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날 들른 바닷가. 대가족인지, 계모임인지 수십 명의 사람들이 한참 신나서 놀이마당을 펼친다. 노래방 기계의 반주가 울려 퍼지고,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건 트로트다. 한 번도 불러 본 적이 없어도, 딱히 들으려고 노력한 적이 없어도 익히 알 수 있는 그 노래들.

그 노래를 듣던 아이가 말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어딜 가나 노래만 부르면 결국 트로트구나'라고. 그렇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노래방을 가면, 결국은 흥이 오를 즈음에 한껏 편하게 불러 젖히는 건 결국 '트로트'다.
 8일 방영된 SBS <힐링캠프-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한 가수 이미자

8일 방영된 SBS <힐링캠프-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한 가수 이미자 ⓒ SBS


8일 방영된 SBS <힐링캠프-기쁘지 아니한가>(이하 <힐링캠프>)에 바로 이 '트로트'만 55년을 부른 이미자가 출연했다. 토크 한 소절에, 노래 한 소절이 곁들여진 이날 방송에서 정말 모처럼 이미자의 목소리로 듣는 '동백 아가씨'나 '섬마을 선생님'은 새로웠다. '왜색이 짙다'는 이유로 방송 금지곡이 되어 내 어머니의 흥얼거림으로나 익숙했던 그 노래를 저렇게 들으니, 괜히 감개가 무량하기도 했다. 나이가 들어서일까. 그 어느 때 보다, 이미자의 노래가 흘러간 추억처럼 들척지근하다.

이미자의 노래 인생 50년을 추억하는 노래, '나의 노래'로 시작한 <힐링캠프>는 그에게 '엘레지의 여왕'이라는 말 대신 '미스터리의 여왕'이라는 칭호를 부여하며 55년의 노래 인생을 살아온 이미자의 삶을 역추적 했다. 긴 시간만큼 많았던 이미자를 둘러싼 소문들 중 '애교'로 여겨지는 것들이 다시 등장하여, 그것을 통해 '소녀' 이미자가 '국민 가수' 이미자로 성장해 온 인생 역정을 다시 돌아보게 만들었다.

노래자랑만 하면 달려가 1등을 했고, 그 상품으로 양은 냄비나 세탁비누 등을 받았다던 소녀의 이야기는 연락을 받기 위해 다방 앞을 전전하거나, 선배 연예인의 머릿속까지 긁어주다 서러워 '주반도주'를 해야 했던 연예인 초년생의 고생담으로 이어졌다. 비록 한 세기도 안 되는 시간의 이야기지만, 이는 다른 세상의 이야기처럼 새록새록 전해졌다.

이 중 노래자랑만 하면 당연히 나가서 1등을 해온 탓에 '2등의 삶'을 이해해야 할 시간이 거의 없었음을 자부심 반, 당연함 반으로 내세우던 이미자의 삶이 아주 소박한 '성실성'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게 된 대목은 아이러니한 반전이었다. 뜨개질을 시작하면 모자를 백 개도 떠내고, 조끼를 칠십 여개도 떠내버리는 진득함이, 바로 '엘레지의 여왕' 이미자를 55년 동안 구성해온 삶의 내력임을 이날 <힐링캠프>는 살짝 엿보게 해주었다.
 8일 방영된 SBS <힐링캠프-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한 가수 이미자

8일 방영된 SBS <힐링캠프-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한 가수 이미자 ⓒ SBS


또한 항상 동료이자 라이벌이었던 패티김의 은퇴에 안타까워하며, '단 한 사람이라도 팬이 자신을 기다린다면 무대에 서야 한다'는 남편의 말을 빌려, 아직 은퇴의 염이 없음을 밝히는 노년의 가수에게서는 무대를 향한 여전한 열정을 읽을 수 있었다. 또 이는 55년을 버티어 온 성실성의 이면에 자리한 '진지함'을 발견하는 순간이기도 했다.

한 번도 애써 배워보지도 않았지만 어린 시절 어른들이 즐겨 듣고, 부르는 것만 보고 자란 것만으로도 '황성 옛터'란 노래가 가끔은 울컥하게 느껴지고, '동백 아가씨'가 정겨워지는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일까. 그가 이제는 그저 어머니가 좋아했던 가수 이미자로 보이지 않는다.  한결 같은 성실성으로 아직도 전성기 못지않은 가창력을 뽐내는 이미자를 보면, 새삼스러운 친근함과 그의 55년을 이해하면서 우러나오는 존경심이 생긴다. 모처럼 추석의 정서가 제대로 되살아난 <힐링캠프>였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이정희 시민기자의 개인블로그(http://5252-jh.tistory.com/)와 미디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게재를 허용합니다.
힐링캠프 이미자 트로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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