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내가 좋아서 시작하는 것이기에 기본적으로 이기적입니다. 상대를 행복하게 해주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라고들 하지만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사랑할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동물을 사랑한다는 것 역시 나의 행복에서 출발합니다. 귀엽고 예뻐서, 신기해서, 함께 하면 즐거워서 등 나의 행복한 감정에서 시작되는 것이죠. 이런 사람들을 '동물 애호가'라고 말합니다.
지금 이 시대에 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동물 사랑을 표현하는 방식은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하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반려동물뿐만 아니라 모든 동물을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지만 그 시작으로 반려동물과 함께 하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최선이라 생각합니다.
저 역시 반려견을 처음 맞이하게 된 계기는 외로움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지금은 반려견을 위해 챙겨야 할 의무가 아주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그럼에도 반려견의 존재가 궁극적으로 나의 행복을 가져다 주기에 함께 할 수 있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반려동물이라는 말 자체가 기본적으로 인간과 동물은 따로 산다는 것을 방증합니다. 사람들이 무분별하고 잔인한 육식을 계속하는 이유 중 하나는 생활 공간에 있어서 동물과의 단절이라고 생각합니다.
농촌사회에서는 자연환경과 농경사회의 특성으로 인해 가축, 개 등 다양한 동물과 인간이 생활공간을 공유했습니다. 그래서 동물이 단순히 고깃감만으로 인식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도시화로 인해 동물과 인간이 완전히 분리되고 공장식 축산이 만연해졌습니다. 정육점의 고깃덩어리를 보면서 가축의 얼굴과 연결짓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 되었습니다. 동물을 먹거리로만 인식하는 문제뿐 아니라 동물원에 가야만 동물을 볼 수 있는 환경, 동물을 동반자로 인식하지 못해 이뤄지는 동물학대 등이 공간 분리로부터 나타난 문제입니다. 즉 이종(異種) 간의 공간 분리가 인간과 동물 사이의 동반자적 공동체 인식을 불가능하게 하고 결론적으로 인간보다 약한 동물을 도구적 존재로만 인식하는 종차별로 연결되었습니다.
반려동물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동물을 공동체의 일원으로 인식하는 데 큰 도움이 됩니다. 그러므로 동물을 사랑하는 가장 좋은 방법 중 하나는 인간의 도움을 필요로하는 반려동물을 보살피며 그것과 함께하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지 느끼는 것입니다. 내가 행복하면서도 누군가를 돌볼 수 있다는 것은 큰 축복이자 사랑하는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입니다. 현재의 동물사랑은 사랑하는 동물과 함께 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고 생각합니다.
한편 동물사랑이 나의 반려동물에만 머물러서는 안될 것입니다. 나의 반려동물만 사랑하고 다른 동물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동물사랑이 아니라 가족사랑에 한정됩니다. 또한 성숙한 사랑은 나의 행복을 넘어 상대의 행복을 바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인 동물사랑 역시 내가 행복하기 위해 동물을 좋아하는 것이 아닌 동물의 행복을 바라고 이를 위해 힘쓰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동물원에 갇혀 있는 동물을 보며 즐거워하는 것은 진정한 동물사랑이라고 말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고통받고 차별받는 동물의 환경을 개선하는 것에서 동물사랑의 실천을 시작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동물보호 활동가'라고 부릅니다. 동물보호 활동가는 동물애호가보다 고차원적인 동물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입니다.
에마뉘엘 레비나스라는 철학자는 '윤리란 보는 것'이라 했습니다. 그를 인용한 또 다른 글에서는 "고통받는 타인의 얼굴을 마주 보며 그 신음에 귀기울이는 것, 자신이 타인의 고통에 노출된 인질임을 수용하는 것, 그럼으로써 타인의 짐을 대신 짊어지는 것이 아닐까"라고 말합니다.
불편한 진실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 자체가 윤리라는 이 말에 전적으로 공감합니다.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현상을 파악해야 합니다. 그래서 동물사랑은 고통받는 동물들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합니다.
도축장에서 잔인하게 돼지가 끌려가는 모습이 담긴 사진이나 동영상을 페이스북에 올렸다가 보기 싫다며 온라인 상의 친구 관계를 해지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장면이 너무 끔찍해서 못보는 거라면 그 사람이 고기를 먹는 행위는 그 끔찍한 행위를 하도록 청부한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이것은 연출된 영화가 아니라 현실이기에, 우리는 타자의 고통을 보는 게 힘들더라도 봐야만 합니다. 동물권리에 관한 문제는 문제 자체를 모르거나 그릇된 인식을 가진 사람들이 많기에 제대로, 있는 그대로, 일단 '보는' 행위가 아주 중요합니다.
물론 저 역시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습니다. 예전에 가본 유기견 위탁 동물병원의 모습은 트라우마로 남아있습니다. 찌는 듯한 더위에 통풍과 배수가 되지 않는 건물에서 자신들의 배설물 위에 잠자던 개들. 그리고 봉사자들이 떠날 채비를 하자 일제히 울던 그 울음소리. 그날 이후로 저는 내 정신건강을 위해 봉사활동을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 그 울음이 사라졌다고 해서 그 동물들의 고통이 없어지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일은 어렵지 않았습니다. 현실을 똑바로 쳐다보는 것이 괴롭고 그걸 본다고 해서 당장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보고 느낀 후에 행동으로 옮길 수 있지 않을까요.
그래서 저는 피하지 않고 계속 볼 것입니다. 그러다보면 내가 할 수 있는 일, 해야 하는 일이 보일 것입니다. 내 품 속의 강아지뿐 아니라 인간에 의해 학대당하고 보호받지 못하는 동물을 돌볼 때, 진정으로 동물을 사랑한다 할 수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