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김영광

SBS <피노키오>에서 서범조 역을 맡았던 배우 김영광 ⓒ 엔피노


|오마이스타 ■취재/이미나 기자| 꾸벅, 맞절을 하고 올려다본 배우 김영광의 얼굴에 물집이 잡혀 있었다. "항상 새벽에 집에서 나가 그 다음 날 새벽에야 집에 들어오는" 빡빡한 촬영이 끝난 뒤, 그간 채 풀지도 못했던 피로가 한 번에 찾아온 듯했다. 그럼에도 김영광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일이 끝나서 마음을 놓았나 보다"라며 싱긋 웃어 보였다.

체력적으로 힘든 것도 힘든 것이었지만, 남몰래 속앓이를 해왔던 탓도 크다. 사실 김영광이 연기한 서범조는 <피노키오> 초중반까지 백화점의 오너인 어머니 손에서 애지중지 자라 세상 물정을 모르는, 단순히 최인하(박신혜 분)에 대한 호기심으로 기자가 된 인물로만 그려졌다. 후반에 가서야 그의 어머니 박로사 회장(김해숙 분)이 모든 사건의 흑막임이 밝혀졌고, 서범조의 해맑음에도 차차 어둠이 드리워졌다.

그리고 서범조는 "지금까지 누려왔던 것에 대한 책임을 어머니와 함께 지겠다"는 말을 남기고 제 발로 유치장으로 걸어 들어갔다. 몸은 컸으나 마음은 그저 해맑기만 했던 한 소년이 진짜 어른의 세계에 한 발을 내딛는 장면이었다. 그러나 이 대목에 이르기까지 김영광의 기다림은 퍽 길었다. "처음 서범조의 뚜렷한 캐릭터를 보여줄 수 있는 장면이 없어 (인물을) 표현하기가 힘들었다"고 운을 뗀 김영광은 "두 주인공의 러브라인이 초반에 강력했던 상황에서 서범조가 뜬금없이 등장한 재벌 2세 같아 보일까 걱정스러웠다"고 털어놨다.

"후반부 서범조의 모습에 '이제 내 차례가 왔구나'라는 생각보단, 부담감이 먼저였어요. 그전까지 (서범조에 대해) 별다른 감흥이 없는 시청자 앞에서 서범조가 갑자기 확 치고 나온다고 하면 의문만 커질 것 같았거든요. 서범조를 시청자가 이해할 수 있을까 싶었죠. 사실 초중반의 서범조는 '(최인하에게) 널 보기 위해 기자를 하겠다'고 말하는 장면까진 좋았지만 그 캐릭터나 성격, 배경을 보여줄 수 있는 부분은 적었잖아요. 당연히 서범조에 대한 (시청자의) 몰입도가 낮을 것이라는 생각에 걱정이 컸던 거죠."

'아등바등 노력했다', '피노키오' 속 서범조가 값질 수 있었던 이유

 배우 김영광

사실 <피노키오>에는 풀리지 않은 두 개의 '떡밥'이 있다. "범조가 인하를 처음 만나 건네려던 선물 속에는 뭐가 있나, 저도 궁금해서 작가님께 여쭤 봤어요. '뭐 들었어요? 중요한 거예요?' 그런데 별것 아니라고 하시더라고요. 반지나 시계 정도? 정말 그냥 생일선물 정도라고요. (웃음) 또 하나, 찬수(이주승 분)네에 건넨 축의금 봉투엔 얼마가 들어 있었나…그거 소품용 돈으로는 몇십 억 원이 들어 있었어요, 사실. (웃음)" ⓒ 엔피노


그의 우려와 달리, 결과적으로 서범조의 '반전'에는 호평이 이어졌다. "이번 작품을 촬영하며 내 목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항상 열심히'였다"는 김영광은 "최선을 다하려 했고, 서범조라는 인물과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 했다"고 설명했다. "사실 그러다 보면 어느 정도 포기하게 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번엔 정말 아등바등 노력했다. 그런 걸 박혜련 작가님과 조수원 감독님이 잘 봐주신 것 같다"면서 "이번 작품을 통해 '(인물과의 끈을) 놓치지 않으니까 힘겹게라도 올라갈 수 있구나'라는 걸 깨달았다"고도 했다.

"과거에 비슷한 경험을 했던 적도 있었어요. 일찌감치 캐릭터가 없어진 적도 있었고…. 물론 노력했지만 남들이 봤을 때 베스트가 아니었을 때도 있었겠죠. 그땐 어린 마음에 속상하기도 하고 화도 나니까 (인물을) 놓았던 적도 있었어요. 하지만 <피노키오>에선 제 베스트를 뽑아내고 싶었어요. 설령 베스트가 아니라 해도, 마음속의 끈을 놓치지 않고 마지막까지 열심히 하겠다는 생각이었죠. 그러다 보니 후반부에 서범조에 대한 부분이 그나마 풀리게 된 것 같아요. 열심히 한 것에 대한 배신을 당하지 않은 느낌이었다고 할까요."

<피노키오> 촬영장에서 김영광이 이렇게 고군분투하는 동안, 드라마 속 서범조도 어려운 싸움을 견뎌냈다. 김영광과 서범조 사이 묘한 동질감이 형성되는 순간이었다. 덕분에 김영광도 서범조의 마음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어머니가 저지른 일을 뒤통수 맞듯 알게 된 데다가 이것이 서범조가 좋아하는 인하나 하명이(이종석 분)까지 연결돼 있다는 데 충격을 받았을 것"이라고 입을 연 김영광은 "범조의 입장에선 자신이 살아온 과정이 남들의 행복을 갈취해 얻은 것이라는 생각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라고 해석했다.

"결국 범조에게 최종 해결책은 그런 거였을 거예요. '어쨌든 내가 다 사랑하는 사람들이니까'라는 생각. 범조가 완벽하게 성숙한 것도 아니었고, 동화 속에 있다가 갑자기 현실로 꺼내진 인물이었잖아요. '내가 책임을 질 수 있으면 지겠다'는 생각을 했겠죠. 이 일을 겪고 난 범조는 좋은 기자가 됐을 거예요. 기존의 틀에 갇힌 성격은 아니니까 (취재) 아이디어는 많겠죠. 대신 눈을 맞고 그러진 않을 것 같아요. 자기 머리 위에 천막을 딱 쳐 놓고 '이것 보세요!'라며 리포팅을 하지 않을까요? (웃음)"

"모델만 할 땐 수월했는데...이젠 인상 깊게 남고파"

 배우 김영광

"처음 대본을 받고 감독님을 뵀는데 '기재명과 서범조가 있는데, 생각해 봤니'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때까지 저는 '주연을 하느냐, 임팩트 있는 역할을 하느냐'라는 고민만 하고 정하지는 못한 상태였거든요. 솔직히 말씀드렸더니 '내가 지금 널 봤으니 더 잘어울리는 걸 시켜줄게'라고 하시더라고요. 그렇게 서범조 역을 하게 됐죠." ⓒ 엔피노


김영광은 고등학교 시절 우연히 뒤통수 모델이 돼 광고를 촬영한 것을 계기로 모델의 세계에 들어섰다. 데뷔 2년 만에 세계 4대 컬렉션 진출, 동양인 최초 디올 옴므 모델 발탁 등 '모델 김영광'을 수식하는 화려한 경력은 차고 넘쳤다. 노력도 노력이었지만 천성에 맞은 덕분이 컸다. "모델 일만 할 땐 굉장히 수월했던 것 같다"고 당시를 회상한 김영광은 "주변에서 잘 받쳐 준 덕분도 있고, 하고 싶은 대로 뛰어노는데 내 생각보다 더 크게 된 것도 있었다"고 말했다.

"그런데 연기는 다르더라고요. 물론 그 전에 연기수업을 가끔 받은 적은 있었죠. 하지만 그건 순수하게 모델로서 눈빛이나 표정을 위한 거였어요. 그러던 중 디올 옴므 모델 일을 마치고 집에서 놀고 있는데, 갑자기 '무술 연습장'에 가야 한다는 거예요. 그렇게 3일 연습하고 KBS 2TV <그들이 사는 세상>(2008) 촬영장엘 갔어요.

거기서 (정)석원이 형이랑 촬영하는데, 원래 그 형은 무술감독을 하고 싶었던 사람이라 막 현란하게 봉을 돌리더라고요. 그런데 저는 딱 3일 연습했잖아요?(웃음) 게다가 원랜 나무 봉을 돌리기로 했는데 쇠 봉을 주시는 거예요! 그렇게 얼토당토않게 시작하다 보니 슬슬 열이 받더라고요. '모델 일은 잘할 수 있는데 이건 왜 이래?'(웃음)"

 배우 김영광

"제 마음에도 들고, 대중이 보기에도 마음에 들 때까지 열심히 할 거예요. 그러려면 쉬면 안 될 것 같아요. 사람의 흥미라는 게,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뀔 수 있는 거잖아요. 지금 이렇게 (연기에) 꽂혀 있을 때 좀 더 깊이 들어가 봐야죠. 반만 담갔다가 발 빼는 건, 아쉽잖아요?" ⓒ 엔피노


이 '얼토당토않게 시작된' 연기는 결국 김영광의 길이 됐다. 이젠 가끔씩 원하는 대로 연기하게 됐을 때 "마음속에 쌓이고 가시처럼 돋았던 부분이 딱 맨들맨들해지면서, 기분 좋아질 때가 있다"고 말할 정도로 애정도 쌓였다.

그러면서 한 인터뷰에서 "26세까지 모델을 하고, 35세까지 연기자로 일하고, 36세부터 화가로 전향하는 것이 나의 인생 계획"이라고 말한 것도 과거의 일이 됐다. '부잣집 아들 역할은 더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피노키오>를 하면서 "일단 이 인물이 얼마나 매력적인지,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얼마나 있는지, 나와 교집합이 얼마나 있는지도 생각할 것"이라는 쪽으로 바뀌었다. 이렇게 김영광은 조금씩 궤도를 수정해 가며 영리하게 앞으로 나아가고 있다. 그 큰 키로 성큼성큼, 그러면서도 부지런히 '오늘'을 걷는 김영광에게 주목하게 되는 이유다.

"그땐 다 빨리 될 줄 알았어요. 생각이 짧았지!(웃음) 생각해 보면 그럴 수밖에 없는 나이었기도 했던 것 같아요. 뭐라고 해야 하지? 우월감? '나는 될 놈이야'라는 생각에 차 있었던 것 같기도 해요.(웃음) 이젠 연기를 좀 더 잘하고 싶어요. '다양한 역할, 좋은 역할을 맡으면서 (대중의) 인상에 깊이 남는 사람이 되어야겠다'라고 생각하죠.

제 마음에도 들고, 대중이 보기에도 마음에 들 때까지 열심히 할 거예요. 그러려면 쉬면 안 될 것 같아요. 사람의 흥미라는 게,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뀔 수 있는 거잖아요. 지금 이렇게 (연기에) 꽂혀 있을 때 좀 더 깊이 들어가 봐야죠. 반만 담갔다가 발 빼는 건, 아쉽잖아요?"

김영광 피노키오 박신혜 이종석 김해숙
댓글1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