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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저녁 부산 민주공원에서 열린 베트남전 양민학살 증언회에 참석한 베트남인 응우옌 떤 런 (64)씨가 시민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8일 저녁 부산 민주공원에서 열린 베트남전 양민학살 증언회에 참석한 베트남인 응우옌 떤 런 (64)씨가 시민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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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일 저녁 부산 민주공원에서 열린 베트남전 양민학살 증언회에 참석한 베트남인 응우옌 티 탄(57)씨가 시민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8일 저녁 부산 민주공원에서 열린 베트남전 양민학살 증언회에 참석한 베트남인 응우옌 티 탄(57)씨가 시민들 앞에서 자신의 경험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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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8년에 일어난 일이다. 지금은 57살인 응우옌 티 탄씨가 8살 때로 사건은 거슬러 올라간다. 홀어머니가 네 남매를 키우는 집이었다. 응우옌 티 탄씨는 셋째였고, 위로는 14살 난 오빠와 12살 된 언니가 있었다. 남동생은 5살이었다. 어머니는 장사를 했다.

어머니가 시장에 가면 이모가 조카들을 돌봤다. 낯선 군인들이 마을을 찾던 날도 응우옌 티 탄씨는 마을에서 여느 때처럼 아이들과 놀고 있었다. 갑자기 들린 총소리에 이모는 아이들을 방공호로 불러들였다. 군인들은 이내 방공호를 발견했다. 그리곤 총질이 시작됐다.

오빠도 언니도 동생도 총에 맞았다. 응우옌 티 탄씨도 마찬가지 였다. 군인들은 집에 불을 놓았다. 이모가 군인들을 막아서자 그들은 응우옌 티 탄씨 앞에서 이모를 칼로 찔렀다. 이모의 품엔 10개월 된 아기가 안겨 있었다. 그 군인들이 지나간 뒤 집과 가족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응우옌 떤 런(64)씨에게도 비슷한 기억이 있다. 낯선 군인들이 응우옌 떤 런씨의 마을을 찾았던 때는 1966년이었다. 아침부터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더니 점심 무렵으로는 소리가 가까워졌음이 느껴졌다. 총소리 사이로 비명과 신음소리가 들렸다고 그는 기억한다.

어머니는 응우옌 떤 런씨를 이끌고 방공호로 숨었다. 어머니는 아이들에게 수건을 물렸다. 그리고 자신은 기도를 했다. 이 난리에서 아이들을 구해달라는 기도였다. 하지만 기도는 소용이 없었다. 총부리가 방공호 안으로 들어왔다.

부산 찾은 베트남 양민 학살 피해자들에게 시민들 "미안합니다"

8일 저녁 부산 민주공원에서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자행한 양만학살의 피해자들이 시민들을 만나 당시의 경험을 증언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28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8일 저녁 부산 민주공원에서는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자행한 양만학살의 피해자들이 시민들을 만나 당시의 경험을 증언하는 행사가 열렸다. 이날 행사에는 280여 명의 시민들이 참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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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군인들은 알아듣지 못할 말을 했다. 나오라는 손짓에 밖으로 나간 가족을 군인들은 총을 겨눈 채 끌고 갔다. 철모를 쓴 군인들의 얼룩무늬 군복에는 호랑이 마크가 있었다. 응우옌 떤 런씨는 그제야 낯선 군인들이 한국군임을 알았다.

마을사람들을 한 곳에 모은 뒤 학살이 시작됐다. 응우옌 떤 런씨의 발뒤꿈치로는 수류탄이 떨어졌다. 수류탄은 응우옌 떤 런씨의 뒤에서 터졌고 파편은 그의 다리에 그대로 날아와 박혔다. 그는 겨우 살아남았지만 그의 가족들은 그렇지 못했다.

8일 저녁 부산을 찾은 두 베트남인은 민주공원 소강당을 찾은 280여 명의 시민들 앞에서 자신들의 이야기를 해나갔다. 중간중간 이들은 과거를 회상하며 울먹였고 힘들어했다. 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던 사람들 틈에서도 훌쩍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날 행사는 베트남전 종전 40주년을 맞아 베트남전 당시 한국군이 자행한 민간인 학살 사건의 피해자들을 초청한 증언회였다. 시민들은 그들에게 사과를 전했고, 학생들은 직접 써온 편지를 건넸다. 미안하다는 말이 끊이지 않았다.

항의 집회한 베트남전 참전군인들 "누명 씌우려는 것"

8일 저녁 열린 한국군의 베트남전 양민학살 피해자 증언회 행사에 앞서 대한민국 고엽제전우회 회원 170여 명이 민주공원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한국군의 양민 학살 증언이 허위라고 주장했다.
 8일 저녁 열린 한국군의 베트남전 양민학살 피해자 증언회 행사에 앞서 대한민국 고엽제전우회 회원 170여 명이 민주공원 앞에서 항의 집회를 열었다. 이들은 한국군의 양민 학살 증언이 허위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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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모든이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증언회에 앞서 베트남전 참전 퇴역 군인들은 민주공원 들머리에서 집회를 벌였다. 대한민국 고엽제전우회 부산시지부 소속인 170여 명의 노병들은 증언에 나선 베트남인들을 피해자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이날 증언회에 온 베트남인들을 '베트콩'이라고 불렀고, 이들을 초대한 한국인들을 '빨갱이'라고 불렀다. 울려 퍼지는 군가는 '멸공의 횃불'이었다.

일부는 폴리스라인(질서유지선)을 치고 막아선 경찰과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다. "밀고 올라가자"는 외침과 "죽여라"는 섬뜩한 구호가 곳곳에서 튀어나왔다. 폴리스라인 뒤로는 200여 명의 경찰이 대기하고 있었다. 이들 사이의 충돌은 벌어지지 않았다. 경찰의 중재에 전우회 회원들은 행사 시작 전 집회를 정리했다.

그렇다고 노병들의 분노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집회를 마치고 내려가던 강성의(67) 고엽제전우회 부산지부장은 기자와 만나 "한국군은 베트남인들을 도우면 도왔지, 양민 학살은 저지르지 않았다"며 "저런 증언은 우리에게 누명을 씌우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증언회를 찾은 미국인 마이클 허트(43)는 이날의 모습을 보며 "일본의 역사왜곡에 항의하던 한국사람들이 맞는가?"라고 되물었다. 한국에서 15년을 산 허트는 지금 부산의 한 대학에서 한국학을 강의하고 있다. 그는 "베트남전을 패전이라 인정하지 않던 미국도 지금은 전쟁 범죄를 반성하고 있는데 일본의 식민 지배를 겪은 한국이 이런 모습을 보일 줄은 몰랐다"고 아쉬움을 털어놓았다.

"매번 일본에게 역사왜곡에 항의하는 한국이 자신들의 전쟁 범죄는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은 참 아이러니한 일"이라 꼬집은 허트는 "한국이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좋은 예를 일본에 보여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태그:#베트남전쟁, #양민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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