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난 가을 거뒀던 땅콩, 잘 말렸다가 어제서야 선별하여 까는 작업에 들어갔다.
▲ 땅콩 지난 가을 거뒀던 땅콩, 잘 말렸다가 어제서야 선별하여 까는 작업에 들어갔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어릴 적 서울 근교에 살았다. 부모님은 봄부터 늦가을까지 직접 농사를 지어 매일매일 신선한 채소들을 솎고 선별하여 내다 파시곤 했다. 저녁 무렵까지 내다 팔 채소들을 다듬어 묶고, 새벽 첫 차에 짐을 실어 동대문과 혜화동 일대에서 팔다가 점심이 되기 전에 돌아오시곤 했다.

점심을 드신 후에는 또 내일 내다팔 채소들을 정리하셨다. 가지, 오이, 호박 같은 것도 있었고 열무, 부추, 들깻잎, 아욱, 근대 등 가짓수가 많었다. 내다팔 것은 늘 최상의 것이었다. 그러나 우리 밥상에 올라오는 것은 늘 벌레 먹고 허접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어린 나이에 "우리도 잘 생긴 것 좀 먹어보자!"고 투정을 부렸다. 그런 날은 정말 잘 생긴 것들로 만들어진 반찬이 밥상에 올라오기도 했다. 그러나 대체로 못생긴 것들을 먹고 자랐고, 그 덕분에 지금껏 큰 병치례 안 하고 잘 살고 있다고 믿고 있다.

농사 지은 사람만 먹을 수 있는 맛좋은 땅콩

중간에 검은땅콩은 썩은 것이 아니라 아주 간혹 나오는 보랏빛 땅콩이다. 요런 것은 농사꾼만 먹는다.
▲ 땅콩 중간에 검은땅콩은 썩은 것이 아니라 아주 간혹 나오는 보랏빛 땅콩이다. 요런 것은 농사꾼만 먹는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대략 20일 전, 복숭아뼈가 부러지는 사고를 당했다. 병원에서 퇴원한 후에도 지금껏 집에서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아내는 이때다 싶었는지 그동안 밀렸던 일들을 하나 둘 내놓는다. 심심할까봐 주는 일이라고 한다.

예를 들면 이런 일들이다. 잣까기, 서리태 고르기, 멸치대가리 따기 등등. 그러더니만 어제는 땅콩을 골라와서 까라고 한다. 지난 가을 거둔 땅콩인데 아직 까질 못했던 것이다.

땅콩을 까다보니 간혹 거의 검은 빛깔을 띠는 땅콩이 나온다. 맨 처음엔 썩은 것인가 하다가 얼핏 지난 가을 거둘 때 보았던 보랏빛 땅콩이 떠올랐다. 갈라보니 일반 땅콩보다 속이 더 하얗고, 먹어보니 더 고소했다. 시장에서는 절대로 살 수 없는 땅콩, 아는 사람만 먹는 희귀한 땅콩인 셈이다.

그런데 그 보랏빛 땅콩 말고 내가 더 좋아하는 땅콩이 있다. 그것은 바로 마르는 과정에서 잘 여물지 못했지만 물기가 거의 없이 비썩 말라버려 쪼글거리는 땅콩이다.

말리는 과정에서 수분을 거반 모두 날려버린 땅콩이 쭈글쭈글하다. 그런데 이 땅콩이 가장 맛난 땅콩이다. 돈 주고 살 수도 없는 땅콩이며, 농사꾼만 먹는 진짜배기 땅콩 맛이다.
▲ 땅콩 말리는 과정에서 수분을 거반 모두 날려버린 땅콩이 쭈글쭈글하다. 그런데 이 땅콩이 가장 맛난 땅콩이다. 돈 주고 살 수도 없는 땅콩이며, 농사꾼만 먹는 진짜배기 땅콩 맛이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땅콩을 거둔 이듬해 땅콩밭을 갈다가 두어 개 떨어져 있던 땅콩 껍데가 속에 들어있던 쪼글거리는 땅콩을 주워 먹은 적이 있다. 볶은 땅콩은 아니지만, 잘 말라 고소하고 약간 날콩의 비린내가 들어있는 오묘한 맛이었다. 볶음도 아니고 삶은 것도 아니고 날 것도 아닌 자연이 만들어준 그 맛에 나는 '홀딱' 반했다.

그러나 그런 땅콩은 이른바 '파지'로 분류되어 상품으로는 나올 수 없다. 그러니 농사를 짓지 않는 한 일반인들이 그런 땅콩을 먹을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행운이 내게 온 것이다.

아이들 반응도 비슷했다. 모양은 별로인 쪼글거리는 땅콩을 한번 먹어보더니만 볶은 땅콩보다 훨씬 맛있다고 한다. 각자의 입맛에 따라 약간은 다르겠지만, 땅콩의 맛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는 땅콩이 있다면 바로 햇살과 바람에 잘 마른 쪼글거리는 생땅콩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땅 속에서 땅콩을 자라게 해 준 것도, 지난 가을에 거둔 후 지금까지 땅콩을 보호해 준 것도 껍데기 덕분이다. 이 껍데기는 서울에서야 쓰레기로 분류되지만, 시골이었더라면 아궁이 불쏘시개로 사용되었을 것이다. 밭에 뿌려지면 거름도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껍데기, 그것은 하찮은 것만은 아니다. 오로지 껍데기에만 치중하면 하찮은 것이 되겠지만 알맹이를 키워내고 지켜주는 역할을 하는 껍데기에게 누가 손가락질을 할 수 있겠는가?

땅콩을 까며 '땅콩 회항' 사건을 접하다

껍데기는 정말 필요없는 존재였을까? 저들이 없었더라면 온전한 땅콩도 없었을 것이다.
▲ 땅콩껍데기 껍데기는 정말 필요없는 존재였을까? 저들이 없었더라면 온전한 땅콩도 없었을 것이다.
ⓒ 김민수

관련사진보기


마침 땅콩을 까고 있는데 '땅콩 회항' 사건이 터졌다는 보도가 뜬다.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이 이륙 직전 기내 서비스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이유로 항공기를 돌려세웠다는 것이다.갑질도 여러가지다 싶다. 그간 시끄러웠던 정윤회 사건도 덮을 만큼 국민 여론이 뜨겁다.

손가락이 아프도록 땅콩을 까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그 많은 땅콩 중에서 같은 것은 하나도 없다. 모양은 모두 달라도 다 '땅콩'이다. 그러나 다르다고 해서 그들이 차별받을 이유는 하나도 없다. 썩지만 않았다면. 우리 사람도 그렇지 아니한가?

오히려 저 말도 안 되는 갑질을 하는 부류의 인간이야말로 문제 아닌가. 당선 전에는 간이라도 빼어줄 듯 굽신거리다 당선되고 나면 공약이고 뭐고 휴지 조각처럼 여기는 정치인들이야말로 썩은 부류의 인간이 아닌가 말이다.

땅콩, 나도 부모님들처럼 잘 생긴 것들은 골라 지인들에게 나눠주고 못생긴 것들은 우리가 먹을 것이다. 못생긴 것들이 더 맛나고 몸에 좋다고 해도 그걸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고, 괜히 못생긴 것 선물로 주었다가 주지 않으니만 못한 사태가 생길 수도 있기 때문이다.

옆에서 지켜보던 막내가 한 마디 한다.

"아빠, 그 좋은 것은 다 남들 줄 거지? 자랑하고 싶은 거야?"
"아니, 어차피 우리가 다 못 먹는데, 못생긴 거 주면 오해 받을 수 있어서. 근데 이 못생긴 것 먹어봤잖아. 얼마나 맛있니? 이런 거 주면 받은 사람이 뭐라겠어?"

문득 어릴 적 투정을 부리듯 "우리도 잘 생긴 것 좀 먹자!"고 조르던 내 모습이 떠올라 웃음이 난다.


태그:#땅콩, #농사, #마른땅콩, #보라색땅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자연을 소재로 사진담고 글쓰는 일을 좋아한다. 최근작 <들꽃, 나도 너처럼 피어나고 싶다>가 있으며, 사는 이야기에 관심이 많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