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다. 마당에 감이 채 익지도 않고 떨어진다. 덜 익은 감이 떨어진 감나무에는 홍시 대신 감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했다. 뒤뜰의 자두나무는 빨갛고 탐스러운 자두를 주렁주렁 달고 있다. 우리 가족의 사랑을 듬뿍 받던 시절은 기억에도 없다는 듯 자두나무의 지난 영화가 퇴색 되고 있다. 여름에 극성이던 매미 소리는 간 데 없고 귀뚜라미가 밤잠을 설치게 만든다.

지난날의 영화는 어디에...
▲ 마른잎만 남아 있는 자두나무 지난날의 영화는 어디에...
ⓒ 김경내

관련사진보기


가을이 오면서 무거워지는 마음

벌써 가을이 오고 있다. 아마 이봉조 마라톤 선수도 달리는 초침을 앞지르지는 못할 것이다. 가을! 벌써 가을이라고 한 해의 허리를 훌쩍 넘겨버린 시간에 초조해하는 사람들!

이런 마음속에는 계획을 세워놓고 못 다 이룬 일들 때문에 조급증이 들어있다. 늘어나는 잔주름 때문에 주름 골마다 시름을 담았을 게다. 어떤 이는 '괜히 회한이 들어서'라고 말 할 수도 있겠지만...

왜 시름이 고였다고 하지 않고 '시름을 담았다'고 말하는가? '고였다'는 저절로 생기는 것이고, '담았다'는 스스로 자초한 것이다.

붉은 감과 초록잎의 조화
▲ 감과 감잎 붉은 감과 초록잎의 조화
ⓒ 김경내

관련사진보기


덜익고 떨어진 감을 햇볕에 익히고 있다
▲ 가을의 대표 주자 홍시 덜익고 떨어진 감을 햇볕에 익히고 있다
ⓒ 김경내

관련사진보기


나는 "가다가 중단하면 아니 간 것만 못하다"는 말을 "가다가 중단하면 '갔던 만큼' 아니 간 것만 못하다"는 말로 바꾸어서 가슴 속에 넣어 둔다. 그리고 필요할 때마다 꺼내서 입속으로 중얼거린다. 하던 일에 진척이 없어서 포기하고 싶을 때 내 자신을 다독이는 데 이 말을 쓴다.

만약 가다가 중단하면, 간 것만큼 소비한 시간과 정열은 어디서 찾을 것인가. 가다가 아니다 싶으면 약간의 조정은 필요할 것이다. 그리고 다시 가 봐야하지 않겠는가. 가다가 중단하는 것 역시 조급증 때문이고, 그 조급증은 시름을 불러온다.

지난 여름, 언젠가 수업을 하는데 한 녀석이 느닷없이 질문을 했다.

"선생님, 몇 살이예요?"
"왜?"
"흰 머리가 많아서요."

거울을 봤다. 눈가에 잔주름은 어느새 기본이 됐고, 머리카락마저 희끗희끗하다. 딸아이에게 머리를 들이밀며 흰 머리카락을 뽑으라고 하자 아이는 난감해하며 말했다.

"엄마, 흰 머리카락 다 뽑으면 대머리 되겠는데요!"

창문 밖 먼 곳으로 시선이 돌아갔다. 하늘에 흐르는 구름을 보니 "저것이 다 세월 가는 것이거니" 싶었다. 마음이 서글프고 기분이 가라앉기 시작했다. 별별 회한에 입맛도 없고 사람 만나는 것도, 쇼핑도, 사 놓았던 옷이나 보석을 보는 것도 아무 재미가 없었다. 오로지 드는 생각은, "나는 누구인가? 그동안 무얼 했나? 해 놓은 일은 있는가? 불같은 사랑은 해 봤던가?"

'벌써'보다 '아직'을 생각해야겠다

감잎이 물드는 단계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 감잎이 물드는 과정 감잎이 물드는 단계를 한 눈에 볼 수 있다
ⓒ 김경내

관련사진보기


두어 달 후, 나는 급격히 늙어 있었다. 다른 사람이 돼 있었다. 얼굴색이 우중충하고, 얼굴 표정은 세상 근심 혼자 짊어진 사람 같았다.

문득 정신이 들었다. 우선 집안 대청소를 했다. 경쾌한 음악을 쾅쾅 틀어놓았다. 덮어 뒀던 글머리를 열어보았다. 가닥이 안 잡혔다.

집안 분위기를 밝게 하고 진한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내가 왜 이렇게 됐나"를 생각하기 시작했다. '벌써'에 얽매인 생각 때문이었다.

그때는 미처 몰랐었다. 잔주름과 흰 머리카락은 나에게 지혜와 경험을 선물했다. 마음 상한다고 방황하거나, 이불 뒤집어쓰고 몇 달을 누워 있어도 가족이나 생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될 안정을 가져다줬다. 이 모두가 세월이 내게 준 선물이 아닌가!

이 가을에, 아름다운 가을의 초입에서 나는 깨닫는다. 벌써 가버린, 흔적조차 없는 초침의 소리보다 아직 하지 못한 일과 아직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벌써'보다 '아직'이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까칠한 밤송이 속에 탐스런 알밤이...
▲ 알밤 까칠한 밤송이 속에 탐스런 알밤이...
ⓒ 김경내

관련사진보기




태그:#벌써, #아직, #흰머리카락, #가을, #시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여름에는 시원한 청량제, 겨울에는 따뜻한 화로가 되는 글을 쓰고 싶습니다. 쓴 책 : 김경내 산문집<덧칠하지 말자> 김경내 동시집<난리 날 만하더라고> 김경내 단편 동화집<별이 된 까치밥> e-mail : ok_0926@daum.net 글을 써야 숨을 쉬는 글쟁이!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