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두 남자가 굴뚝에 오른 지 88일이 지나고 있다. 이창근, 김정욱(김정욱은 며칠 전 건강악화와 교섭을 위해 눈물을 머금고 내려왔다) 그리고 쌍용차 해고노동자들. 내겐 조금은 특별한 인연들이다. 즐겁고 반가웠던 일로 특별하면 좋겠지만 이들과의 인연은 2009년 잔인했던 이명박 정권이 만들어줬다.

2009년 1월 20일, 가슴 속 인두처럼 박혀버린 그날, 난 모든 걸 잃었다. 재개발로 쫓겨날 수밖에 없었던 철거민들이 "여기, 사람이 있다"고 절규하며, 고공 망루농성을 시작한 지 25시간 만에 경찰특공대를 투입 시켜 철거민 다섯 명과 경찰특공대 한 명이 목숨을 잃었다.

목숨을 잃은 철거민 중 한 명이 나의 시아버지였고, 그 죽음에 책임을 지고 감옥에 갇힌 이는 나의 남편이었다. 하루아침에 가족을 잃고도 범죄자의 가족이 된 나는 전국 방방곡곡을 돌아다니며 용산참사의 진상규명을 외쳤다.

2009년 봄날 '함께 살자'는 절규로,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옥쇄파업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검은 상복을 입고 무작정 평택으로 향했다. 저 멀리 보이는 옥상에서 빨간 머리띠를 두른 노동자들을 보는 순간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1월 20일 그날처럼, 하늘 끝 망루를 바라보듯, 그냥 또다시 애타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기에 막아선 경찰들을 향해 애원했다. 저들을 만나러 가게 해달라고, 저들을 보게 해달라고….

그렇게 애태우며 돌아서는데 주차장의 천막들이 보였다. 그 안을 들여다보니 쌍용차 정리해고자 가족대책위 분들이 모여 계셨다. 안으로 들어가 차마 그분들을 만날 수가 없었다. 차마 그분들의 손을 잡을 수가 없었다. 또 다른 나를 만났던 그날, 돌아오는 내내 눈물을 흘리며 다짐했다. 저분들은 가족을 잃지 않도록 함께 하겠노라고…….

첫 말을 건네 준 그, 굴뚝인 이창근

지난 1월 14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인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정욱 사무국장과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이 깔개 위에 청테이프로 'Let's Talk'이라는 글자를 만들어 들어보이고 있다.
▲ 쌍용차 굴뚝 외침 'Let's Talk' 지난 1월 14일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인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김정욱 사무국장과 이창근 정책기획실장이 깔개 위에 청테이프로 'Let's Talk'이라는 글자를 만들어 들어보이고 있다.
ⓒ 유성호

관련사진보기


355일 만에 장례를 치렀다. 갈 곳이 없었다. 내가 살던 집도, 가게도, 가족도…. 난 모든 걸 잃었는데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장례만 치른 것뿐인데 마치 용산참사의 진상규명이 모두 해결된 것처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한없이 미웠다.

책임져야 할 인간들은 어느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고, 감옥에 갇힌 이들은 여전히 억울함을 호소하는데 용산참사가 잊혀지는 세상이 원망스러웠다. 세상으로부터 숨고 싶었다. 아니 숨었다. 얼마쯤 숨었을까? 이건 아니지. 내가 숨는다고 그날의 고통과 상처가 아무는 것도 아닌데. 숨어 살다 문득 깨달음에 아니다 싶어 무작정 여기저기 투쟁 현장을 돌아다녔다.

그러던 어느 날, 여의도 새누리당사 앞을 지나는 길에 보니 노동자들이 기자회견을 준비 중이었다. 아는 사람 하나 없기에 먼발치에서 지켜보는데 투쟁 조끼를 입은 한 남자가 다가오더니 "이충연 위원장님 부인이시죠?" 하고 묻는 게 아닌가.

지금껏 나를 '용산 며느리냐?'고 묻는 사람은 많았지만 이충연 위원장 부인이냐고 묻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생소하면서도 그렇게 묻는 사람이 누군지 궁금했다.

"네, 맞아요. 근데 누구신지?"
"저는 쌍용차해고자 이창근입니다. 이 위원장님과 같이 있었습니다!"
"아~~네, 고생 많으셨네요."

반갑게 인사를 건네준 그가 '굴뚝인' 이창근이었다. 옥쇄파업 후 구속 기간 중 남편과 같은 구치소에서 있었던 거다. 물론 둘은 서로 인사를 나눈 적도 없고, 이야기를 나눈 적도 없을 거다. 그냥 2009년 같은 시기에 구속된 철거민과 노동자였을 거다. 하지만 낯선 세상에 나온 나에게 첫 말을 걸어준 그가 한없이 반갑고 고마웠다. 그날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구호에 관심이 가고 노동자들의 조끼도 낯설지가 않았다.

작년 여름, 7·30보궐선거에 쌍용차 해고자 김득중 지부장이 출마를 선언했다.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어 쌍차 동지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던 무작정 평택으로 내려갔다. 그리곤 후보 옆에서 수행이라는 걸 했었다. 하루 종일 노동자 후보 김득중을 외치고, 만나는 사람들에게 쌍용차 해고노동자들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쌍차 노동자들의 삶을 조금 더 들여다보게 되었다.

그랬다. 그들은 해고노동자이기 전에 한 가정의 가장이었고, 한 아이의 아빠였다. 6년 가까운 시간 동안 가장이 가장 노릇을 하지 못해 가족에겐 미안한 존재였던 거다. 한창 아빠의 손길이 필요했던 아이들에게 부재인 아빠는 늘 투쟁을 외치고 경찰서를 들락날락 거리는, 엄마의 이마에 주름지게 하는 그런 존재였던 거다. 가족이란 글자만 나와도 목소리는 떨리고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리는 부족하다고 느끼는 가장이었다.

굴뚝인 김정욱은 보이는 것처럼 성실하고 자상했다. 그는 시간이 날 때면 딸, 아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다정다감한 아빠였다. 제주 강정마을에도 딸, 아들 손잡고 생명평화대행진도 함께 걷고 휴가도 즐기는 그런 멋진 아빠였다. 가족과 함께 할 때면 투쟁 현장에서의 날카로운 발언과 강고한 의지를 결의하는 아빠의 모습은 잠시 숨기고, 그저 세상에 하나뿐인 딸과 아들의 친구 같은 아빠였다. '여기, 사람'인 그들의 삶을 돌려 주어야 한다.

꽃피는 봄날을 위해, 우리의 봄을 앞당기러 가자

3·14 희망행동 포스터
 3·14 희망행동 포스터
ⓒ 3·14 희망행동

관련사진보기


절박한 순간에도 웃음을 잃지 않는 이창근과 언제나 반듯하고 자상한 김정욱이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며 굴뚝에 올랐다. 공장으로 돌아가기 위해 곡기를 끊기도 하고, 송전탑에 올라 수개월을 보내기도 했다. 전국을 걷기도 하고, 자전거를 타고 정리해고 철회를 외치기도 했다.

6년을 거리에서 피눈물 흘리며 보냈다. 26명의 동지들을 떠나보내며 26번의 상주 노릇을 해야만 했다. 지금도 77일 옥쇄파업의 트라우마로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쌍용차 해고노동자들이 있다. 생계 때문에 떠났던 해고자들도 다시 돌아와 두 주먹 불끈 쥐며 함께 한다.

187명의 해고노동자들이 굴뚝 앞에 모였다. 그들이 원하는 건 단 하나, 작업복 입고 공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들이 공장으로 돌아가는 것이 '정리해고는 살인'이라며 소리 없이 죽어간 26명 동지들의 염원이고, 허울뿐인 가장이 아닌 당당한 노동자의 권리를 되찾는 멋진 가장으로 돌아갈 수 있는 길이며, 수백만 명의 노동자들의 희망이고, 우리들의 바람이다.

우리 모두의 바람을 싣고 3월 14일, 187대의 버스가 전국에서 굴뚝으로 향한다. 나 역시  그 버스에 탑승할 거다. 낯선 세상에 나온 나에게 첫 말을 걸어준 이창근를 만나기 위해, 힘든 나에게 언제나 밝은 미소로 용기를 주던 김정욱을 만나기 위해, 늘 곁에서 지켜줬던 쌍차 해고노동자들을 만나기 위해 굴뚝으로 향할 거다. 더 이상 그들을 굴뚝에 내버려둘 수 없다. 그곳에 가서 그들과 함께 "정리해고 철회하라~", "공장으로 돌아가자~"고 외칠 것이다.

꽃피는 봄날엔 굴뚝인들이 가족과 함께 꽃구경 갈 수 있길 간절히 바라며 그들의, 우리의 봄날을 앞당기러 가자.

"우리들은 일하고 싶다!"
해고자 전원 복직, 해고자 없는 세상을 향한 쌍용차 314 희망행동!

3월 14일 토요일
13시 평택역 : 314 길거리 희망행동 참여
15시 쌍용차 굴뚝농성장 : 314 희망행동 본행사 참가

덧붙이는 글 | - 글쓴이 정영신은 용산 참사 유가족입니다.



태그:#쌍용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모든 시민은 기자다!" 오마이뉴스 편집부의 뉴스 아이디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