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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학문 높이는 몇 인(?, 8척이 1?)이나 되어 아무나 그 세계를 볼 수 없다고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 만인궁장(萬??墻) 공자의 학문 높이는 몇 인(?, 8척이 1?)이나 되어 아무나 그 세계를 볼 수 없다고 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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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세계적으로 약 2000여 개가 넘는 공자 사당, 공묘(孔廟)가 있다. 공자가 죽은 2년 후인 BC 478년, 노(魯)나라 애공(哀公)은 공자가 살던 곳에 '수당(壽堂)'이라는 사당을 짓고 공자의 의관, 가마, 악기, 책 등을 전시한 후 때마다 제례를 올리기 시작했다. 고거(故居) 정도에 불과했던 공묘(孔廟)의 시작은 이렇게 비록 미천했지만, 한대부터 황제가 제례를 드리는 곳이 되면서 규모가 커지기 시작했다.

게다가 당 태종이 전국에 공묘를 설치하라는 조소를 공포하며 그 수도 크게 증가한다. 송, 금, 원, 명, 청을 거치면서 보수·확장이 이뤄져 104채 건축, 460칸 방을 갖춘 웅장한 건축군으로 변모했다. 베이징의 고궁, 청더(承德)의 피서산장과 함께 중국 3대 고건축군으로 자리 잡았다. 명, 청대에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 베트남,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의 조공국에도 공묘가 생겨났다.

공묘는 황제도 세 번 무릎을 꿇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려 절하는 '삼궤구고두례(三跪九叩頭禮)'를 행하던 곳이다. 제례를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성인의 반열에 오른 공자이다. 공묘는 그를 향한 무궁한 존경과 숭배를 위한 절대 공간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또한 노벽(鲁壁), 우물 등 공자가 살던 고택의 흔적을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으며, 제자들을 가르쳤다는 행단, 공자가 주유(走遊)한 성적도(聖迹圖), 그리고 제자와 가족의 제사를 위한 사당 등도 함께 보존되어 있다.

입장료 2만 7000원... <논어> 외우면 무료 입장

공자의 고향답게 <논어> 외우기를 장려하는 행사가 진행되는 모양이다.
▲ <논어> 외우면 공묘, 공부, 공림 입장권 무료 공자의 고향답게 <논어> 외우기를 장려하는 행사가 진행되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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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위안(약 2만 7000원)으로 다소 비싼 입장권을 사서 들어가려는데, 입구 옆 광고판에 <논어>를 외우면 공짜로 입장할 수 있다는 문구가 보인다. 1만 5000자가 넘는 논어를 외우느니 150위안을 내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공묘의 시작은 '만인궁장(萬仞宫墻)'이다. 원래 명대 건설된 취푸성(曲阜城)의 정문이었는데 지금은 공묘의 기점이다. 성곽에 붙어 있는 '만인궁장' 글귀는 청나라 시절 건륭제가 쓴 것으로 <논어>에서 따왔다.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자신의 학문은 어깨 높이 정도여서 누구나 쉽게 들여다 볼 수 있지만, 공자의 학문 높이는 몇 인(仞, 8척이 1인)이나 되어 아무나 그 세계를 볼 수 없다고 한 것에서 유래했다. 만인궁장 안에 얼마나 무궁무진한 공자의 학문 세계가 펼쳐져 있기에 이런 과장인가 싶어 빨리 들어가 보고 싶어진다.

공묘에 들어서면 우선 공자가 모셔진 곳의 위엄을 나타내는 패방들이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 줄지어 선 패방들 공묘에 들어서면 우선 공자가 모셔진 곳의 위엄을 나타내는 패방들이 관광객들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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횡으로 뻗어야 할 ‘지(至)’의 첫 번째 획이 아래로 굽어져 내려온 모양이다.
▲ 지성묘(至聖廟) 횡으로 뻗어야 할 ‘지(至)’의 첫 번째 획이 아래로 굽어져 내려온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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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파에 떠밀려 공묘에 들어서니, 예사롭지 않은 패방(牌坊)들이 줄서서 관광객을 맞이한다. 첫 번째가 금성옥진(金聲玉振)이다. <맹자>에서 취해온 말로, 쇠로 된 '종(鐘)'을 치는 것이 제례악의 시작이고, 옥으로 된 '경(磬)'을 치는 것이 끝인데 공자가 학문의 시작과 끝을 하나로 집대성했다는 의미이다. 돌기둥 위에 '벽사(辟邪)'가 하늘을 향해 조각되어 있어 조천후(朝天吼)라고도 불린다. 글씨는 명대 서예가 호찬종(胡纘宗)이 쓴 것으로, 옥(玉)자의 점이 아래에 있지 않고 가운데 있는 것을 두고 경을 칠 때 아래가 아닌 가운데를 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공자의 사상이 '중용(中庸)'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두 번째 패방 영성문(欞星門)으로 가는 길에 반교(泮橋)라는 작은 다리가 있는데, 반(泮)이 학교라는 뜻이니 '학교 가는 다리'라는 의미다. 이 다리를 건너면 공자학교에 들어가 그의 제자가 되는 셈이다. 영성문 앞 동편으로 '관원인등지차하마(官員人等至此下馬)'가 적힌 하마비가 있다. 청대 한 농부의 우마차가 이 하마비에 부딪히는 사고 이후로 공묘 앞에 우마차 진입이 금지되었다고 한다.

영성문은 건륭제가 쓴 글씨인데 공자가 귀신을 섬기지 않아 령(欞) 아래의 무(巫)를 쓰지 않았다고도 한다. 그러나 획순이 많아 필획의 두께를 맞추기 위함으로 보인다. 황제가 하늘에 제사를 지내기 전에 먼저 영성(欞星)에 제사를 지냈다고 하니, 슬슬 공자에 대한 제례가 시작되는 것 같다.

세 번째 패방 태화원기(太和元氣)는 명대 1544년 지어진 것으로, 태화는 하늘과 땅, 즉 음양을, 원기는 오행(五行)을 가리킨다. 공자의 사상이 우주만물을 소생하게 하는 기운이라는 의미다.

네 번째 패방 지성묘(至聖廟)는 청대 옹정제의 서체가 남아 있다. 횡으로 뻗어야 할 '지(至)'의 첫 번째 획이 아래로 굽어져 내려온 모양이다. 지극히 높은 성인인 공자의 학문이 더 이상 높아질 필요가 없음을 나타낸다고 한다. 지성(至聖)에 대한 피휘(避諱)인지 공묘의 어디에도 공자의 '공(孔)'자를 찾을 수 없다. 문묘(文廟), 부자묘(夫子廟) 등으로 쓰이는데, 이곳이 세계 모든 공묘의 종가집이니 '지성묘'라고 할 만도 하다.

고목과 거석이 즐비한 곳... 역사의 무게가 느껴진다

건륭제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나무와 비정이 서로 기대고 섰다.
▲ 고목과 건축물들이 저마다의 이야기를 간직하고 서 있다. 건륭제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나무와 비정이 서로 기대고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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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걸음 걸을 때마다 패방, 문(門), 루(樓), 각(閣), 비(碑)가 꼬리를 물고 등장하는데 자세히 볼 겨를도 없이 사람들의 물결을 따라 걸음이 흐른다.

패방을 통과하면 명대에 세워진 성시문(聖時門)이다. <맹자>에 백이(伯夷), 이윤(伊尹), 유하혜(柳下惠), 공자를 네 명의 성인으로 칭하는데 공자를 '성지시자(聖之時者)'라 한 것에서 유래한다. 공자의 사상이 모든 왕조, 시대를 초월해 변함없이 유용하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415년 명 영락제 때 건립되었으며, 청 건륭제가 편액을 썼으나 문화대혁명 때 훼손되어 지금은 복제품이 걸려 있다.

성시문을 지나면 넓은 정원에 측백나무 고목이 펼쳐진다. 공묘에는 1700여 그루의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데, 주로 측백나무가 많고 가장 오래된 것은 수령이 1800년에 이른다. 여름에는 백로가 이곳에 서식하는데 공묘에만 머물며 떠나지 않는 것이 중국자연생태의 4대 미스터리 중 하나라고 한다. 백로는 취푸시의 시조(市鳥)로 지정되어 있다. 여름이 지나서인지, 몰려든 인파 때문인지 백로는 보지 못했다.

3개의 교량이 있어 가운데는 황제, 동쪽은 문관, 서쪽은 무관(東文西武)이 지나간다.
▲ 벽수교(璧水橋) 3개의 교량이 있어 가운데는 황제, 동쪽은 문관, 서쪽은 무관(東文西武)이 지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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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가로지르면 명대에 인공으로 만든 벽수교(璧水橋)가 나온다. 베이징 고궁의 금수교는 5개인데 비해, 3개의 교량이 있어 가운데는 황제, 동쪽은 문관, 서쪽은 무관(東文西武)이 지나간다. 건륭제가 이 다리에서 "계단을 오르는 것은 지위가 높아짐이요, 양쪽 난간은 좌우로 두루 세상을 봄이요, 계단을 내려오는 것은 대대손손 권력과 부가 전해짐이로다"라고 했다고 전한다.

다리를 건너면 홍도문(弘道門), 대중문(大中門), 동문문(同文門)이 이어진다. 건륭제와 옹정제가 서로 더 공자의 사랑을 받기 위해 앞 다투어 <논어>의 구절을 인용해 편액을 써놓은 듯하다. 대중문 양 옆으로 멋진 각루(角樓)가 서 있고, 동문문을 지나면 규문각(奎文閣)이 나온다. 규문각은 중국 10대 명루(名樓) 중의 하나로 꼽힐 정도로 아름다운 목재 건축 양식을 자랑한다. 송대 건축 당시는 장서루(藏書樓)였으나 금대에 공자를 문장을 관할하는 규성(奎星)에 비유하여 규성각이라 하였다.

공자가 이사하면 온통 책뿐이다(孔夫子搬家─淨是書)는 말이 있을 정도니, 이곳에 소장된 책이 오죽 많을까 싶다. 책뿐만 아니라 공자의 행적을 그린 120점의 성적도도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오랜 역사 동안 수차례의 대형 지진에도 못 하나 사용하지 않고 나무만으로 만든 규문각은 변함없이 우뚝 솟아 있었다고 한다.

규문각 바로 앞에 13비정(十三碑亭)이 펼쳐진다. 공묘에는 모두 1371개의 비석이 있는데 시안(西安)의 비림(碑林)에 버금가는 규모이다. 이곳 13비정에만 당, 송, 요, 금, 명, 청대의 비석 50여 개가 전시되어 있다.

다른 삐시는 모두 입을 다물고 있는데 이것만은 비석이 너무 크고, 공자의 덕이 너무 무거워 입을 벌리고 숨을 헐떡이고 있다.
▲ 무게 65톤의 공덕비 다른 삐시는 모두 입을 다물고 있는데 이것만은 비석이 너무 크고, 공자의 덕이 너무 무거워 입을 벌리고 숨을 헐떡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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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중 가장 큰 것은 무게가 65톤이나 되는데 베이징에서 옮겨왔다고 한다. 무거운 것을 짊어질수록 기분이 좋아지는 용의 여섯 번째 아들 '삐시(贔屭)' 위에 거대한 공자의 공덕비가 놓여 있다. 다른 삐시는 모두 입을 다물고 있는데 이것만은 비석이 너무 크고, 공자의 덕이 너무 무거워 입을 벌리고 숨을 헐떡이고 있다. 해서(楷書)체로 빼곡히 적힌 한자 사이로 중간 중간 훼손된 흔적이 보인다.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이 3일 동안 이곳을 파괴했는데 다행히 저우언라이가 중단시켰다고 한다.

비정과 대성문 사이에 용 모양으로 구불구불 파인, 예사롭지 않은 측백나무 한 그루가 있는데 건륭제가 앉아 쉬던 나무라고 한다. 건륭제는 아홉 번 강남을 순시하는데 그 중에 일곱 번을 취푸에 들렀다. 마지막으로 취푸에 왔을 때는 나이가 들어 이 나무 앞에 앉아 쉬었는데, 이후 이렇게 용처럼 변했다는 것이다. 역사적 근거가 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얘깃거리는 되는 듯하다.

자꾸 발길 붙잡는 공묘... 기회 되면 다시 오고 싶다

공자가 심은 나무가 악착같은 생명력으로 다시 살아 있다고 믿음으로써 그 사상과 정신을 계승하고자 한다.
▲ 선사수식회(先師手植檜) 공자가 심은 나무가 악착같은 생명력으로 다시 살아 있다고 믿음으로써 그 사상과 정신을 계승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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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문으로 들어서니 옹정제의 편액이 걸려 있다. 옹정제가 대성전의 규모에 맞게 대성문을 확장하고자 했으나 비정이 바로 앞에 있어 하는 수 없이 서로 지붕이 교차되게 했다고 한다. 이를 두고 심혈을 기울여 정교하게 각을 맞추었다는 의미로 '구심투각(勾心鬪角)'이라고 한다.

대성문을 통과하면 오른편으로 전나무 고목과 '선사수식회(先師手植檜)' 비석이 보인다. 공자가 이곳에 직접 세 그루의 나무를 심었는데 말라죽고 다시 살아나기를 반복했다 한다. 명대에 다시 이곳에서 나무가 자라자, 만력제 때 이 비석을 세운 것이다. 이후 다시 전란에 불타 사라졌다가 1732년에 다시 자란 나무가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니 악착같은 생명력이 놀랍다.

끊임없이 부침을 거듭하는 공자에 대한 평가도 어쩌면 저 나무와 함께 생사를 넘나들며 이어져 오는지 모르겠다. 최근 시진핑 국가주석이 공자의 글을 다시 읽어야겠다고 하며 언급한 <공자가어통해(孔子家語通解)>가 대성전 앞 가판대에서 판매되고 있다. 저 나무도 높아진 공자의 위상처럼 무성히 자랄 '시대의 훈풍'을 만나고 있는 셈이다.

공자가 심었다가 부활한 전나무가 무성히 자랄 ‘시대의 훈풍’을 만나고 있는 셈이다.
▲ 대성전 앞에서 공자에 관한 책이 판매되고 있다. 공자가 심었다가 부활한 전나무가 무성히 자랄 ‘시대의 훈풍’을 만나고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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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나무는 보이지 않고 살구나무 한그루가 멋드러진 행단 건물과 어우러진다.
▲ 행단(杏亶) 은행나무는 보이지 않고 살구나무 한그루가 멋드러진 행단 건물과 어우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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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문과 대성전 사이에 공자가 제자들에게 강학을 펼쳤다는 행단(杏亶)이 있다. 사실 <장자(莊子)>의 기록에 공자와 행단에 관한 언급이 있긴 하지만, 구체적인 장소는 지금까지 명확하지 않다.

공자를 모시는 향교에 은행나무가 많은 것도 이 '행단'이라는 말 때문인데 그것이 살구나무인지 은행나무인지도 문헌상으론 불분명하다. 건축물 안에 완전하게 보존된 '행단'이라고 써진 비석이 있는데 금대 문학가 당회영(黨懷英)이 쓴 것으로, 홍위병들이 '당(黨)'의 물건으로 여겨 훼손하지 않았다고 한다.

공묘의 하이라이트는 대성전(大成殿)인데, 용이 그 진면목을 마지막에 드러내듯 제일 뒤쪽에 자리 잡고 있다. 송 휘종이 1108년 건축했으나 번개로 인한 화재로 소실됐다. 중건이 수차례 반복되다가 현재 건물은 1724년 옹정제가 6년에 걸쳐 3만 명의 장인을 동원해 재건한 것이다. 공자에 대한 제례의 중심 장소인 대성전은 베이징 고궁의 태화전, 타이안(泰安)의 대묘(岱廟)와 함께 중국 고대 3대 건축물로 불린다.

돌기둥에 양각된 용은 살아 있는 듯 해의 움직임에 따라 그림자를 꿈틀댄다.
▲ 대성전 앞의 용기둥 돌기둥에 양각된 용은 살아 있는 듯 해의 움직임에 따라 그림자를 꿈틀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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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와에 정면 9칸, 측면 5칸으로, 황제를 나타내는 구오지존(九五之尊)의 양식이니, 공자를 이미 황제급으로 예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대성전(大成殿) 황기와에 정면 9칸, 측면 5칸으로, 황제를 나타내는 구오지존(九五之尊)의 양식이니, 공자를 이미 황제급으로 예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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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기와에 정면 9칸, 측면 5칸으로 황제를 나타내는 구오지존(九五之尊)의 양식이다. 공자를 이미 황제급으로 예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대성전 안의 공자상은 문화혁명 때 훼손된 것을 1982년 복원한 것이며, 그 앞에 공자의 4대 제자 안회, 자로, 증삼, 맹자상이 있다. 대성전 안 편액들은 역대 황제들의 서예 대결처럼 곳곳에 걸려 있다.

옹정제가 쓴 '생민미유(生民未有)'는 지금까지 공자처럼 뛰어난 사람은 태어나지 않았다는 뜻이고, 강희제가 쓴 '만세사표(萬世師表)'는 공자가 모든 세상의 모범이라는 의미이다. 광서제가 쓴 '사문재자(斯文在玆)'는 천하의 모든 문화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내용이다.

특히 대성전 전면의 높이 약 6m, 직경 0.8m의 10개 돌기둥에 양각된 용은 살아 있는 듯 해의 움직임에 따라 그림자를 꿈틀댄다. 황제가 이곳에 올 때는 용을 상징하는 황제를 예우하는 차원에서 노란 비단으로 가렸을 정도로, 황제도 시샘할 만큼 빼어난 용 조각이 공자를 호위하고 있는 셈이다.

대성전 뒤로 공자의 부인에게 제사를 올리던 침전(寢殿)과 성적전(聖迹殿)이 있지만 시간이 없어 다 둘러보지 못하고 돌아 나왔다, 그런데 또 걸음을 붙잡는 곳이 있었다. 진시황이 분서갱유를 단행할 때 공자의 9대손 공부(孔鮒)가 <논어>, <상서>, <예기>, <춘추>, <효경> 등의 경전을 이중벽 안에 숨겼다는 '노벽(魯壁)'이었다. 관광객들에게 악착같이 달라붙어 엽서와 CD를 파는 노점상들처럼 공묘도 공자의 얽힌 수많은 흔적과 이야기들로 내 발길을 자꾸 붙잡는 것만 같다. '후회유기(後會有期)', 또 만날 기회가 있겠지 하며 아쉬운 걸음을 공림(孔林)으로 향한다.


태그:#공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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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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