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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은 발끝부터 물들어 온다' 표지
ⓒ 안재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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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교포 작가 김은자의 산문집 <슬픔은 발끝부터 물들어 온다>의 표제가 주는 이미지는 얼핏 작가의 '감성'으로 독자의 공감을 소구코자 하는 듯해 보인다. 무릇 책의 이름은 그 책 속에 든 작품들의 성격을 포괄적으로 암시하는 특징이 있다.

그러나 이 책의 경우 자세히 살펴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감성'을 넘은 '형이상학'적 속성까지도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회수필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높은 수필 작품성과 함께 '가족', '친구', 기타 우리 주위의 '일상'적 이야기를 전개해 가면서 전통 수필의 기법을 구사한 이 산문집 <슬픔은 발끝부터 물들어 온다>는 수록 작품 대부분의 면면에서 그런 점들이 관찰되고 있다.

'짧게 나를 스치고 간 새들'(제1부), '오래 된 문을 밀고 들어가며'(제2부), '혼자 닦는 별'(제3부), '발 삔 자리'(제4부), '편지 속의 먼지들'(제5부), '이상한 유추類推'(제6부) 등 여섯 부에 걸쳐 총 예순 작품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는 특히 '엄마의 강', '오빠가 없는 사이', '잃어버린 첼로', '칼 갈아주는 남자', '아버지' 등 가족사와 가족 관련 이야기들, '손手', '발足', '젖의 행방', '입술', '안경을 쓰며', '눈과 코와 입의 트라이앵글', '갈비뼈, 24개의 스트링' 등 인체에 대한 사유들, '징', '숲', '별', '문', '똥', '껌', '침', '봄', '거미', '숭례문의 마지막 인사', '농사짓는 마음', '블루 샌프란시스코', '알로하, 빛나고 큰집', '사각의 계절에', '늦가을에서 초겨울까지' 등 주변 사물 등으로부터 받은 작가의 특별한 인상이 작품으로 잘 승화되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들 소재들이 우리 주변의 보편적 사물 또는 누구나 겪는 일상생활의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그 내용은 결코 평범하지가 않다는 점이다. 다시 말하면 누구나 다 알거나 비슷함 그 자체인 '평범'의 '비범'화(化), 동면하고 있는 동물을 누군가가 놀래게 하여 깨우듯 '일상'의 '비(非)일상'화(化), 권태로움과 동격이랄 수 있는 '무료'의 '흥미'화(化) 등으로 그 성향을 압축할 수 있다.

이 책에선 일반 독자 입장에서 바라볼 때 각 작품들이 갖는 제목만으로는 눈길을 쏟기 어려울지도 모른다(몇 작품을 제외하곤). 그러나 어느 작품이든 한 작품만이라도 읽기 시작하면 그 작품은 물론 다른 작품들까지도 처음부터 끝까지 읽고 싶은 충동이 일지 않을까 싶다. 그것은 작가의 개성적 사유와 이야기를 신선하게 풀어내는 독특한 방식에 기인된다고 할 수 있다.

수필이든 시든 소설이든 문학작품은 물론이고 칼럼, 서간문 등 모름지기 글이란 '감동' 내지 '심도 깊은 공감'이 최고의 가치일 것이다.

'시문학'지(誌) 신인상 수상과 미주 중앙일보 신춘문예 당선 등을 통해 등단한 이후 시집 <외발노루의 춤> <붉은 작업실> 출간과 재외동포문학상(시) 대상, 윤동주해외동포문학상, 미주동포문학상, 경희해외동포문학상 환태평양영화제 최우수 시나리오상 수상, 영화진흥공사 시나리오 공모 당선 등 굵직한 문학상들까지 거머쥔 바 있는 김은자 작가가 보여주는 이 책 속의 수필 예순 편 역시 그런 점을 증명이나 하듯 매 작품들이 '꽃 보다 수필' 같은 아름다움을 발현하고 있다.

그 옛날 나의 어머니는 오빠의 그림붓을 꺾고 기타와 전축을 부수며 큰 아들이 공부의 길로 가기를 소원하셨다. 그런 날이면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강가를 찾으셨다. 강물을 바라보는 어머니의 눈에 깊은 슬픔이 깃들어 있었다. (중략) 그랬다! 언젠가 부터 아들은 한국말을 쓰려고 무던히도 노력했다. 미국에서 태어나 자란 그 아이에게는 참으로 힘든 일이었지만 아들은 내가 무심코 한 언행이 가슴에 박혀 버렸던 것이다. 그 이후 아들은 한글을 혼자 공부해왔고 성장해서는 틈틈이 한국 문학 책등을 읽고 질문을 해와 나를 놀래키곤 했었다. (중략) "엄마! 좋은 글 많이 쓰세요. 저는 알아요. 엄마가 글 쓸 때 가장 행복해 하신다는걸 ……." 아들의 뺨에 얼굴을 대는 순간 아들아이의 수염이 유난히도 쓰리게 얼굴을 파고들었다. 신문에서 오린 나의 글들이 벽에서 나를 보고 웃고 있었다. "그래, 또 보자. I love you!" "저두요 ……." 돌아오는 길, 나는 내가 생각했던 엄마의 강과 아들이 생각하는 엄마의 강을 떠올렸다. 두 강은 모두 사랑이라는 이름의 강이었다.  ― '엄마의 강' 부분

'엄마의 강'에서 김은자 작가는 가족 비화를 거침없이 진술하면서 구성원 간의 갈등과 사랑을 엿볼 수 있게 한다. 단순한 상황 전개가 아닌 '뭉클'한 느낌 하나 와 닿게 한다. 이 작품과 같이 '오빠가 없는 사이', '잃어버린 첼로', '칼 갈아주는 남자', '아버지' 등 다수의 작품에서 관찰되듯 가족사나 가족 이야기를 참으로 '진솔'하면서도 '느낌' 강하게 풀어내는 점이 김은자 작가의 개성이다. 

첼로를 구입한 그 해 겨울, 남편은 낡은 코트로 겨울을 지냈다. 유난히도 추웠던 날씨에 오래된 자동차가 속을 썩여 달래고 달래가며 가까스로 겨울을 보낸 터였다. 그렇게 해서 사준 첼로를 슬플 때면 끌어안고 울던 딸이 그날은 나를 끌어안고 흐느껴 울었다. "엄마! 됐어요. 괜찮다니까요 ……" 하면서 내 오른쪽 어깨를 흥건히 적셔 놓았다. (중략) 첼로를 잃어버리고 난 뒤 가족의 방황이 시작되었다. 딸아이의 첼로는 이민 생활을 통틀어 남편과 나의 위로이자 희망이었다. 나와 남편은 마치 사랑의 열병을 앓다가 이별한 사람 같았다. (중략) 뒷마당 마로니에 나무에 잎이 노랗게 물들기 시작하던 그 해 가을, 우리는 다시 딸의 첼로를 구입하게 되었다.. 아픔을 지난 후 딸의 연주는 저음의 소리가 더욱 깊어져 있었다. ― '잃어버린 첼로' 부분

생전 아버님은 친구들을 만날 때도 손자 손녀를 데리고 다니셨다. 부모의 빈자리를 늘 지켜 주신 것이다. 아, 어둠 속에서 빛나던 눈동자 ……. 나는 그 눈동자를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중략) 공원 분위기에 위험을 직감하신 아버님은 손녀를 가슴에 품고 숲 속에 숨어 있었던 것이다. 경품으로 탄 TV와 유모차는 숲 속에 쓰러져 있었다. (중략) 아내를 먼저 보내고 우리와 함께 사셨던 시아버님은 얼마나 외로우셨을까? 우리가 아무리 노력했다 한들 돌아가신 어머님의 빈자리를 반도 채워주지 못했을 것이다. (중략) 가르치지도 않았는데 아이들은 나와 남편이 무거운 짐을 들고 집에 오면 문 앞까지 뛰어나와 부모 손에 들려있는 짐들을 쏜살 같이 받아 쥔다. 생전 할아버지에게 부모가 하는 것을 자연스레 본 것이다. 나는 그것이 내가 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것은 시아버님과 함께 산 시간으로 얻은 빛나는 것들이었다. ― 'Grand Father's Autumn Leaves' 부분

'잃어버린 첼로'와 'Grand Father's Autumn Leaves'에서도 가족을 향한 김은자 작가의 축축하고도 따뜻한 마음이 표출되고 있다. 거기서 전해지는 핵(核)은 가족에 대한 이해와 감사의 마음, 즉 '가족애'이다. 그런 거룩한 마음이 충만했기에 아시아계에 대한 인종 차별도 만만치 않은 편인 미국이란 나라에서 김 작가는 아들을 의사로, 딸을 교수로 각각 성장(모두 미국 명문대학 출신)시키는 등 훌륭한 자식농사가 가능했을 것이다.

이 책 속 김은자 작가의 글들에서 눈에 띄게 느껴지는 특징은 '일상성'의 '특별성'화(化) 내지 '평범'의 '비범'화(化)이다. 예컨대 '징', '숲', '별', '문', '똥', '껌', '침', '봄', '거미' 등을 소재(주제)로 써내려간 작품들에서 쉽게 직감할 수 있듯이 소재가 우리 주위에서 아주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다보니, 그 내용 또한 어디서 많이 듣던 이야기쯤이겠지 하는 편견에 사로잡힐 수 있겠지만, 막상 읽어보면 그렇지가 않다. 작품 한 편 한 편의 문장과 서술방식이 결코 만만치 않음을 금세 느낄 수 있다.

소리가 산을 넘고 강을 건너는 것은 떨림의 이유이리라. 징은 떨림 외에 다른 언어를 모르는 악기다. 떨림으로 울음을 익혔다가 때가되면 제 몸을 불태우며 더 먼 곳을 향하여 새처럼 날아간다. ― '징' 부분

일어난 자 앞에서 쓰러진 자가 부끄럽지 않은 곳이 있다. 산 것 옆에서 죽은 것들이 말을 하는 곳이 있다. 나무와 나무가 모여 맑은 언어를 내 뿜는 곳. 모양은 달라도 어우러져 하나의 그림을 그리는 청정지역 그곳에서는 누구 하나 튀는 자가 없다. ― '숲' 부분

먼지가 소멸되어 환하게 열리는 밤, 별의 너머에 귀를 기울여 본다. 저 눈부신 나라에도 사랑이 존재할까? 허리를 있는 데로 굽혀 어둔 곳에 등을 내거는 별 아래로 이국이 소리 없이 깊어지는 밤이다. ― '별' 부분

문(Door)과 문(Moon)에 대한 전설을 홀로 만들어 본다. 문(Door)이 사람의 문이라면 문(Moon)은 자연의 문이다. 문(door)이 마음이라면 문(Moon)은 밤이다. 마음이 열리면 사람이 보이고 밤이 열리면 아침이 오는 것처럼 문은 묻고(問) 듣는(聞)것이다. 무늬(紋)처럼 얽혀(紊) 하나의 문장으로 이어지는 것, 그대서 단아한 글(文)로 되는 것이 문(門)이다. ― 문(門) 부분

이상과 같이 예시한 몇 작품들 외에도 이 책 속의 한 편 한 편을 예사로이 보아 넘길 수 없다는 사실이 평(評)자 혼자만의 느낌일까?

'꽃이 아름답다'는 것이 '시각'으로 전달되는 1차원적 감각이라면 '글에서 신선함을 느끼고 감동을 얻는다'는 것은 '지각'으로 전달되는 2차원 내지 3차원적 감각이 아닐까 한다.

인간은 일반적으로 '지적' 내지 '형이상학적'인 것에 다른 어떤 감각보다 더 높은 가치를 두는 편이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아름다운 존재는 '사물(자연) 그대로의 꽃'이겠지만, '감동' 또는 '의식에 신선한 자극'을 가해주는 글은 '지각적 꽃'이 아닐까 한다.

이 책 속에 든 김은자 작가의 많은 수필 작품들에서 읽다 보면 '꽃'이 오버랩 되곤 한다. 종이에 박힌 단순한 문자와 문장들에서 '꽃'보다 더 귀하고 아름다운 그 무언가가 진하게 파생되면서 뇌리로 쏟아져 들어오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태그:#김은자, #산문, #수필, #슬픔, #발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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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수필가/문학평론가 △연세대 행정대학원 언론홍보전공 석사. 고려대 언론대학원 최고위과정, 서울대 국제대학원 최고경영자과정 수료 △한국문인협회 홍보위원. 한국현대시인협회 중앙위원·홍보위원회부위원장. △ http://www.goodpoet.com △ poet@hanmail.net △ 010-5151-1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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