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보는 풍경이다.
할아버지 한 분이 논에 물을 대기 전에 논둑을 다지고 있었고, 비닐을 씌워 고랑을 이룬 밭에선 푸릇푸릇 싹들이 올라오고 있었다.
도시인의 삶을 살아가면서 잃어버렸던 우리 아버지의 모습이며, 형님의 모습이기도 하고, 어린 시절 이맘때면 주전자에 막걸리를 받아 논밭으로 오가던 나의 모습이기도 하다.
<잡식가족의 딜레마>가 아직 공식상영되지는 않았지만, 감독은 영화를 위한 펀드를 모집하는 과정에서 문득, 살아있는 돼지를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그것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
대학생인 아이들에게 물었다.
"삼겹살 좋아하는 너희들은 살아있는 돼지를 본 적이 있니?""아니요?"정말이었다. 돼지뿐만 아니라, 쌀도 밀도 보리도 심지어는 과일의 꽃이나 싹도 어떤 과정을 거쳐 누구의 손에 의해 우리의 식탁에 오는지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서울 사람들이 딸기의 제철이 겨울이라고 아는 것처럼 말이다.
봄이 오면 농촌에서는 일정한 패턴들이 만들어지기 시작한다. 흙은 캔버스요, 농부들은 캔버스에 그림을 그리는 화가 혹은 예술작품을 설치하는 설치예술가들이다. 두럭두럭 검은 비닐들과 일정한 간격으로 돋아난 싹들과 홍일점처럼 그곳에서 일하는 농민의 모습은 한 폭의 그림같다.
물론, 그렇다고 모두 낭만처럼 보이는 것은 아니다. 낭만으로 그 모습을 보기에는 너무도 많은 것을 알아버린 나이다. 낭만으로 농촌생활을 동경했을 때에는 그저 아름답게 보였지만, 그 속내를 알고있는 지금은 그저 낭만으로만 보이질 않는다. 오히려 처절한 투쟁이다. 의미보다는 삶의 모든 내용을 경쟁 혹은 투쟁으로 만드는 현실이 야속할 뿐이다.
인간의 먹을거리를 생산해 내는 '거룩한 일'
몇 년 전만해도 교동에 들어가려면 창후리 선착장에서 배를 타고 월포리 선착장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그러나 교동대교가 개통된 이후에는 접근성이 좋아졌다.
접근성이 좋아진 것이 교동을 위해서 좋은 것인지 아닌지 아직은 판단이 서질 않는다. 조심스레, 그곳이 여느 개발의 광풍처럼 외지인들만 돈 벌고, 원주민들은 소외되는 상황이 되지 않길 바랄뿐이다.
아직 마을과 마을로 이어진 길들은 차가 교차하기엔 다소 좁다. 벼농사를 준비하는 교동, 이미 논을 다 갈아놓았고 물을 댄 논들도 많이 보였다. 조만간 논마다 벼를 심으면 일렬로 늘어선 벼들이 또 하나의 작품이 될 것이다. 그 작품은 화폭에 담긴 죽은 풍경이 아니라 살아 숨쉬는 작품으로 매일매일 다른 모습으로 다가올 것이다. 나는 이렇게 살아있는 예술작품이 좋다.
느릿느릿 앞서가는 트랙터, 나는 그 뒤를 속절없이 따라갈 수밖에 없다. 그래도 좋다.
무슨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중일까? 손수레를 보아하니 뭔가를 잔뜩 싣고 왔다가 일을 마치고 돌아가는 중이다. 걸음걸이가 힘겨워 보인다. 저런 수고를 우리는 먹고 사는 것이다. 그저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라고 치부하지 말자. 그저 살기 위해 일하는 것이라도 인간의 먹을거리를 생산해 내는 일은 거룩한 일이다. 아무리 혼신의 힘을 다해 하는 일이라도, 먹을 것을 하나도 만들어내지 못하는 일은 큰 관점에서 보면 흙을 가꿔 하나의 싹을 틔우고 열매 맺게 하는 일보다 의미있다고 할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정치인들만큼 무용지물인 계층도 없을 것이다. 입과 머리로만 먹고사는 이들이 국민 위에 군림하고, 이권을 챙겨주는 대가로 돈이나 챙기고, 그깟 쌀 한톨 나오지 않는 정책제안은 고사하고, 온갖 비리부패에 연루되고 심지어는 국민의 혈세를 제 돈처럼 마구 써대며 국민의 속을 긁어대는 무용지물한 존재들이 떵떵거리며 사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일 수 있을까?
저렇게 일을 마치고 힘겹게 집으로 향하는 걸음, 그런 삶을 오히려 귀하게 봐야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 터이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떠올리게 만든 한 장면
교동 초입의 마을에서 다소 마음 아픈 모습을 만났다. 한 할머니가 밭에 올라온 새순들 중에서 봄나물을 뜯고 계셨다. 아마도 그 봄나물들을 뜯어내야 채소거리라도 심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런데 마음이 아픈 부분은 할머니가 거의 무릎을 꿇고 밭을 기어다니다시피하며 일을 하시는 모습이었다. 나는 젊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40대 초반에도 밭일을 오래 하다보면 잘 일어나지도 못하고 그냥 밭에 철퍼덕 주저앉아 일했던 경험이 있다. 밥벌이를 위한 일이 아니라 텃밭이었음에도 단내가 날 정도로 힘들 때에는 그렇게 일어나지도 못하고 일했던 것이다.
이제 나이 오십이 넘어서 부터는 앉았다가 일어날 때에 나도 모르게 "아이고야!" 소리가 난다. 그러니 밭일을 하는 저 할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무릎 관절의 고통뿐 아니라 과거 일중독에 걸린 것처럼 일을 하시던 돌아가신 어머니 생각에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그렇게들 아픈 사연들이 있고 몸은 고달프고 힘들지만, 조금씩 해 나가면서 마침내 하나하나 밭이며 논이며 완성해 간다. 정리가 끝난 밭들은 모두 정갈하다. 그리고 강화도와 교동의 흙은 어찌 그리도 붉던지 주변의 수수한 집들이나 오래된 것들에게 활기를 불어넣어주는 것 같았다.
이 모든 일들, 겨울에서 봄, 완연한 봄에 일어나는 변화들은 시기가 있다. 요즘엔 꽃들도 계절을 잊고 피어나곤 하지만, 옛날의 농사는 '무슨 꽃 필무렵'이었던 것이다. 그 유명한 '메밀꽃 필무렵'도 있지만, 하루 삼시세끼를 챙길 때에도 무슨무슨 꽃과 연결을 짓곤 했던 것이다.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논에 물을 가두기 시작할 때, 고추모종이나 가지모종을 내야할 무렵에 피는 꽃은 '으름덩굴'이었다.
으름덩굴은 향기가 좋다. 암꽃과 수꽃이 함께 피어나는데, 바나나 속살같은 맛을 품은 열매를 맺는다. 검은 씨앗이 많이 들어있어 먹는 데는 불편하지만 '한국산 바나나'로 불릴 정도로 바나나와 맛이 흡사하고, 모양새도 닮았다.
군것질거리가 많지 않았던 시절엔 으름덩굴의 열매가 귀한 군것질거리가 되었음을 물론이다. 으름덩굴의 향기는 아까시 향기보다도 훨씬 진하다. 그리고 그보다 먼저 피어나고 무엇보다도 아침이 열리는 시간에 풍기는 향기는 온 동네를 감싸고도 남을 정도로 진하다.
으름덩굴의 향기, 그 향기를 맡으면 "이제 논두렁을 손보고, 물을 대야 할 시간이다" 하며, 벼농사 지을 논으로 나가게 되는 것이다. 고추모종과 가지모종도 밭에 심고, 옥수수 모종도 심어도 될 계절이 왔음을 알리는 것이다. 으름덩굴이 피고나면 여름의 기운이 느껴질 지언정 꽃샘추위의 흔적은 찾아보기 힘들다. 한 해의 농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으름덩굴 피어나는 계절, 봄 농사로 분주한 농촌의 풍경을 보면서 그 뒤켠에 서 있는 나는 잘 살고 있는 것인지 돌아본다.
덧붙이는 글 | 위의 사진은 4월 22-23일 강화도와 교동도에서 담은 사진들입니다. 강화도와 교동은 이제 다리로 연결되어 섬아닌 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