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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과 함께 물드는 감나무의 모습
 하늘과 함께 물드는 감나무의 모습
ⓒ 고성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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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겨울을 지내면서 우리 감에 대한 생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산골 집터 입구 돌담에 이전 사시던 분들이 심어놓은 감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이파리가 다른 것들보다 조금 작아 "그런가 보다"하고 무심히 넘어갔다. 그러다가 가을이 왔고 푸른 하늘에 떠 있는 수많은 감꼭지들과 그 감들을 떠받치고 굳건히 서있는 광경이 좋아 자주 쳐다보기는 했었다.

그저 전형적인 시골 풍경의 하나쯤으로 여기지 않았을까. 동네 어른들은 감나무 밑에서 강아지를 데리고 놀고 있는 내게 "예전 그 감나무로 감물을 들여 옷을 입었다"거나 "그 감나무 감이 작기는 해도 서리가 내리고 나서 하나씩 따 먹으면 정말 맛있다"는 얘기를 자주 하셨다. 그럴 때만 해도 노인들의 그냥 하시는 말씀으로 치부했었다.

고즈넉한 감나무의 모습 그리고 반할 수밖에 없는 맛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귀가한 아내가 호들갑을 떨며 내게 말했다. "집에 들어오면서 대문 밖에 서서 쳐다보는 감나무가 이루 말할 수 없이 멋있다", "감이 작기는 해도 그 나름대로 품위가 있다", "지금껏 무얼 보았느냐", "어서 나가서 한 번 보라"고 말이다. 그 말을 듣고 다시 내려가 쳐다보니 산 그림자와 푸른 하늘과 유유한 구름에 커다란 감나무의 고즈넉한 모습이 겹쳐 꿈결처럼 아름다웠다.

이런 풍경을 어찌 몰랐을까. 그림은 그릴 수나 있지만 풍경은 결코 그려낼 수 없는 것. 정녕 지금까지 도시에서 꿈꾸던 산촌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가을이 익어가자 산골 동네에 온갖 감들이 함께 익어갔다. 단감이 먼저 익고 큰 홍시들도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뒷산의 감들도 익고 할머니네 감들도 가을 물을 뿜고, 건너 편 서당 자리의 단풍도 핏빛이 되었다.

참나무도, 포플러나무도, 팽나무도 가을 물에 취했고 이 산 저 산도 만산홍엽으로 물들어 갔다. 우리 감나무도 감은 붉게, 이파리는 황혼녘의 저문 날빛으로 변했다. 원래 작은 종자였던지 감은 더 크지 않았다. 아내 말대로, 이천 개도 넘는 감들은 바람이라도 불면 하늘 위에서 그네를 타듯 넘실거렸다.

나는 그때까지도 토종감의 맛에 완강히 저항했다. 단감과 홍시 맛에 길들여져 있었던 내게 그 감은 우선 너무 작았다. 손가락 두 마디만한 감. 보기는 예쁘다마는 뭐, 맛은 빤하지 않겠는가. 단감이 맛을 낼 무렵, 실제로 맛을 봐도 아직 떨떠름하여 먹을 만 한 게 못되었다.

그러다가 서리가 왔다. 땅이 얼고 다시 온 천지에 눈이 가득하게 내렸다. 그러나 우리는 겨울이 왔음에도 감을 따지 않았다. 그저 관상용으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겨울이 짙어져 온 산골이 도화지처럼 하얗게 변하기를 몇 차례, 날씨가 풀려 햇볕이 내리쬐던 어느 날, 대문 옆 감나무 밑에서 강아지 밥을 주고 있는데 동네 최고령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짚고 마실을 오셨다. 그리고 나무라듯 말씀하셨다.

"왜, 감을 따지 않는 건가?"

내가 멀뚱하게 의아한 표정을 짓자 다시 "먹어는 봤는가?"고 물으셨다.

"떫을 때 먹어 보고 아직…."

그렇게 우물거리다가 감나무의 감 하나를 따 입에 넣었다.

차디찬 감칠맛이 입안에 가득 번졌다. 또 단감이나 홍시와는 다르게, 단 맛 위로 찰 짐까지 조화로웠다. 지금껏 맛보지 못한 새로운 느낌, 이게 우리 감 맛인가, 하는 생각이 솟구쳤다. 맛을 보고 또 보고. 몇 개나 더 따먹었다. 씨가 많은 게 흠이지만 정말 좋은, 지금까지 느껴보지 못한 맛이었다.

감과 나, 서로를 품다

우리 고유 토종 감의 맛과 그 나무 모습은 단연 최고였다. 처형에게 전화했더니 지금은 구할 수도 없으니 누구에게 주지 말라고도 했다. 그렇구나, 세상이 바뀌었구나, 우리 것이 좋은 것인 시절이 되었구나. 그날 오후 갑자기 마음이 바빠진 나는 감을 따는 도구까지 샀다. 감을 따 집에 오는 손님에게 맛이나 보라며 무조건 권했다. 따고 또 땄다. 처형네도 오셔서 두 박스나 따 가셨다.

그래도 하늘에는 아직 말갛게 상기된 감들이 수두룩 맺혀 있었다.

"정말인가, 2000개가 넘는다는 말이?"

개집 위에 올려놓은 패널 위로 날마다 감들이 떨어지는 것을 보며 새해를 맞았다. 인사차 내려온 아이들 때문에 이틀을 비웠다. 그리하여 사흘째 되던 날 산골에 갔다.

아, 그런데 이 놀라운 광경이라니. 감나무 위에 이름 모를 새들이 모여 잔치를 벌이고 있었다. 뒤란의 팽나무와 감나무를 포르릉, 오가며 감을 쪼아 먹는 새들의 향연. 마지막 가을의 흔적을 쪼며 한겨울을 부르고 있었다.

그런 모양-, 한겨울을 수놓은 감나무의 옹골찬 헌신을 보며 문득, 아직은 내 삶도 저처럼 만가(滿歌)를 부를 수도 있다, 라는 희망이 솟구쳤다. 오, 이 겨울, 우리 감은 나를 품었고 나 또한 우리 감을 가슴 깊이 품었다.


태그:#겨울 풍경, #토종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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