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 13년, 그 해엔 민란이 잦았다. 어질던 개혁군주 정조의 뜻이 꺾인 자리에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외척 가문이 들어앉아 이른바 '세도(勢道)'를 일삼은 지 60년이 돼가던 무렵이었다. 그 사이 세도가의 위세에 밀려 겨우 자리만 보전하던 두 임금을 거쳐, 아비를 따라 유배된 외딴 섬에서 나무나 베며 살던 무지렁이에게 임금의 자리가 돌아가 있었다.

죽은 임금의 6촌 안에 드는 혈족이 없었다고는 하나 왕가의 법도를 어겨가면서까지 아저씨뻘을 데려다 임금으로 앉힌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 농사꾼으로 살았기에 백성의 곤궁한 처지를 모르지 않았다한들 처음부터 그는 백성을 위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임금이었다.

임금이 제 노릇을 못하는 사이 해마다 되풀이되는 가뭄과 물난리에 역병까지 더해져 백성의 삶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져 갔다. 하지만 백성의 고단한 삶을 살펴야 할 관리들은 오히려 그 틈을 타 자신의 잇속을 채우기에 바빴다.

환곡을 악용해 구휼미를 모래와 섞거나 물에 불려 무게를 늘리는가 하면, 법으로 금지된 이자까지 물려 가혹하게 돌려받았다. 관가를 찾아 억울함을 토로하는 백성들에겐 곤장형이 내려지기 일쑤였고 참다 못 해 들고 일어선 이들은 목이 베어져 저잣거리에 내걸리거나 돌아갈 곳을 잃은 채 깊고 깊은 산 속으로 숨어들어야 했다. 조정 관료들은 이들에게 '군도', 즉 '도적떼'란 흉흉한 낙인을 찍어대며 잡아들이는 데만 골몰했다.

결국 그가 즉위한 지 13년째가 되던 해, 수만의 백성이 진주성으로 밀고 들어가 탐관오리들의 목을 벤 진주민란으로부터 전국 각지에서 무려 서른일곱 번의 민란이 잇따랐다. 영화 <군도>(2014)는 바로 그해 임술년의 이야기다.

시대극에 비친 우리 시대 청년들의 굴레

영화는 줄곧 복수를 향해 달려간다. 어미와 누이가 억울하게 목숨을 잃자 가까스로 살아남은 주인공이 힘을 길러 마침내 가해자를 쓰러뜨린다는 익숙한 이야기. 그러나 영화는 이 익숙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다소 엉뚱한 사연을 끼워 넣는데, 주인공인 도치(하정우 분)의 대척점에 선 가해자이자 악인인 조윤(강동원 분)의 가족사가 그것이다.

전라관찰사로 엄청난 부를 쌓은 조문숙의 아들 조윤은 영민한 머리와 날렵한 몸을 타고 났지만 기생에게서 낳은 서자라는 운명의 굴레도 함께 안고 태어났다. 세상을 품을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오로지 서자라는 이유 하나 만으로 열한 살 어린 나이에 아버지로부터 차갑게 버려진 그는 뼈 속까지 사무친 한을 끌어안은 채 결코 이룰 수 없는 욕망을 향해 비뚤어진 길을 가게 된다.

 영화 속 악인으로 등장하는 조윤(강동원 분)

영화 속 악인으로 등장하는 조윤(강동원 분) ⓒ 쇼박스


아마도 영화가 그토록 악인인 조윤에 대한 이해를 구하고자 애를 쓴 데는 모두가 짐작하고도 남을 만한 영화 바깥의 사정이 있었을 테지만, 그 덕에 영화는 어쩌면 사극에서 대수롭지 않게 지나쳤을 '신분의 굴레'라는 부조리를 도드라져 보이도록 했다.

"너희들 중 타고난 운명을 바꾸기 위해 생을 걸어본 자가 있거든 나서거라. 내 그자의 칼이라면 받겠다."

남다른 재주를 타고났지만 운명처럼 주어진 굴레 탓에 결국 비뚤어진 길로 내몰리며 괴로워했던 조윤의 한이 서린 이 한 마디. 아무리 발버둥 쳐봐도 뛰어넘을 수 없던 벽 앞에서 그가 평생 떨칠 수 없었을 절망의 깊이가 고스란히 전해진 대사다.

시대극은 늘 현실을 비추기 마련. 조윤이 떨리는 목소리로 외친 이 말을 들으며 어쩌면 영화가 그의 입을 빌려 오늘날 우리 청년들의 절망스런 처지를 전하려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스쳤다. 19세기 조선사회에서 서자의 낙인을 지우려 발버둥 쳤던 청년 조윤처럼 마치 운명과도 같은 굴레인 가난에서 벗어나보려 애쓰는, 그러나 누군가에겐 흔하디흔한 그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우리 시대 청년들의 처지 말이다. 절망의 깊이가 너무 깊으면 헤어나길 포기하거나 때로 그릇된 길로 들어서게 되는 법. 영화를 보며 우리 시대 청년들이 겪고 있을 좌절이 새삼 안타깝게 다가왔다.

장사치들의 세상과 금융의 세상

영화는 가난하지만 그나마 자기 땅을 부쳐 먹고 살던 백성들이 소작농이나 노비로 전락하는 과정도 꽤나 공들여 설명하고 있다. 관과 손잡은 재력가가 구휼미를 갚지 못한 백성들의 장부를 손에 넣은 뒤 이들에게 갚지 못할 경우 땅을 넘긴다는 조건을 달아 곡식을 빌려주는 식이었다. 물론, 글을 모르는 백성들은 숨겨진 조건에 대해 알지 못한 채 작대기를 그어 계약을 하고, 한 해 뒤 꼼짝없이 땅을 빼앗겨야 했다.

"예로부터 조선은 문을 중시하고 무를 천시하는 나라로 알려졌는데, 나라가 망조라더니 이제는 장사치들의 세상이 오려나봅니다."

조윤이 나주목사와 마주앉아 마치 세상을 한탄하듯 읊조린 이 한 마디에는 문(文)이든 무(武)든 이제 낡은 가치는 뒤로 하고 오로지 장사치의 이치, 즉 이문을 좇아야 한다는 당부가 담겨있다. 언제부턴가 금융의 법칙이 세상 모든 가치와 질서를 무너뜨린 오늘날 우리의 현실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다.

영화는 예나 지금이나 돈이 권력을 등에 업고 힘없는 백성들의 고혈을 짜내는 수법은 다르지 않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다. 빚을 얻을 수밖에 없는 처지로 내몬 뒤 부당한 조건을 숨긴 채 손쉽게 빚을 지도록 하고, 머지않아 가진 것 모두를 빼앗아 오는 수작 말이다. 오늘날 소작농이니 노비니 하는 신분은 사라졌다지만 많은 이들이 눈덩이처럼 불어난 이자에 허덕이면서 열심히 일해 번 돈을 금융회사에 고스란히 바친다는 점에서 봉건시대를 살던 그들의 처지보다 별로 나을 것도 없다.

그러나 민란 없는 '민란의 시대'

영화는 '민란의 시대'라는 부제를 달고 있지만 끝내 민란은 일어나지 않는다. 영화가 절정으로 치닫는 장면에서 땅을 잃고 피눈물을 흘리던 백성들이 농기구를 챙겨들고 관군과 맞서긴 하나 이를 민란이라 부르기엔 민망하다. 영화는 '군도'를 묘사하는 데 신경 쓰느라 정작 '군중'을 어떻게 담아낼지에 대해서는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모양이다.

"뭉치면 백성이고 흩어지면 도적이요."

 영화 속 백성들이 들고 일어서는 장면

영화 속 백성들이 들고 일어서는 장면 ⓒ 쇼박스


우물쭈물하던 백성들은 무리에 숨어있던 '추설'의 지략가 이태기(조진웅 분)의 외침에 마침내 관군을 밀어붙이기 시작하지만 그저 '흩어지지 말고 뭉치라'는 말로 백성의 마음을 오래도록 붙잡아둘 순 없는 노릇이다. 그래서 묵직한 그 어떤 감동을 바랐을 관객들의 기대는 안타깝게도 저 의미 없는 대사와 함께 힘없이 흩어지고 말았다.

용기와 지략에 더해 새로운 세상에 대한 꿈도 함께 나눠가졌을 추설의 무리들이 자신들의 그 꿈을 백성과 함께 나누려 노력했으면 어땠을까. 탐관오리들로부터 거둬들인 양식만이 아니고 말이다. 세상의 변화는 더디지만 그렇게 꿈을 나눌 때에야 비로소 조금씩 이뤄지지 않던가. 영화관을 나오며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았다.  

* 덧글 - 시원하게 깎은 민머리 한쪽으로 불에 그을린 자국이 흉하게 남아있고, 굵게 꺾인 눈썹 아래로 초점이 흐릿하면서도 날카로운 눈매가 늘 위를 향해 치켜 올라가 있어 서늘한 기운을 풍긴다. 밑으로 처진 입가 주위를 막 자란 수염들이 좁고 날렵하게 둘러싸고 있어 어딘가를 향하는지 알 수 없는 울분이 가득해 보인다. 한 마디로 뭔가 일을 낼 것만 같은 얼굴을 한 그가 양손에 짧고 묵직한 도축용 칼을 하나씩 들고 무지막지하게 휘둘러댄다. 이 영화가 만들어낸 인물 '도치'에 대한 나름의 묘사다. 적어도 외모만 놓고 보면 아마도 '도치'는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인물로 기록될 것이다. 조윤이 아닌 도치가.

군도 하정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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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산옆 앞 '기찻길옆골목책방' 책방지기. 서울에서 태어나 줄곧 수도권에서 살다가 2022년 2월 전라북도 익산으로 이사해 지방 소멸의 해법을 찾고 있다. <로컬꽃이 피었습니다>(2021), <슬기로운 뉴 로컬 생활>(2020), <줄리엣과 도시 광부는 어떻게 마을과 사회를 바꿀까>(2019), <나는 시민기자다>(2013)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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