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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살던 집에 지하실로 통하는 작은 쪽창문이 있었어요. 제가 네 살 때 쯤, 그 창문에 머리가 들어가는지 궁금했어요. 그래서 머리를 집어넣어 봤죠. 그런 다음 머리를 다시 밖으로 빼려고 하는데, 빠지지 않는 거예요. 얼굴은 어두컴컴한 지하실을 향해있고, 몸은 밖에서 마구 버둥거리고... 구해달라고 외치는 저의 울음소리는 전부 지하실의 어둠 속으로 묻혀버렸어요.

그때 형이 저를 발견하고 달려왔어요. 그리고 동네가 떠나갈 듯이 울기 시작하더라고요. 당시 어린 아이였던 형도 스스로는 어쩌지 못하니까 그랬던 거였죠. 그러자 형의 울음소리를 듣고 어머니가 달려와서 저를 구해주셨어요."

SBS 방송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의 한 장면.
 SBS 방송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의 한 장면.
ⓒ SB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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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동입양·세계 빈곤 아동 구호를 비롯한 선행으로 우리 사회에서 인간사랑 실천의 귀감이 되고 있는 탤런트 차인표. 그는 2012년 SBS 방송 <힐링캠프, 기쁘지 아니한가>에 출연하여 탈북자 강제 북송 반대에 앞장서게 된 계기를 밝혔다.

차인표씨는 중국에서 북송 위기에 놓인 30명의 탈북자들을 북으로 돌려보내는 것은 중국에 있는 수만 명의 탈북자들로부터 희망을 빼앗는 것과 마찬가지인 현실을 강조하면서, 탈북자 강제 북송에 반대하는 것은 이들을 위해 "함께 울어주는 것"이라고 말했다. 

"탈북자들은 얻어맞거나 배가 고파도 하소연할 데가 없어요. 감옥에 갇혀도 변호사를 선임할 돈이 없는 불쌍한 사람들이에요. 그들의 울음은 전부 다 암흑에 묻혀버려요. 형이 저를 위해 울어줬듯이, 탈북자들을 위해 우리가 함께 울어줘야 해요."

함께 울어준다는 것

아이들은 자신을 스스로 보호하지 못하는 우리 사회의 약자이다. 장애 때문에 자신의 고통을 세상에 알리지 못하는 아이들은 '약자 중의 약자'이다.

청각장애인 학교에서 교장과 교사들이 수년 동안 청각장애 아동들을 상대로 성폭행을 저질렀다. 추악한 진실을 세상에 알리려는 노력은 기득권을 빼앗기지 않으려고 똘똘 뭉친 세력의 견고한 장벽에 부딪혀야만 했다. 더욱 어처구니없는 것은 가해자에 대한 처벌마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집행유예로 석방되는 그들의 가벼운 형량이 수화로 통역되는 순간 법정은 청각장애인들이 내는 알 수 없는 울부짖음으로 가득 찼다."

마지막 선고공판이 있던 날의 법정 풍경을 묘사한 신문기사의 한 줄은 공지영 작가의 시선을 사로잡았고, 이후 탄생한 소설 <도가니>와 동명의 영화는 그렇게 묻힐 뻔했던 사건을 우리 사회에 널리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 피해자들과 함께 울어주고 가슴아파한 사회적 공감대는 사건의 재수사를 촉구하는 여론으로 이어졌고, 사건의 실제 배경인 학교는 폐교되었다.

공지영 장편소설 <도가니>
 공지영 장편소설 <도가니>
ⓒ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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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이후에도 제2·제3의 도가니 사건이 신문지면을 장식하는 등 불편한 현실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소설에서 '도가니'로 묘사된 세계가 실제 현실에서 갖는 상징성은 우리를 더욱 불편하게 만든다. 세월호 참사·윤일병 사망 사건·김해 여고생 사망 사건을 비롯하여, 우리 사회의 가장 기본적이고 소중한 가치가 무참히 짓밟히는 사건들이 잇따르고 있다.

이런 사건의 근저에 도사린 생명에 대한 모독과 거짓의 시스템은 우리 사회 도처에 있는 '도가니'의 축소판이다. 눈에 드러난 가해자 몇몇을 '악마'로 단죄하며 처벌하는 것만으로는 뭔가 석연치 않은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인간 사회에서 악을 뿌리 뽑기는 어쩌면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해서 현실에 안주해야 할까? 소설 <도가니>에서 장애아의 인권을 유린한 교장에 맞서 싸우는 인권운동센터 간사 서유진은 번번이 기득권의 장벽에 부딪힌다. 그런 그녀는 "괜한 헛수고 말라"는 충고에 이렇게 대꾸한다.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세상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운다는 서유진의 말은 부패한 현실에 무감각해진 나머지 약자와 함께 울어주는 것마저 잊어버린 무력한 개인이 되지 말자는 작가의 호소일 것이다. 

피해 아동들의 담임선생으로서 서유진과 함께 투쟁하는 강인호. 그는 교장을 옹호하는 세력에 의해 자신의 옛 제자이자 연인이었던 장명희를 자살로 내몬 과거의 치부가 드러난 후에야 죽은 명희에게 사죄를 한다. 명희가 자신의 청각장애인 제자들만큼 앳된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깨닫는 강인호의 모습은, 독자로 하여금 눈앞의 불의에만 분노할 뿐 정작 내 삶의 모순은 모른 척 하지 않았는지 돌아보게 한다.

계란으로 바위치기? 그러나...

개인이 세상에 반기를 들기는 계란으로 바위치기만큼 어렵다고 한다. 하지만 이 말을 핑계로 '세상의 구성원인 나 하나가 변하는 만큼 세상도 변한다'는 진실을 외면하지 말자. 오늘날 우리가 공기처럼 당연하게 누리는 자유와 평등이 오랜 세월 억압과 차별에 대항한 무수한 개인들이 이룬 변화의 선물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자.

언제 올지 모르는 영웅에게 미래를 의탁하지 말고 내가 할 수 있는 실천을 하자. 약자의 고통을 알리고, 그들과 함께 울어주고, 그들의 목소리에 내 목소리를 보태고, 현장에서 뛰는 시민단체와 활동가들을 후원하는 실천들이 우리 아이들에게 부끄럽지 않은 미래를 만들 것이다.

도움의 대상은 결코 인간에 국한되지 않는다. 말을 할 수도 없고, 울부짖음마저 철저히 암흑 속에 묻혀버리는 동물들. '산업'이라는 이름으로 극심한 고통을 당하는 그들 역시 우리가 대변해야 할 약자들이다. 그들의 고통을 소비하는 것을 최대한 줄이고 인도적인 변화를 요구하는 나 하나의 실천이 약자의 슬픔에 좀 더 공감하는 세상을 만든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한국 방문을 맞이하여 생각해본다. 원래부터 우리의 주변에 있었지만, 저 멀리에 있는 성스럽고 추상적인 개념으로만 여겨왔던 교황의 메시지를 우리 삶에 구현하는 방법에 대해.


도가니 (100쇄 기념 특별개정판)

공지영 지음, 창비(2017)


태그:#공지영, #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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