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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상하 금속노조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 대외협력부장
 최상하 금속노조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 대외협력부장
ⓒ 최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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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을 나서니 비가 내리고 있었다. 태풍은 비껴갔다고 하나 여전히 불안한 날씨다. 우산을 가지고 나오지 않은 터라 다시 집으로 돌아갈까 말까를 잠시 망설이다가 그냥 비를 맞고 걸었다. 약속 장소까지는 약 10분 걸리는 길. 비를 맞고 걷기에는 멀다면 먼 길이겠지만 삶에는 늘 예상 밖의 일들이 벌어지기 마련이다.

최상하. 올해 마흔한 살의 노동자.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그는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공장에서 해고된 노동자다. 그에게도 지금의 삶은 예상 밖의 길이었다. 고향 대구에서 빵 공장을 다니다가 2002년에 친구 따라 울산으로 왔다. 20대에 울산에 와서 이제 마흔을 넘겨 버린 나이이지만 그의 얼굴엔 여전히 막내 특유의 천진한 웃음이 있다.

서울중앙지법은 지난 18일과 19일, 최씨를 비롯한 현대차 사내하청 노동자 1200여 명이 현대차와 사내하청업체를 상대로 낸 근로자지위확인 소송에 대해 "원고들이 현대차에 직접 고용된 근로자임을 확인한다"는 판결을 내렸다. 재판부는 "원고들은 모두 현대차의 파견 근로자이며, 2년 이상 현대차 사업장에서 근무한 사실이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최상하씨는 정규직으로 전환되면 결혼보다도 먼저 고향 부모님께 해고 이후 끊긴 생활비를 보내드리는 일을 먼저 하고 싶단다. 지금 그는 금속노조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에서 대외협력부장을 맡고 있다. 노조활동 하면서부터는 그나마 규칙적인 생활을 하게 되어 몸무게가 많이 늘었다고 한다.

그를 만난 9월 24일. 커피보다는 밥이 그리운 날이다. 때마침 빗소리도 더욱 요란하다. 약속 장소로 정했던 커피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나는 유리문 처마 밑에서 그를 기다렸다. 우리는 근처 막창구이 집으로 들어갔다. 막창 굽는 소리가 자잘자잘 빗소리처럼 들리는 집에서 우리의 이야기는 시작되었다.

"신차 나오면 비정규직 잘린다"

- 판결을 받고 나서 제일 먼저 어떤 생각이 들었나?
"나야 뭐,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최병승(2010년 대법원에서 불법파견 판결을 받은 현대자동차 사내하청 노동자) 동지랑 같은 업체에서 일했고, 그때 최병승이 B조라면 내가 A조이고 같은 공정이니까 (이번 재판도) 당연히 승소할 거라고 기대는 했다. 그런데 사실 컨베이어 시스템이 아닌 곳에서 일한 사람들은 (승소 판결에 포함되지 않을까봐) 좀 불안은 했다(대법원은 최병승에 대한 판결에서 '컨베이어벨트를 이용한 조립생산 작업에서 정규직과 혼재해 일했다'는 이유로 현대차 정규직임을 확인한 바 있다)."

- 이번 판결에서 생산 공정은 물론이고, 하청업체 노동자들이 하는 모든 일들을 불법파견이라고 판결했다.
"불법파견이란 게, 하청업체가 전혀 독립권이 없다. 현장에서 일을 하면서 노동자들이 임금을 올려 달라 하면 자기들은 '돈이 없다, 원청이 임금을 올려줘야지 올려줄 수 있다'고 하고, 모든 시스템이 원청의 지시에 의해 움직이니까 (법원도) 그렇게 판결을 내린 거다. 업체의 독립된 권한이 없으니 우리는 일을 하면서도 늘 (하청업체의 모든 업무가) 불법파견이라고 생각했다."

- 현대자동차 하청업체에는 언제 입사했나?
"2002년에 입사해 가지고, ABS 브레이크 장착하는 일을 했다. 처음엔 지원반으로 나가서 여러 군데서 잠깐씩 일하다가 나중에 (하청)업체에 입사하게 되었다. 지원반은 정규직들이 월차를 쓰거나 할 때 빠지는 자리에 나가서 대체로 일하는 반이다."

현대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약 4년 동안 벌여온 법정 싸움에서 승리했다. 18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41부는 현대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라며 사측이 이들을 직접 고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현대차 사내하청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약 4년 동안 벌여온 법정 싸움에서 승리했다. 18일 서울중앙지방법원 민사합의41부는 현대차 사내하청은 불법파견이라며 사측이 이들을 직접 고용해야 할 의무가 있다고 판단했다.
ⓒ 박소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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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조 가입은 언제 했나?
"처음엔 노조에 좀 반대였다. 그 전에 직장 다닐 때 노조가 있긴 있었는데 완전 식물노조였으니까. 하는 거 보면, 진짜 회사에 붙어가지고 아무것도 안 하니까. 그래서 이번에도 노조에 가입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다가, 신차가 나오면서 가입했다. 신차가 나오면 비정규직이 자꾸 잘리니까. 노조 가입은 2005년에 했는데, 그 전에 엑센트가 단종되고 베르나가 나오면서 (비정규직이) 많이 해고가 되었다.

근데 그 전에 내가 최병승하고 같은 공정에 있었기 때문에 의견이 맞아가지고, 이미 노조 가입에 대한 분위기가 있었다. 또 우리가 착취당한다는 것도 알고, (다른 사람들이) 해고되는 것도 보고, 현장에서 이런 것에 대해 활동도 하고 있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노조에 가입하게 되었다."

- 신차가 나오면 비정규직이 잘린다고?
"그렇다. 신차가 나오면 비정규직이 잘린다. 왜 그러냐면 신차 부품을 아예 바깥(하청업체)에서 조립해서 들어오기도 하고, (신차에 맞는 새로운) 기계를 들여오면서 사람이 필요 없어지기도 하고, 차 만드는 공정에 들어가는 사람 수가 줄어들면 또 잘리기도 한다. 그 당시는 해고되는 사람이 엄청 많았다."

- 노조에 가입하고는 어떤 변화가 있었나?
"뭐, 노조에 가입했다고 갑자기 달라진다기보다는 내가 어떻게 하는지에 달렸다고 생각한다. 노조에 가입했다고 갑자기 회사가 자를 수도 없는 거고, 또 노조가 고용이나 이런 걸 다 막아줄 수도(지켜줄 수도) 없다."

"일단은 이겼으니 한시름 놓았다는 느낌"

- 어쩌다가 해고는 당한 건가?
"2010년 7월 최병승이 불법파견이라는 대법판결 받고 그 이후 11월에 시트 공장에 있던 (사내하청업체) 동성기업이 폐업을 했다. 근데 동성기업 (비정규직 노조) 조합원들이 '대법원 판결났으면 우리는 정규직인데 왜 업체가 폐업을 해야 하나' 그러다가 공장을 점거했다. 그때 동성기업 조합원들이 얻어터지고 관리자들한테 끌려 나가고 맞고, 그게 발단이 되어서 다른 공장에서도 점거투쟁이 벌어졌다. 나는 1공장에서 같이 점거투쟁을 했는데, 그 일로 해고가 되었다."

- 부모님이 걱정이 많으시겠다.
"처음 해고되고는 계속 부모님이 있는 대구로 오라고 했다. 대구에 와서 일자리 구하면 되지 않느냐고. 그래도 가지 않았다. 해고되기 전에는 부모님께 매달 돈을 보내드렸는데 2011년부터는 돈을 보내드리지 못해 그게 맘에 많이 걸린다."

- 이번 판결을 부모님도 아시는가?
"알고는 있다.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1심에서 이겼으면 끝난 거 아니냐'고, '이제 정규직이 되었구나' 이렇게 이야기한다. (회사가 정규직화 판결을) 그렇게 바로 들어줄 것 같으면 이렇게 길게 오지도 않았다(24일 현대차는 이번 판결에 대해 항소하겠다고 밝혔다)."

- 정규직 전환까지는 시간이 더 걸린다는 걸 부모님도 알고 있나?
"이야긴 했다. 우리가 법에서 이겼다 하더라도 회사는 돈을 들여서 또 항소를 할 것이라고. 그러면 (부모님은) '법정에서 이겼으면 회사는 빨리 들어줄 것이지, 와 그라노' 하신다."

- 정규직 전환까지 여전히 갈 길이 멀지만, 판결 후 좀 가까이 왔다는 생각은 드나?
"한시름 놓았다는 느낌. 만약 1심에서 졌으면 어쨌을까 싶지만, 일단은 이겼으니 한시름 놓았다는 느낌은 든다."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업체에 소속돼 일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현대차와 사내하청업체들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일부승소 판결이 난 뒤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정창근 부장판사)는 "원고들이 현대차에 직접 고용된 근로자임을 확인한다"며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18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초동 서울중앙지법에서 현대자동차 사내하청업체에 소속돼 일하던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현대차와 사내하청업체들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일부승소 판결이 난 뒤 기쁨의 눈물을 흘리고 있다. 서울중앙지법 민사합의41부(정창근 부장판사)는 "원고들이 현대차에 직접 고용된 근로자임을 확인한다"며 원고 일부 승소로 판결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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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금뿐만 아니라 인간적인 모멸감과 차별도 많이 당하지 않았나. 이번 판결이 그런 아픔에 대한 어느 정도의 보상은 되었는가?
"판결은 판결일 뿐이다. 회사가 이 판결을 따라 정규직 전환을 해야 하는데, 그때서야 (보상받았다는 마음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정말 정규직 되어 작업복 입고 공장에 들어가 봐야 실감할 수 있을 것 같다."

- 이 정도까지 왔으면 회사가 수용을 해야 하는 게 아닌가.
"회사는 (비정규직을 정규직화하지 않고) 신규채용을 하면서 계속 지회(금속노조 현대자동차비정규직지회)를 깨기 위해, 조합원들끼리 갈라지게 하기 위해 그렇게 해왔다."

"노조 가입 문의 많아... 아직 갈 길 멀다"

- 지금 현장의 분위기는 어떤가?
"노동조합 가입에 대한 문의가 많이 들어온다. 워낙 언론에도 많이 나오고 하니까 소송에 참여하려는 비조합원들의 가입문의가 늘고 있다."

- 비조합원들은 이전에는 왜 소송에 참여하지 않았나?
"판결 전에는 불안했을 거다. 최병승 동지만 해도 판결을 받기까지 거의 10년이 걸리지 않았나. 우리는 대법원 판결까지 가기 전에 싸워서 정규직으로 전환시키려고 했다. 지금 단순히 소송을 하려고 조합에 가입하는 것도 문제다. 기존의 조합원들도 좀 더 (적극적으로 정규직 전환에 힘을 모아야 한다)."

- 앞으로 다가올 시간들이 무겁게 느껴질 것 같다.
"그렇다. 부담을 느낀다. 대법원까지 간다 해도 7~8년이 더 걸릴 거고, 또 고등법원이나 대법원에서 판결이 또 어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 비정규직 노동자로 일하고 싸우면서 청춘이 다 흘러갔다. 그동안 정규직 채용 때 응시할 수도 있었을 텐데 왜 가지 않았나?
"납득이 안 되었다. 모든 소송을 포기하고, 기존의 근속연수도 다 인정받지 못한다. (정규직 채용을 한다고 해도) 회사는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만 고용할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법파견이란 건 비정규직 노동자를 정규직으로 '전환'하라는 것이지, 정규직으로 '채용'하라는 게 아니다."

- 비정규직 투쟁 과정에서 류기혁, 박정식, 두 노동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들은 비정규직 투쟁에서 어떤 존재인가?
"이번 판결이 나고 나서는,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줬으면' 하는 맘이 든다. 좋은 일이 있으면 있는 대로, 힘들 때는 힘든 대로, 마음속에서 늘 생각나는 사람들이다."

-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은 무엇인가?
"기존의 조합원들을 조직하고 단련하는 일이다. 아직 우리가 가야 할 길이 너무 멀다."


태그:#현대차, #비정규직, #불법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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