 허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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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밭일 찾아간 5월 5일 어린이날, 박제완 할아버지는 자신의 집 뒤에서 텃밭을 일구고 있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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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덩이 챙겨 야반도주 했지만, 결국........"이상혁씨 작은 아버지 이야기는 더 기가 막히재. 이씨가 어느 날 기가 막히게 좋은 꿈을 꾼겨. 친구와 함께 셋이서 꿈에서 본 그 자리로 금을 캐러 간겨. 15일 정도 물을 퍼내고, 땅을 팠는디 헛수고 한겨. 셋이서 '이렇게 감(금 줄기가 나올 것 같은 곳을 '감'이라고 한다)이 좋은 데서 어째 금 한입도 안 나온디야'라며 이상히 여긴겨.
집으로 돌아온 이씨는 그 밤에 또 꿈을 꿨는디 그 꿈이 기가 막히게 좋더랴. 그래서 이번엔 혼자서 그곳을 찾아간겨. 그런디, 이씨 눈에 팔뚝만한 금덩이가 눈에 확 들어 오더랴. 숨겨져 있던 금덩이가 물이 차오릉게 반짝 빛났던 거제. 실은 셋이서 금덩이를 캐냈지만, 그게 숨겨져 있었던 거제.
그길로 이씨는 집 팔고 논도 팔아 서울로 이사를 한겨. 사람들은 '저 사람 미쳤나. 한창 농사철에 농사 안 짓고 왜 갑자기 이사 가나'라고 혔재. 이씨는 서울 가서 집도 몇 채나 사서 부자가 된겨.
근디, 그 이씨가 얼마 안 있어 암이 걸린겨. 그 많은 돈을 얼마 써 보지도 못하고, 암 고친다고 힘쓰느라 거의 다 날려 부렀다네. 임종을 앞두고 이씨는 당시 친구 둘을 불러 '내가 욕심 부려서 죄 받은겨. 친구들아 용서혀'라고 했다는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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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광산 땅굴 현재 안성 금광면 양지편마을(흰돌리마을) 땅 속엔 이런 땅굴이 개미집 처럼 여러 갈래로 나 있고, 1 KM 이상의 길이로 나있다. 사진은 현재의 광산 땅굴 모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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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안성 금광면 양지편마을(흰돌리마을) 땅속엔 광산 땅굴이 개미집처럼 묻혀 있다. 일본이 물러가고도 한참을 광산이 운영됐지만, 더 이상 금은이 발굴되지 않아 폐광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곳 일대를 광산이라 하고, 그 땅속엔 지금도 폐광이 잠자고 있다.
비록 광산은 폐광되었지만, 박 할아버지 덕분에 그 일화들은 폐광되지 않았다. '스펙터클한 민담'이 세상 밖으로 나왔다. 사실은 금덩이 하나에 울고 웃던 사람들의 이야기는 가난했던 시절에 지긋지긋한 가난을 면해 보려 '일확천금'을 꿈꾼 우리 아버지 어머니들의 이야기였던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