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들 살피는 황선홍 감독 2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클래식 FC서울과 포항스틸러스의 경기. 경기 시작에 앞서 포항스틸러스 황선홍 감독이 그라운드의 선수들 모습을 살피고 있다.

▲ 선수들 살피는 황선홍 감독 지난 26일 오후 서울 마포구 성산동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K리그 클래식 FC서울과 포항스틸러스의 경기. 경기 시작에 앞서 포항스틸러스 황선홍 감독이 그라운드의 선수들 모습을 살피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해 겨울, 포항은 K리그 역사에 길이 남을 드라마의 중심에 있었다. 2013년 12월 1일 시즌 최종전, 포항은 울산을 상대로 종료 직전 팽팽한 승부의 균형을 깨는 결승골을 터뜨렸다. 포항은 김원일의 골 덕분에 1-0으로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당시 무승부만 거둬도 우승컵을 거머쥘 수 있었던 울산은 눈물을 흘렸고, 포항 선수들은 '1분의 기적'에 환호성을 울렸다. 그해 포항은 단 한 명의 외국인 선수 없이도 정규리그와 FA컵을 모두 석권하는 기적을 일궈냈다.

정확히 1년 후 2014년 11월 30일, 운명의 장난처럼 포항 극장은 '비극'으로 바뀌었다. 작년 이맘때는 역전 우승의 환희를 맛봤던 시즌 최종전 홈경기였다. 그러나 이번에는 정반대로 한 해 농사를 망치는, 충격적인 역전패의 제물이 되고 말았다. 수원 삼성에 1-2 역전패한 포항은 4위로 밀려나며 라이벌인 FC 서울에 마지막 남은 아시아챔피언스리그(ACL) 출전권을 빼앗겼다.

포항으로서는 믿기 어려운 데자뷔였다. 포항이 후반 3분 김광석의 선제골을 터뜨려 1-0으로 앞서가던 것과 같은 시간, 서울은 제주와의 원정 경기에서 0-1로 끌려가고 있었다. 정규리그와 FA컵, 챔피언스리그를 모두 놓친 포항이었다. ACL 출전권이 주어지는 3위 수성은 마지막 자존심과 같았다.

하지만 악몽이 시작됐다. 막판 10여 분을 지키지 못하고 포항은 무너졌다. 후반 34분 산토스에게 동점골을 내주더니 5분 뒤에는 정대세에게 역전골을 내줬다. 같은 시각 서울은 후반 24분 윤일록이 동점골을 터뜨렸고, 후반 44분에는 오스마르가 역전골을 터뜨려 2-1로 승부를 뒤집었다.

포항과 서울의 순위가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승점은 58점으로 동률을 이뤘으나 골득실에서 3골 차이로 양 팀의 희비가 엇갈렸다. 종료 휘슬이 울리는 순간, 황선홍 감독과 선수단은 망연자실했고 팬들은 눈물을 흘렸다.

투자 실종과 이명주 공백이 불러온 포항의 몰락

포항의 몰락은 어쩌면 예고된 비극이었다. 포항은 지난 시즌 우승 이후, 계속된 모기업의 긴축 재정 속에서 우승 공신이었던 계약 만료 선수들을 대부분 잡지 못했다. 이렇다 할 전력 보강도 없었다.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외국인 선수 한 명 없이 시즌을 시작했다. '쇄국축구(외국인 선수 없이 운영되는 팀을 쇄국정책에 비유)'는 본의 아니게 포항의 트레이드마크가 됐지만, 황선홍 감독이 원했던 선택은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항은 막상 시즌을 개막하자 중반까지 승승장구했다. 어느덧 포항에서 4년 차를 맞이한 황선홍 감독의 뛰어난 용병술, '스틸타카(스틸러스+티키타카)'로 대표되는 공격 축구의 조직적 완성도가 정점에 달했다.

특히 에이스로 자리잡은 공격형 미드필더 이명주의 활약은 상대팀에게 충격과 공포 그 자체였다. 이명주는 시즌 중반 K리그 연속 경기 공격 포인트 신기록(10경기)를 세우며 포항의 선두 질주를 이끌었다. 이명주가 지난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서 탈락했을 때 일어난 논란은 역설적으로 그의 경기력이 얼마나 대단했는지를 증명한다. 포항은 이명주를 앞세워 K리그에서 8월 초까지 선두를 질주했고, 아시아 정상까지 넘봤다.

그러나 이명주는 브라질 월드컵 최종 엔트리 탈락 이후 갑자기 카타르 알 아인 이적을 선택했다. 황선홍 감독의 입장에서는 호날두나 메시가 시즌 중반 이탈한 것과 같은 충격이었지만, 정작 포항에게는 이명주를 잡을 여력이 없었다. 그렇다고 이명주가 떠난 뒤 이적료로 그의 공백을 메울 만한 전력 보강이 있었던 것도 아니다.

이 선택은 결국 양쪽 모두에게 적지 않은 손해를 남겼다. 이명주는 비록 엄청난 연봉을 받으며 알 아인에서도 주전 선수로 자리 잡았지만, 월드컵에 이어 병역 혜택을 얻을 수 있었던 아시안게임 출전마저 불발되는 아픔을 감수해야했다.

포항은 이명주가 떠나자마자 몰락하기 시작했다. 3연패를 노렸던 FA컵에서 8강, ACL에서는 16강 탈락했다. 포항은 두 대회에서 모두 최용수 감독이 이끄는 서울과 승부차기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패했다. 급기야 시즌 최종전에서 ACL 출전권마저 내주게 됐으니 지독한 악연이 아닐 수 없었다.

마지막 기대를 걸었던 정규시즌에서도 후반기 폭풍 질주를 이어간 전북의 기세에 눌렸다. 포항은 역전 우승을 일궈낸 지난 시즌과 정반대의 모습을 보였다. 올해는 막판 5경기에서 3무 2패로 단 1승도 거두지 못하며 4위까지 내려앉았다.

골 결정력 부족이 특히 발목을 잡았다. 단적인 예로 포항은 이명주가 건재하던 리그 12라운드까지만 무려 26골을 넣었다. 이후 26경기에서는 고작 24골을 추가하는 데 그치며 공격력이 뚝 떨어졌다. 막바지 순위 싸움이 한창이던 10월에 '공격의 핵' 김승대와 손준호가 2014 인천아시안게임 대표로 차출된 것도 악재였다. 황선홍 감독은 고심 끝에 시즌 막판 수비에 치중하는 스리백 전술로 변화를 도모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변화는 오히려 독으로 작용하며 공수 밸런스가 더욱 무너지는 악순환을 초래했다.

황선홍의 포항, 그래도 내년이 기대되는 이유

그럼에도 불구하고 올 시즌 황선홍 감독과 포항 선수들의 선전은 박수받기에 충분하다. 황선홍 감독은 어려운 상황에서 한 번도 구단이나 선수들에게 책임을 전가하지 않았다. 오히려 모든 시행착오를 자신의 탓이라며 감싸 안았다. 한정된 전력으로 최대한의 효과를 끌어내는 노련함은 어느덧 명장의 풍모를 느끼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아시안게임 우승 주역인 김승대와 손준호를 비롯하여 배슬기, 문창진, 이광혁, 이광훈, 강상우 등 젊은 선수들의 성장과 가능성을 발견한 것도 성과다.

다소 늦은 감이 있지만 포항은 올해의 시행 착오를 바탕으로 후반기부터 전력 보강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분명 희망적이다. 지난 9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출신 미드필더 안드레 모리츠를 영입한 데 이어, 추가적으로 외국인 공격수 영입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올 시즌 부상으로 고전했던 고무열과 조찬호가 복귀하고, 군입대한 신광훈의 공백을 메워줄 풀백자원 보강이 이뤄진다면 다음 시즌 스틸타카의 권토중래를 기대하기에 충분하다.

무엇보다 포항의 과제는 황선홍 감독을 지키는 것이다. 시즌 후반기 황선홍 감독이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일본 J리그 세레소 오사카 감독 후보로 거론되면서 팀 분위기가 흔들린 감이 있다. 최근 포항의 꾸준한 성적은 황선홍 감독의 능력을 빼놓고 설명할 수 없다.

그간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계속된 구단의 빈약한 지원과 외부 악재 속에 마음 고생이 심했던 황선홍 감독이다. 그에게는 용두사미로 끝난 이번 시즌의 아쉬움보다 위로와 격려가 더 필요한 상황이다. 황 감독은 다음 시즌에도 여전히 포항에 있을 것이라고 공언했지만 앞으로도 구단의 상황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미래는 알 수 없는 법이다. 포항으로서는 그 어떤 선수보다 황선홍 감독을 오래 지키는 것이 장기적인 구상을 위한 필수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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