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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내와 함께 발리 동부의 스마라푸라 왕궁(Puri Semarapura)을 걷고 있었다. 현재 스마라푸라 왕궁은 대부분 파괴되어 있고 궁전 남서쪽의 2개 건물만 온전히 남아 있다. 궁전 본전이 있던 연못 북쪽의 핵심 구역에는 궁전 안으로 들어가던 정문만이 외롭게 남아 있다.

스마라푸라 왕궁은 18세기 초에 겔겔(Gelgel) 왕조의 새로운 궁전으로 스마라푸라(Semarapura) 지역에 지어진 왕궁이다. 18~19세기 당시에 이곳 스마라푸라는 클룬쿵(Klungkung)이라고 불렸으며, 발리에서 가장 큰 도시로서 번영하고 있었다. 이 궁전에는 수많은 전각이 줄을 잇듯이 서 있었으나, 1908년에 네덜란드 군대의 침략으로 대부분의 건물들이 파괴되었다.

문 너머 저편에는 파괴된 왕궁의 유적만이 남아 있다.
▲ 스마라푸라 왕궁의 남문 문 너머 저편에는 파괴된 왕궁의 유적만이 남아 있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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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가 침공하기 전, 발리의 왕국들은 자바(Java) 섬에서부터 몰려들던 이슬람 세력을 성공적으로 막으면서 유지되고 있었다. 그러나 왕국 유지를 위해 고심하던 발리의 왕국들은 유럽에서 온 새로운 네덜란드 세력에 의해 왕국이 망하고 왕궁도 철저히 파괴되었다. 네덜란드 군이 왕궁을 공격하면서 중심부는 모두 잿더미가 되고 외곽의 몇 개 건물만 살아남게 되었다.

왕족의 실물을 묘사한 석상인데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나다.
▲ 왕궁의 석상 왕족의 실물을 묘사한 석상인데 사실적인 묘사가 뛰어나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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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궁 북쪽의 파괴된 터로 향하는 문은 굳게 닫혀 있다. 마치 이곳에서부터는 발리에서 번영을 누렸던 왕국의 역사가 단절되었다고 말하는 것 같다. 문 중앙의 나무로 만든 여닫이 문도 세월의 흐름 속에 닳아 구멍이 나 있고, 그 뒤로 희미하게 문 너머의 풍경이 들어온다. 눈길을 강하게 잡아끄는 것은 정문 앞에 서 있는 6개의 인물 석상이다.

이 인물상들은 모자와 머리에 선과 악을 상징하는 흰색과 검은색의 체크무늬 천을 두르고 있다. 이 인물상은 실제의 왕족을 조각해서 발리의 다른 석상들과 달리 신화적이지 않고 대단히 사실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이들 앞에는 제관이 왕족에게 예물을 올리고 힌두교 의식을 거행하는 노란 제단이 정성껏 차려져 있다. 

발리의 신랑, 신부가 화려한 전통예복을 입고 결혼사진을 찍고 있다.
▲ 웨딩 촬영 발리의 신랑, 신부가 화려한 전통예복을 입고 결혼사진을 찍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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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라푸라 왕궁 앞 잔디밭에서는 한 신혼부부가 열심히 결혼사진을 찍고 있다. 지나가던 서양인 커플이 같이 사진을 찍자고 하자 흔쾌히 사진 모델도 되어준다. 머리와 상의에 번쩍이는 금빛 장식을 한 이 커플은 사진사의 요구에 다양한 자세를 취하면서 웃고 있다. 얼굴에 화려하고 진한 화장을 한 신랑, 신부는 마치 영화를 찍고 있는 배우들 같다.

붉고 검은 원색 천에 새겨진 금박 문양이 아주 화려하다. 발리의 전통복장은 예복으로 참 아름다운 옷이라는 생각을 다시 하게 된다. 신부 머리의 화려한 금장식은 종류가 다양한데 이 신부의 머리 장식은 힌두교 사회에서의 그녀의 신분을 알려준다.

클룬쿵 왕조 왕족들의 유품과 생활용품들이 전시 중이다.
▲ 스마라푸라 박물관 클룬쿵 왕조 왕족들의 유품과 생활용품들이 전시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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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이 왕궁 터에는 클룬쿵 왕조 당시의 유물을 모아 전시 중인 훌륭한 박물관이 있다. 연못 동편에 자리한 이 박물관은 규모는 크지 않으나 당시 왕족들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유물들이 많이 진열되어 있다. 나는 아내와 함께 힌두 문화의 뱀신인 나가(Naga)의 호위를 받으며 박물관 계단을 올라섰다.

구불구불 몸체가 길게 이어진 나가로 장식된 계단을 보고 있으니 우리나라나 중국에 이 계단이 있었다면 '용' 계단으로 불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곳에서 보면, 상상의 동물인 용이 힌두문화의 상서로운 뱀, 나가가 크고 길게 이어진 모습에서 기원했다는 이야기가 꽤 설득력 있어 보인다.

현재는 파괴된 전각들이 왕궁 안에 가득 차 있다.
▲ 왕궁 미니어처 현재는 파괴된 전각들이 왕궁 안에 가득 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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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물관 내부에는 왕들이 사용하던 유품과 당시 생활용품들이 유리 나무곽 안에 전시되어 있다. 왕가의 사진 밑에는 왕과 신하 그리고 클룬쿵 왕조에 대한 설명문이 함께 붙어 있다. 그리고 왕족들이 살던 스마라푸라 궁전이 파괴되기 전의 모습 그대로 그림 및 미니어처로 재현되어 있다.

미니어처처럼 빽빽이 차 있던 전각들이 모두 없어졌으니, 그 많은 건축물들을 모조리 파괴하는 것도 힘들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발리 친구 아롬에 의하면, 이 많은 전각들을 다시 복구하는 것은 너무 많은 비용이 들어서 현재는 복원이 엄두가 안 난다고 한다.  

방금 전에 크르따고사(Kertagosa)에서 본 재판소 의자도 박물관 안에 보존되어 있다. 6개 의자의 모양과 색상이 건물 외부에 전시 중인 의자와 똑같이 생겼다. 크르따고사에 있는 재판 의자는 복사품이고, 박물관 안의 의자들이 진품이라고 한다. 역시 진품에는 역사의 세월이 녹아 있다. 박물관 안의 재판소 의자는 비록 낡았지만 유품으로서의 역사성이 느껴진다. 저 의자에 발리에서 죄를 지은 수많은 죄인들이 앉아서 실제로 법의 심판을 받았을 것이다.

랑다는 악의 상징이자 죽음을 불러오는 마녀이다.
▲ 랑다 랑다는 악의 상징이자 죽음을 불러오는 마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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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옆에는 클룬쿵(Klungkung) 왕조에서 성행하던 무용극 의상들이 화려하게 모습을 선보인다. 무용극 바롱(Barong)에 나오는 랑다(Rangda)가 위압적인 긴 손톱으로 사람들을 위협하고 있다. 얼굴은 온통 붉은색에 눈알은 흘러나올 듯이 튀어나와 있고, 4개의 엄니는 입 밖으로 돌출하여 있다. 엄니 중 2개는 마치 코끼리 상아같이 눈 위까지 튀어나와 있다. 화려한 장식으로 치장된 혀는 상반신 위에 길게 늘어져 있고, 온 몸을 뒤덮은 머리카락은 발에 닿을 듯이 길다.

라마야나(Ramayana) 신화 속의 랑다는 암흑과 악의 상징이자 죽음을 가져오는 두려운 존재이다. 선과 악의 전투에 나오는 랑다는 강력한 저주의 마술을 구사하는 발리 섬의 여자 악마이다. 랑다는 흑마술을 부리며 사람들을 병들게 하거나 죽이는데, 발리 사람들은 강력한 힘을 가진 이 악마를 경외심을 가지고 친근하게 바라본다. 힌두교가 선과 악이 공존하는 종교이고, 무용극을 통해서 어려서부터 랑다를 익히 봐 왔기 때문일 것이다.

바롱은 악마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주는 성스러운 동물이다.
▲ 바롱 바롱은 악마로부터 사람들을 지켜주는 성스러운 동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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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다 옆에 마치 우리나라 북청 사자춤의 사자 같은 덩치를 자랑하는 바롱(Barong)은 상상 속의 성스러운 동물이다. 선을 상징하는 바롱은 네 다리를 가진 야생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는데 얼굴 주변과 몸통 곳곳에 거울 조각을 붙이고 있다. 바롱은 발리 섬에 힌두교가 들어오기 전부터 사람들을 지켜주는 수호신 격의 신화적인 동물이었다.

바롱은 악마인 랑다와 싸우며 악마의 사악한 힘을 쫓아내며 재해를 예방한다. 이 바롱은 평상 시에는 힌두교 사찰 안에 모셔져 있어서 힌두교 신자들이 매일 공물을 바치고 기도를 올린다. 바롱도 눈이 빠질 듯이 튀어나와 있지만 인상은 랑다에 비해 참 선량하게 생겼다.

바롱 무용극이 시작되면 2명의 선택된 남자가 바롱 안으로 들어가서 발리의 영혼이라고 불리는 가물란(Gamelan) 반주에 따라 춤을 춘다. 이 성스러운 동물은 발리의 종교의례 때마다 사람들을 따라서 마을을 돌며 춤을 춘다. 이 종교의례가 지금은 무용극으로 완성되어 세계의 관광객들을 끌어 모으고 있다. 이 바롱 무용극을 보지 않으면 발리를 다녀왔다고 말하기에 부족함이 많다.

호신용으로 만들어졌던 이 발리 전통의 칼은 지금은 공연도구로 많이 사용된다.
▲ 크리스 호신용으로 만들어졌던 이 발리 전통의 칼은 지금은 공연도구로 많이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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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롱 옆에는 왕족들이 사용하던 발리의 칼이 날카롭게 빛나고 있다. 나무 손잡이에 철로 만든 날이 길게 뻗은 크리스(Kriss)라는 발리 특산의 칼이다. 발리의 이 전통 무기는 칼의 날이 직선이거나 구불구불한 형태로 되어 있다. 개인의 호신용으로 처음 만들어졌던 이 칼의 기능은 다양하게 변해서, 제례의식의 마법 용기로 사용되고 무용 공연에서는 공연의 도구로도 사용되었다. 칼을 만드는 기술도 훌륭하고 예술적이지만 이 칼은 아름다움 측면에서도 뛰어난 칼이다. 집에 장식용으로 소장하면서 보아도 괜찮을 아름다움이 담겨 있다.

발리 독립전쟁의 중심에 서서 의로운 죽음을 선택한 왕이다.
▲ 데와 아궁 발리 독립전쟁의 중심에 서서 의로운 죽음을 선택한 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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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 옆에서 아까부터 누군가 나를 보고 있는 것 같다. 클룬쿵 왕조의 왕, 데와 아궁(Dewa Agung)이 사진 속에서 듬직한 풍채와 강인한 눈빛으로 앞을 주시하고 있다. 클룬쿵 왕조는 발리에서 가장 오래된 왕조이고, 클룬쿵의 왕을 일컫는 라자(Raja)는 가장 숭고한 왕이었다.

데와 아궁은 네덜란드를 상대로 한 발리 독립전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인물이다. 1908년에 클룬쿵에서 그는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깨끗하게 죽음을 선택한 의로운 왕이었다. 휴양지로만 알려진 발리는 이렇듯 훌륭한 지도자들의 숨겨진 역사가 있다.  

스마라푸라 박물관(Semarapura Museum) 전시물 중에는 내가 발리 여행준비를 하면서 많이 접했던 그림이 한 점 걸려 있다. 이 그림은 발리인들에게 있어서 전설 같은 사건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이 그림은 의로운 죽음을 택한 의인들을 기리는 그림이다. 1908년 4월 28일, 대부분 칼과 창만으로 무장한 발리 사람들이 소총의 총부리를 겨냥하고 있는 잘 무장된 네덜란드 군들에게 항거하고 있었다.

죽음을 각오한 이 행진은 전투라고 하기보다는 학살이라고 표현하는 게 맞는 항쟁이었다. 발리인들은 항복하지 않고 행진하면서 의롭게 죽었다. 마치 일제의 기관총에 스러져 간 동학 혁명군과 구한말 의병들의 모습을 보는 듯하다. 

죽음의 행진을 하는 발리인들이 네덜란드 군에게 학살당하고 있다.
▲ 죽음의 행진 죽음의 행진을 하는 발리인들이 네덜란드 군에게 학살당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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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발리 북부와 롬복(Lombok) 섬을 지배하게 된 네덜란드는 발리 남부의 왕국들을 공격해 들어왔다. 발리의 왕국들은 전투력으로 네덜란드 군을 도저히 물리칠 수 없었다. 네덜란드군은 발리의 명목상의 지배왕가이자 마지막 왕가였던 클룬쿵 왕가의 왕족들을 무력으로 전멸시키고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발리 섬 전역을 지배하게 된다. 이때 네덜란드군은 클룬쿵의 마지막 왕과 그의 신하 200여명을 참살하거나 자살을 시키고 왕궁을 철저히 파괴했다.

당시 클룬쿵과 바둥(Badung)의 통치자들은 전투를 통해 네덜란드 군을 이길 수 없음을 알면서도 네덜란드에 항거하는 행진을 시작한다. 그들은 전통의 단검인 크리스를 뽑아들고 네덜란드 군에 대항하는 죽음의 행진을 했다. 이 명예로운 죽음의 행진을 발리에서는 '옥쇄'라는 의미의 '뿌뿌탄(puputan)'이라고 부른다. 이 뿌뿌탄에는 왕족 외에도 발리의 여성과 아이들이 참가하여 무려 4천 명 이상이 목숨을 잃었다.

인도네시아 안에서 유독 힌두교를 믿고 독립심이 강한 발리인들은 네덜란드의 식민지를 쉽게 수용하지 않았던 것이다. 발리의 수많은 지도층들이 보여주었던 무저항의 자결로 인해 네덜란드는 국제적인 비난을 받게 되었다. 뿌뿌탄 이후 네덜란드 정부는 식민지 발리의 전통 문화를 보전하는 정책을 내놓으며 유화책을 펼치게 된다.

박물관을 나오는데, 박물관의 도로 건너편에 뿌뿌탄 기념비가 보인다. 하늘로 높이 치솟은  기념비는 네덜란드와의 항쟁에서 총을 맞아 죽거나 자결한 남자들의 슬픈 남근을 상징하고 있다.

죽음의 행진! 참으로 감동적이지 않은가? 어떤 용기로 총 앞에 서게 되었을지 나로서는 도저히 가늠이 되지 않는다. 아쉽게 죽어간 그들의 자존심과 독립의 의지는 지금도 발리의 문화로 이어져서 찬란하게 꽃피고 있다. 죽음을 불사하는 지도자들의 용기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많은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덧붙이는 글 | 오마이뉴스에만 송고합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여행기 400 편이 있습니다.



태그:#인도네시아 여행, #발리, #클룬쿵, #스마라푸라 박물관, #스마라푸라 왕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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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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