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어느 날부터인가 동네에 유기견 한 마리가 떠돌기 시작했습니다. 덥석 안아가고 싶을 만큼 탐스럽지도 않았고 눈길을 돌려야 할 만큼 몰골도 말이 아니습니다. 위협적이다 싶은 사람에겐 경계하는 눈빛이 역력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들을 만나면 꼬리까지 흔드는 살가운 모습을 보였습니다.

처음엔 서로가 경계하고 낯설어 했지만 날이 갈수록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는 게 보였습니다. 누군가는 일부러 먹을 것을 놔주고, 동네 아이들은 일부러 시간을 내 놀아주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동네 술주정뱅이 아저씨가 강아지와 재미있게 놀고 있는 아이들을 향해 '그 개 광견병에 걸린 미친개'라는 말을 술주정처럼 해댔습니다. 그러자 그동안 아무런 거리낌 없이 강아지와 놀던 아이들이 슬슬 강아지를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며칠이 지났습니다. 강아지가 동네 골목에 나타나자 동네사람들은 미친개가 나타났다며 대문을 닫고, 심지어 돌팔매질을 해 쫓기 시작했습니다. 졸지에 미친개가 돼 쫓겨 다녀야 했던 강아지는 강제 포획 돼 광견병 검사까지 받았습니다. 검사결과, 그 강아지는 광견병에 걸리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그 강아지는 더 이상 그 동네 골목으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미친개'라는 세 글자는 이미 강아지가 지우기에는 너무 벅차고 무거운 주홍글씨가 돼 있었기 때문입니다. 술 취한 주정뱅이가 아주 무책임하게 내뱉은 '미친개'라는 그 한 마디는 강아지의 삶을 뿌리째 흔들어 버린 폭력이자 비겁한 범죄가 분명합니다.

이처럼 폭력적이고 무책임하고 반인륜적인 범죄가 강아지에게만 벌어지는 건 아닙니다. 어느 민족, 어느 사람에게나 유난히 민감하게 반응하게 하는 폭발점 같은 용어가 있습니다. 분단국가를 살아온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천형처럼 거부반응을 일으키게 하는, 아프고 기피해야 말들 중 하나가 '빨갱이'라는 말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한국, 중국 그리고 일본, <동아시아 기억의 장>

<동아시아 기억의 장> (편저자 정지영, 이타가키 류타, 이와사키 미노루 / 펴낸곳 (주)도서출판 삼인 / 2015년 3월 22일 / 값 3만 원)
 <동아시아 기억의 장> (편저자 정지영, 이타가키 류타, 이와사키 미노루 / 펴낸곳 (주)도서출판 삼인 / 2015년 3월 22일 / 값 3만 원)
ⓒ (주)도서출판 삼인

관련사진보기

<동아시아 기억의 장>(편저자 정지영, 이타가키 류타, 이와사키 미노루, 펴낸곳 (주)도서출판 삼인)은 동아시아, 한국과 중국 그리고 일본 사람들이 공통분모처럼 기억할 수 있는 여러 장르의 이야기를 마당놀이처럼 펼쳐 해석한 내용입니다. 

신명나는 몸짓으로 익살스럽게 그려내는 해학, 우스꽝스런 몸짓에 감춰진 풍자가 걸지 게 펼쳐지는 기억 마당(場)에 '빨갱이'이와 관련한 내용이 '몸 떨림의 기억'으로 등장합니다.

'빨갱이'라고 말하는 언어 행위는 그 당사자를 비난하는 것일 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이들에게 그와 가까이하는 것을 금하고 그를 배제할 것을 암시한다.

다시 말하자면 "저 녀석은 빨갱이다"라는 발화 행위는 그런 타자를 구축하며, 그로 인해 그 타자성에 대응하는 발화자나 청취자 측의 자세와 행동거지가 결정되기도 한다.

즉 '빨갱이'라는 언어의 발화내적인 차원이야말로 문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 <동아시아 기억의 장> 461쪽 '빨갱이' 중에서

힘 있는 누군가가, 불특정 누군가를 향해 '빨갱이(종북)다'라고 하는 건 술주정뱅이가 멀쩡한 개를 향해 '미친개'라고 하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런 행위, 누군가를 향해 종북이나 빨갱이라고 하는 건 '미친개'라는 말과 동시에 개에게 퍼부어졌던 무책임한 폭력을 의도적으로 유발시키려는 비겁한 행위를 자행하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나쁜 손버릇 고약한 입버릇

손을 가만히 두지 못하고 누군가를 해코지하기 위해 툭툭 치거나, 남의 물건을 슬쩍슬쩍 훔치는 걸 보고 우린 손 버릇이 나쁘다고 합니다.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리지 않고, 잠시도 쉬지 않고 남을 욕하거나 험담하는 사람을 보면 입버릇이 고약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요즘 유력 정치인 중에도 입버릇이 못된 사람이 없지 않습니다. 입버릇 나쁜 이런 정치인이 툭툭 내뱉는 몇몇 말들은 우리 사회를 이간하고 분열시키는, '미친개' 같은 소리가 돼 누군가의 삶을 송두리째 옭아 맬 수도 있다는 걸 염려하면 '빨갱이'라는 말은 중국과 일본 그리고 한국을 가리지 않고 '몸 떨리는 기억'이 분명합니다.  

책에서 기억의 장(마당)에 올려놓은 주제들을 보면, '삼한정벌', '관우', '장비', '효녀 심청', '삼년고개', '윤동주', '역도산', '지산암', '금강산', '벚꽃', '빨갱이', '조세진', '운동회', '지문' 등으로 정서적 공감 속에서 이질적 해석들이 가능한 내용들을 다양한 프리즘으로 해석해 내고 있는 걸 읽을 수 있습니다.

한편 황석영은 소설 <심청>에서 그녀를 '창녀'로 묘사했다. 풍랑을 잠재우는 재물이 되어 중국의 부잣집에 첩실로 팔려간 심청이 기루(妓樓)에 가서 몸을 팔게 되고 타이완, 싱가포르, 류큐, 제물포로 이동하며 성매매를 하게 된다는 설정이다. 황석영의 <심청>에 대한 출판사의 서평 제목은 "황해를 바다를 끼고 펼치는 매춘의 오디세이아!"이다. 효녀가 '창녀'가 되는, 심청 이야기의 확대 해석은 저자의 입장이 어떠하든 상관없이 여성의 몸을 파는 일과 이를 암묵적으로 묵인하는 한국 사회에 대한 폭로 작업과 연결된다. - 212쪽 '효녀 심청' 중에서

책을 읽다보면 그동안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던 내용들이 전혀 달리 해석되고 판단되고 있는 부분, 당연히 효녀로만 알고 있었던 심청이 창녀로 묘사되고 있는 것과 같은 내용이 적지 않아 당혹감이 드는 걸 피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그래서 더 재미있고, 유혹적입니다. 어떤 비밀을 읽어낸 것 같은 성취감, 보지 못했던 순간을 재현해낸 듯한 다양한 해석들이 있어 글의 소재마저도 소재분열을 하는 듯 다양해지는 느낌입니다.

책에서 설명하고 있는 이야기들을 '역사'라는 용어로 이미 재단해 단정하였다면 이야기 속에 스며있는 모든 의미와 해석까지도 이미 역사적으로 받아들여야 할 과거(역사)에 지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생존자들이 공유할 수 있는 '기억의 장'이라는 무대를 통해 재조명해 줌으로써 역사 속의 과거가 아니라 내가 경험하고 있는 현실을 실감나게 반추해 볼 수 있게 해주는 입체적 책 읽기가 될 것입니다.

덧붙이는 글 | <동아시아 기억의 장> (편저자 정지영, 이타가키 류타, 이와사키 미노루 / 펴낸곳 (주)도서출판 삼인 / 2015년 3월 22일 / 값 3만 원)



동아시아 기억의 장

정지영.이타가키 류타.이와사키 미노루 엮음, 삼인(2015)


태그:#동아시아 기억의 장, #정지영, #도서출판 삼인
댓글5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