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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안중근 의사
ⓒ 눈빛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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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105주년이 되는 날이다. 안중근 의사가 순국한 지 20여년 뒤인 1930년대, 일제는 만주사변을 일으키며 대륙 침략의 야욕을 드러낸다.

한편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헌병통치와 문화통치를 거쳐 민족말살정책을 실시하면서 한반도 내에서 우리 민족의 자존을 드높이던 안중근 의사의 구국과 동양평화 정신을 죽이기 위한 기획을 시도 한다. 그것이 바로 안중근 의사의 아들 안준생과 딸 안현생의 박문사 참배이다.

박문사란 조선 침탈의 원흉인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기 위한 보리사(菩提寺, [불교] 한집안에서 대대로 장례를 지내고 조상의 위패를 모시어 명복을 빌고 천도와 축원을 하는 개인소유의 절)로서 남산 동쪽 기슭 장충단 자리에 일제가 건립하였으며 현재는 신라호텔이 자리하고 있다.

박문사에서 벌어진 비극을 설명하기 위해 안중근 의사의 가계도를 간략하게 살펴보면 안중근 김아려 부부는 슬하에 안분도, 안준생, 안현생 2남 1녀를 두었다. 의거를 전후해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해 황해도 청계동에서부터 연해주를 거쳐 상하이 프랑스 조계에 정착해 살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중근 의사가 유서에 신부로 키워 달라고 했던 첫째아들 안분도는 어린 나이에 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질병으로 사망했다는 주장과 달리 일제가 파견한 밀정에 의한 독살설도 있는데 이는 유동선(안중근의 하얼빈 의거 당시 참여했던 유동하의 여동생)의 구술에 따른 입장이다. 

일제가 기획한 박문사 참배극의 주인공이 될 수밖에 없었던 둘째아들 안준생은 상하이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거나 약국을 경영하며 근근이 살았다고 알려져 있다. 1939년에 상하이에 거주하던 친일파이자 상하이 조선인회 회장이었던 이갑녕을 단장으로 하여 '재상하이 만선시찰단'이 조선총독부의 초청 형식으로 조선을 방문한다. 여기에 안준생과 황일청(안중근의 딸 안현생의 남편)이 포함되어 있었고 만선시찰단 전원은 조선총독부 총독 미나미 지로와 면담한 뒤 안준생을 제외하고 모두 되돌아간다.

홀로 남은 안준생은 조선총독부 외사부장 마쓰지와 다쓰오, 촉탁(통역) 아이바 기요시, 안중근 의사 재판 당시 통역을 담당했던 소노키 스에키와 함께 박문사를 방문하여 '이토의 명복'을 빌게 된다. 다음 날에는 이토의 아들인 이토 분키치와 만나 다시 박문사를 공동참배하며 일제의 내선일체 선전도구로 전락하게 되고 이에 공분한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해방 후 귀국길에 중국 관리에게 변절자 안준생을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토 분키치(앞줄 오른쪽)를 만난 안준생(앞줄 왼쪽).
 이토 분키치(앞줄 오른쪽)를 만난 안준생(앞줄 왼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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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준생은 박문사에서 '죽은 아버지의 죄를 내가 대신 속죄하고 전력으로 보국(保國)의 정성을 다하고 싶다' 이토 분키치에게는 '아버지를 대신 깊이 사죄드린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문사 참배와 관련해 조선총독부의 촉탁(통역) 아이바 기요시는 만선시찰단의 전 과정에 동행했으며 후일 안현생의 박문사 참배에도 모습을 드러낸다.

안현생의 경우 안중근 의사의 하얼빈 의거 당시 가족들과 함께 망명하지 못하고 프랑스 신부의 보호 아래 명동 수녀원에 숨겨졌다가 나중에 가족들이 해외로 데려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안현생은 1941년 3월 26일에 이미 안준생과 만선시찰단으로 조선 방문을 했다가 되돌아간 남편 황일청과 함께 조선을 방문해 다시 한번 이토의 위패에 참배하는 비극을 겪는다. 안준생과 안현생은 박문사 참배극 이후 일제의 특별 관리를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와 같은 안준생, 안현생의 박문사 참배극에 당시 친일 언론들은 "조선통치의 위대한 전환사" "부처의 은혜로 맺은 내선일체" 등등으로 억지 당위성을 주장하려 했지만 미주 한인사회의 신한민보는 안현생의 박문사 참배에 대하여 이와 같이 전했다.

"3월 26일은 고 안중근 공이 사생취의한 기념일임으로 왜놈이 꼭 이 날 공의 영애 부처(夫 妻)를 잡아다가 강제 자복을 받았고, 그 전에 공의 장자 안준생씨를 잡아다가 또한 이와 같이 하였다,,, 이제 왜적의 함락을 입은 상해에서 아무 보호 없는 그 유족을 잡아다 암만 강제 자복을 받기어든 엇지 죽은 이등의 죄를 가리우랴 만일 이등의 귀신이 있고 또 무엇을 안다면 이와 같흔 은즛(못난짓)을 도려혀 북그러워 할 것이다." - (한글해설, 도진순 / 역사비평 90호에서 인용)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는 동양평화를 저해하는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고 1910년 3월 26일 일제에 의해 사법살인을 당했다. 우리의 식민지 강점 역사에는 저항과 타협이라는 두 가지 갈림길이 있었다. 안중근 의사는 일제와 타협을 거부하고 저항하는 평탄치 않은 길을 걸었고 아들과 딸은 아버지의 뜻과는 달리 일제와 타협하는 파탄의 길을 걸었다.  

안중근 의사의 의거 이후 벗어날 수 없는 일제의 철저한 감시, 무겁게 발목을 붙잡는 궁핍함, 모친을 비롯하여 피붙이를 보호해야 하는 이도저도 못하는 상황들을 고려해 볼 때 안준생과 안현생의 타협 행위를 비난하는 것에 약간의 망설임은 든다.

왜냐하면 1930년대부터 일제는 동양평화와는 동떨어진 침략 전쟁에 본격적으로 몰두했다. 또 동아시아 침략의 원흉을 제거한 안중근 의사의 정신은 당시 조선과 중국의 항일의식에 지속적으로 중대한 단초로 작용했기 때문에, 일제로서는 그의 직계가족을 이용해 그 숭고한 정신을 죽이는 일이 시급했을 것이다. 전쟁을 위해 내선일체를 주장하던 일제에게 더할 나위 없이 중요한 기획 중의 하나였을 것이다.

하지만 안중근의 형제 였던 안공근, 안정근과 그 직계 가족들은 전부 타협을 거부하고 혼신을 다해 독립운동에 매진했다. 그러니 안준생, 안현생이 일제에게 이용당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결국 역사에 변절자로 남을 수밖에 없다.

안중근 의사 순국 후 105년이 지난 지금 그의 구국과 동양평화 정신은 여전히 동아시아에서 빛나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물려 준 정신이 살아남아 저항은 계속되었고 일제가 물러난 지금 우리는 지금 한국 문화와 한국 역사의 틀 안에서 살아가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우리 독립운동사에 숭고한 정신을 남겼듯이 일제 역시 썩은 정신인 식민사관을 남기고 갔다. 안중근 의사처럼 역사에 족적을 남기지는 못하더라도 썩은 정신이 아이들의 교육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이 땅에 남아있는 우리들의 의무이다.

덧붙여 찾지 못한 안중근 의사의 유해와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안중근 의사의 가족들 행적들도 널리 알리고 그 처절한 역사를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할 것이다.


태그:#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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