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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처럼 난 겨울 햇살을 쬐며 둘이서 옹송거리고 있다.
▲ 길에서 만난 친구들 모처럼 난 겨울 햇살을 쬐며 둘이서 옹송거리고 있다.
ⓒ 박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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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를 위해 하는 거짓말을 하얀 거짓말이라고 한다. '나는 아프지 않다, 너나 밥 잘 챙겨 먹고 다녀라, 날이 춥다, 여긴 따뜻한데 너는 떨고 지내는 것 아니니, 난 필요한 것 없다, 피곤한데 오지 마라, 괜찮다'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온 대표적인 하얀 거짓말들이다.

조금 다른 거짓말도 있다. 안위와 평화를 위해 알면서도 모르는 척 애써 진실을 외면하는 거짓말이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다. 한때 모든 영혼을 담아 좋아했던 아이돌 오빠. 비록 마이크를 달고(들고)는 있지만 조금도 노래하고 있지 않고, 앨범에 그의 본래 목소리가 녹음됐을 리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나는 그 오빠가 가창력과 안무 능력, 랩 실력을 겸비한 만능 엔터테이너라고 굳게 믿는다. 누군가 그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말하면 (아니, 어떻게 알았지?) 부득불 내가 보고 싶은 것만 사실이라고 우겨댄다.

'나는 공부를 안 해서 그렇지 머리는 좋은 편이야, 그는 나를 아직 못 잊고 있지만 용기가 없어 연락하지 않는 거야, 나는 게으르고 수동적이긴 하지만 대기만성형이라 언젠가는 볕 들 날 있을 거야, 엄마가 좋은 곳에 보냈다는 강아지 초롱이는 시골에서 행복하게 잘 살고 있을 거야' 등. 나는 이런 말들을 '분홍 거짓말'이라고 부른다. 그저 예쁜 분홍색으로 내 눈앞을 가려버리고 나면 뒷일이야 어찌 됐든 마음은 편한 것이다.

"좋은 곳에 갔을 거야"

용두는 식당 옆 주차장에 종일 묶여 있는 개였다. 주인 아저씨는 용두동의 용두초등학교 앞에서 데려왔다고 암컷 개인데도 '용두'라 이름 지었다고 했다. 얼룩무늬에 우람한 덩치, 근육질 다리, 커다란 발, 쳐진 귀, 시무룩한 표정, 우렁찬 목소리. 용두는 누구도 감히 다가가기 어렵게 만드는 특징을 갖고 있었다.

나는 무거운 쇠사슬에 매인 목을 당겨가며 제자리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배설물을 밟아대는 용두가 가엽게 느껴졌다. 밥그릇엔 퉁퉁 불은 밥이 차갑게 식어 있었고, 물 그릇은 언제나 뒤집어진 채였다. 그 애는 나를 처음 봤을 땐 험악하게 짖었지만 내가 자세를 낮추고 멀찍이서 이름을 부르자 물끄러미 눈을 맞췄다.

공격의 표시가 전혀 보이지 않아 천천히 다가가 그 애 옆에 쪼그리고 앉아봤다. 옷에 지저분한 것들이 묻을까 봐 신경도 쓰였지만, 이 애와 친해지고 싶었다. 손을 내밀자 기다렸다는 듯이 핥아주는데 입이 정말 부드럽고 따뜻했다. 가까이서 보니 갈색 눈도 예뻤다. 그렇게 잠시 머무르다 자리를 뜨는데 용두가 "끼이잉" 하며 아주 서러운 소리를 냈다. 조금 전 짖을 때와는 완연히 다른, 가슴 아픈 울음이었다. 나는 곧 다시 오겠다고 약속했다.

날이 추워지면 점점 더 안락한 곳을 찾는다. 가을이가 편안하게 지낼 수록 밖에서 떨고 있을 생명들이 떠오른다.
▲ 이불 속의 가을이 날이 추워지면 점점 더 안락한 곳을 찾는다. 가을이가 편안하게 지낼 수록 밖에서 떨고 있을 생명들이 떠오른다.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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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용두와 일주일에 세 번씩 꼭 인사를 하고 지냈다. 멀리서도 내 차가 오는 모습을 알아보고 반가움에 발을 동동 구르는 용두는 참 똑똑한 아이였다. 사냥개답게 넓은 벌판을 내달려야 할 체력 조건을 갖고 있었지만, 황량한 흙바닥에서 묵묵히 머무르는 착한 아이이기도 했다. 가을이의 간식을 나눠 먹이며 용두의 이야기를 들었다. 밥은 먹었는지, 춥진 않았는지, 심심할 땐 무엇을 했는지.

용두는 무엇이든 맛있게 먹었다. 대형 견용 껌(어른 팔뚝만 하다)을 줘도 잠시 한눈판 사이에 흔적도 없이 먹었다. 미처 간식을 준비하지 못했을 때 사료를 한 움큼 집어줬는데 그것도 얼마나 맛나게 먹었는지 모른다. 주차장을 이용하는 사람들은 용두가 무섭다고 눈을 흘기기도 했지만, 나는 그 냄새 나는 아이가 매일 생각났다. 혹한이 닥쳤을 땐 단모종인 그 애가 떨고 있을 것 같아 안 입는 옷을 가져가 깔아주려고 했다. 하지만 용두는 옷들을 물어뜯고 놀며 하룻강아지처럼 좋아했다. 만져달라고 온몸을 비볐지만 솔직히 용두는 너무나 더러웠다. 그래서 나의 소지품을 멀리 둔 후 목장갑을 끼고 용두에게 다가가는 법을 배웠다. 

그날은 호박고구마를 쪄서 싸갔다. 껍질째 아구아구 먹을 용두를 생각하니 벌써 뿌듯했다. 그런데 주차장에 진입하는데도 평소와 달리 사위가 조용했다. 황급히 내려 용두의 집 쪽으로 가보니 텅 비어 있었다. 그 애의 빈 밥그릇과 오줌 자국만 있을 뿐이었다. 식당에 들어가 아저씨께 물었다.

"용두, 용두동에 다시 보냈어."

도대체 용두동은 어딜까. 아저씨는 용두 때문에 손님들이 불편해하고 천방지축 날뛰는 바람에 여러 가지를 망가뜨려 어쩔 수 없었다고 했다. 잠시 내 표정을 살펴보시곤 "좋은 곳에 갔으니 걱정 말라"고 못 박으셨다. 궁금한 게 많았지만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다. 난 고구마를 차에 던져놓고 문을 잠근 채 울어버렸다.

용두와 인사도 제대로 못 하고 헤어져 속이 상했다. 하긴, 떠날 줄 미리 알았다면 인사는커녕 눈물바람이었을 게 빤하지만 그래도 너무 안타까웠다. 이제 용두를 다시는 볼 수 없구나. 그 애가 새로운 곳에서 또 짧게 묶여 하염없는 시간을 보낼 모습이 자꾸만 떠올랐다. 귀여움을 받고 자랄 아이가 아닌 것을 알기에 더 마음이 쓰라렸던 것이다. 진정이 될 때까지 시간이 좀 걸렸다.

"용두, 진짜 좋은 데로 갔대요"

빛 한 점 없는 을씨년스러운 주차장에서 용두는 혼자 긴긴 시간을 보냈다
▲ 개껌을 입에 문 용두 빛 한 점 없는 을씨년스러운 주차장에서 용두는 혼자 긴긴 시간을 보냈다
ⓒ 박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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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후 운전을 하며 그곳을 지나는데 또 눈물이 터졌다. 용두 없는 용두의 집이 그대로 있었다.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도 없고, 찾아갈 수도 없고. 무엇보다 내가 그 아이를 어렵사리 찾아가 인사를 건네고 오더라도, 다시 나를 기다리고 있을 그 퉁퉁한 네 개의 발을 생각하면 서글퍼졌다. 그곳은 내가 이전처럼 규칙적으로 방문할 수 있는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좋은 곳에 가서 잘 지낼 거야'라는 어린 시절 잘 써먹던 분홍 거짓말이 도무지 나오질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용두는 보살피기 수월한 개가 아니었고, 나쁜 사람들이 눈독 들일만한 점이 많았으니까.

며칠 후 나만큼이나 용두를 아끼던 지인을 만나게 됐다. 나는 그날도 용두의 흔적을 보고 우느라 엉망이었다. 그는 내 꼴이 왜 이런지 물었고 나는 "용ㄷ...!"하다 고개를 파묻고 말았다. 그 분은 웃으며 휴지를 뽑아줬다.

"용두 진짜 좋은 데로 갔대요. 묶여 있지 않아도 되는 벌판에서 뛰어놀고 있대요."

아, 이 말을 들었을 때의 심정이란. 바보같이 입을 벌리고 행복한 용두를 떠올렸다. 뼈다귀를 입에 물고 겅중겅중 뛰놀다 안락한 보금자리에서 쿨쿨 자는 모습도 그려보았다. 새 가족은 용두에게 신선한 물도 가득 주고, 꼬리치며 누우면 배도 만져줄까. 그러면 좋을 텐데. 아무렴 내가 근심했던 열악한 상황이 아니라니 다행이다.

우리는 모두 어렸을 때, 거짓말을 하면 아주 무섭게 혼났다. 타인을 속이는 일은 물론이거니와, 떠도는 소문이나 뒷담화에 귀 기울이는 행동도 정당하지 않은 일이라고 배웠다. 그렇다면, 자신을 속이는 문제는 어떨까? 책임지고 싶지 않고 감당하기 싫어, 좋은 게 좋은 거라는 식으로 분홍색 보자기를 덮어쓰는 태도 말이다.

병원에 맡긴 뒤 자기는 할 만큼 했다고 연락을 끊는 사람, 여행지에 가서 몰래 내려놓고 오는 사람, 유기견 보호소 문 앞에 묶어놓고 사라지는 사람들. '어찌 됐든 잘 살겠지'하고 뒤돌면 마음이 편할까?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은 어른으로 나이 들어가면 좋겠다.


태그:#용두동의 용두, #이봄가을, #유기견입양기, #가을 꿀잠, #분홍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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