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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상할 수 없는 두려움

'(...) 두 남자가 조난당한다. 장소는 에베레스트 내지는 히말라야 어드메. 시간은 알 수 없다. 일행을 잃고 눈보라 속을 헤맨 지 한참이다. 눈앞에 산장이 보인다. 의식이 흐려져서다. 죽음 문턱에서 나타난 신기루가 분명하다. 하지만 이대로면 죽는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들어간다.

캄캄한 어둠 속을 더듬어 나아간다. 갑자기 여자 목소리가 들린다. 귀신이야! 혼비백산, 발버둥을 친다. 보이지 않으니 여기저기 부딪친다. 여자가 말을 하는 것 같다. 조금씩 더듬어 보니 이거, 사람이다. 통성명을 할 새도 없다. 서로의 체온으로 몸을 녹인다. 다른 방도가 없다.

이 때, 무전기가 울린다. "치익-칙-칙" 일행이다! 필사적으로 귀를 가져다 댄다. "칙-치익-야-치익-거기 있으면-칙-죽어!" 나가야 한다. 나가야 한다. 여자, 느닷없이 다리를 붙든다. "당신들, 여기서 못 나가요." (...)'

상상 이상이었다. 그렇게 큰 두려움일 줄은 몰랐다. 아니, 머리로만 알았다. 갇힌 공간에서 죽음이 목을 죄어오는 상황은, 결코 내가 상상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밖에 있었던 사람, 안에 있었던 사람

바로 어제의 일이다. 나는 배우훈련이라는 이름으로 잔인한 폭력을 행했다. 대학 연극회의 공연을 준비하는 과정이었다. 작품 속 인물들은 밀폐된 공간에서 몇 개월을 함께 산다. 이대로 여기서 죽게 된다는 두려움, 영문도 모르고 함께하게 된 사람들 사이에서 생기는 불편함, 탈출은 애초에 불가능하다는 무력감과 절망. 무대에서 연기할 배우들이 이런 감정을 직접 느껴보면 좋겠다, 연기하는 데 도움이 되겠다고 감히 생각했다.

충분한 고민 없이 진행된 훈련의 결과는 참담했다. "여기까지 합시다-", 말을 꺼내기 무섭게 배우 한 명이 소리를 지르며 연습실을 뛰쳐나갔다. 나는 보았고, 그들은 느꼈다. 불이 꺼진 연습실에서 눈을 가리고 30분여를 있었다. 나는 훈련을 지켜봤고, 그들은 '재난'을 겪었다. 나는 "이 정도는 괜찮겠지" 싶어 상황을 극한까지 밀어붙였고, 죽음의 공포는 "가만히 있었던" 그들에게 손쓸 도리 없이 들이닥쳤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연습은 중단됐다. 나는 거듭 사과할 수밖에 없었다. 풋내기 아마추어 연출가 주제에 너무나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만 들었다. 훈련이란 이름으로 행해진 학대였다. 뛰쳐나갔던 배우는 다시 연습실에 돌아와서도 숨을 고르지 못했다. 한참 뒤에야 입을 뗐다. "너무, 너무 무서웠다. 나중에는 그냥 포기했다. 이제 죽는구나, 라는 생각밖에 없었다."

고스란히 지켜본 이들의 책임

2003년의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를 다룬 연극. 무대에 오른 지 올해로 꼭 10년째다.
▲ 연극 <안심발 망각행> 포스터(2004년) 2003년의 대구지하철 화재참사를 다룬 연극. 무대에 오른 지 올해로 꼭 10년째다.
ⓒ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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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도 허무하게 떠나간 이들 생각에 머릿속이 터질 듯했다. 출항하지 말았어야 했던 배와 함께 사라진 아이들이, 제대로 준비되지 못한 훈련 도중 숨진 특전사 대원들이, 누구의 도움도 받지 못하고 죽어간 '송파 세 모녀'가 떠올랐다. 살아남은 우리는, 그들이 느꼈을 두려움과 절망을 이해하기는커녕 감히 상상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엄습했다.

이제서야, 모두가 '안전한 대한민국'을 외친다. 앞으로 두 번 다시 우리 곁의 이웃들을 허망하게 떠나보내선 안 된다는 당연한 반성이다. 오늘로 이틀째인 국정감사에서도 어김없이 '안전불감증'이 뭇매를 맞고 있다. 으레 그러하듯 국민들은 비난하고, 책임자들은 개선을 약속하고 있다. 하지만 당장 내년부터 국가가 '개조'되리라 믿는 이들은 많지 않아 보인다.

대한민국 사회가 튼튼한 법과 제도를 세움으로써 안전한 사회로 거듭나길 간절히 바란다. 법과 제도가 기둥이라면,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능력은 이 기둥이 단단히 뿌리박아야 하는 토양이다. 좋은 토양은 오랫동안 누적되는 것이다. 배우들의 안전을 책임지지 못한 연출가인 나 역시 '안전불감증'을 앓고 있었다. 우리에게는 체계적이고 점진적인 훈련이 필요하다.

덧붙이는 글 |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연극을 처음 시작하면서 가졌던 마음가짐입니다. 멀고 험한 길이겠지요.
다함께, 손 잡고 걸어갑시다.



태그:#세월호, #연극, #배우훈련, #안전한 대한민국,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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