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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9개월 동안 남편(미국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조레탕 장터. 시킴의 수도인 갱톡에 비할 만큼 꽤 큰 규모의 조레탕은 시킴 남부 교통의 중심지이다.
 조레탕 장터. 시킴의 수도인 갱톡에 비할 만큼 꽤 큰 규모의 조레탕은 시킴 남부 교통의 중심지이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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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이 흔히 하는 말 있잖아요. '고작 1달러일 뿐이야.' 저는 이해 못 해요 그 말. 1달러면 있죠, 아침에 테라스에 나가 차 한 잔을 마실 수도 있는 거고, 식사 한 끼도 할 수 있는 돈이에요. 아주 중요하죠."

조지와 마이크, 나와 더스틴을 포함해 10명이 탄 지프는 타시딩의 블루버드 호텔에서 출발해 조레탕으로 가고 있다. 2시간이 걸리는 조레탕까지 이동하는 이유는 하나, 또 다른 이동을 위해서다.

시킴의 수도인 갱톡에 비할 만큼 꽤 큰 규모의 조레탕은 시킴 남부 교통의 중심지이다. 더스틴과 나는 조레탕을 경유해 카카르비타로 간다. 그 또한 이어지는 이동을 위해서다. 국경 도시인 카카르비타에서, 인도를 떠나 네팔로 넘어갈 계획이다.

"인도에서는 가치가 큰 돈이잖아요. 1달러일 뿐인데 뭘 그렇게 신경 쓰냐고 하는 말, 싫어요 정말."

중간에 앉은 중년의 미국 아주머니. 출발할 때부터 옆에 앉은 아저씨를 붙잡고 1달러 타령이다. 1달러. 50루피. 아주머니의 말대로, 인도에서는 미국이나 한국에서보다 그 가치가 훨씬 크다. 1달러로 저녁 한 끼를 해결할 수도 있고 샴푸를 한 통 살 수도 있다. 마음만 먹는다면 사이클 릭샤 한 대를 전세 내 반나절을 타고 다닐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 가치에 대해 몇십 분이고 논할 만큼의 가치가 있는가 하면 그건 또 아니다. 인도에서의 가치가 어떻든, 어쨌거나 1달러는 1달러일 뿐이다. 고작 1달러일 뿐이라는 말은, 1달러의 가치를 폄하한다기보단, 1달러를 잃는다고 해도 상대적으로 부유한 국가에서 온 여행자 개인의 신상엔 큰 피해가 없으니 그만 잊고 넘어가자는 의미가 아닌가.

끝이 없을 것 같던 75km의 시킴 트레킹이 끝났다. 길의 끝엔 더 먼 길이 펼쳐져있다. 우리는 히말라야로 간다.
 끝이 없을 것 같던 75km의 시킴 트레킹이 끝났다. 길의 끝엔 더 먼 길이 펼쳐져있다. 우리는 히말라야로 간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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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분여를 떠들어대던 1달러 문제에 아저씨가 시큰둥하자, 아주머니는 몇 달 전에 참여했다는 인도에서의 투어에 대해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 투어에 500루피(한화 약 1만 원)를 투자했다고요. 500루피면 얼마나 큰 돈이에요? 그런데 지프도 딱 이런 거고, 500루피라는 가격에 걸맞은 서비스가 하나도 없었어요. 끝나고 나서는 팁까지 요구하는데 어처구니가 없어서 정말. 얼마나 실망했던지!"
"…."


처음에는 어느 정도 장단을 맞춰 주던 아저씨도 점점 말이 없어졌다. 아시아, 중동, 아프리카, 안 가본 곳이 없다는 아주머니. 저런 식으로 1달러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계산하듯 여행했다면 무지 피곤했을 텐데. 몇 달 전에 쓴 500루피의 사용 가치에 대해 지금껏 곱씹어 보고 있는 거라면, 무수히 많았을 여행에서의 판단 미스와 좌절은 어떻게 풀어나갔을까.

"시시해, 하나도 특별할 게 없어"

타쉬딩 곰파와 소.
 타쉬딩 곰파와 소.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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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프가 열심히 제 갈 길을 가는 동안, 나는 재잘거리는 아주머니의 말을 머릿속에 주워담고, 아주머니의 논리를 탁구 하듯 맞받아쳤다. 승자는 언제고 나다. 아주머니는 소리 내어 말하고 나는 속으로만 말하니 당연한 결과다. 자꾸 이기기만 하니 이제 슬슬 재미도 없어진다.

하. 난 왜 이러나. 주위의 여행자들을 판단하고 비판하는 게 습관이 되어 버렸다. 사실 내가 아주머니를 욕할 처지는 아닌데. 주위 사람들을 붙잡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떠들지 않는다 뿐이지, 나 역시 손에 쥔 10루피, 50루피를 어떻게 하면 효과적으로 쓸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을, 나도 믿을 수 없을 만큼 긴 시간 동안 한 적이 있지 않은가? 허투루 써버린 100루피에 대해 몇 번이고 곱씹어 보며, 잘했나 잘못했나를 따져 본 적이, 한두 번이 아니지 않은가?

이처럼 치사하고 손쉬운 놀이도 없다. 다른 여행자들을 머릿속에 담고 굴리면서 잘잘못을 하나하나 지적해 주는 일. 도시를 왜 이렇게 빨리 거쳐 가? 너는 여행의 '진정한 맛'을 모르는 거야. 너는 왜 이렇게 게으르고 빈둥거려? 한 도시에 며칠이고 몇 주고 머물러 있으면서 빈둥대기만 할 거면, 여기까지 뭐하러 왔어?

다른 여행자 지적하기 놀이가 지루해졌다 싶으면 비난의 화살은 나에게로 돌아온다. 조금 전까지 다른 여행자들을 비판하기 위해 사용했던 잣대는 나 자신을 비교하는 잣대로 돌변한다.

왜 다른 사람들처럼 낯선 사람을 금세 사귀지 못하는 거지? 한 곳에 더 오래 머물면서, 그 지역을 찬찬히 알아가야 하는 거 아니야? 그저 이동에 이동만 거듭하는 내 여행은 그 안에 어떤 내용이 담겨 있지?

시킴 트레킹 중 만난 풍경
 시킴 트레킹 중 만난 풍경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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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정말 모르겠다. 표현 자체만도 너무나 상투적인, 그 흔한 '나 자신을 찾는 여행'은 어디 있는가? 나 자신을 알게 되는 그 깨달음의 순간은 대체 어디 있는가? 이 여행만 하면 온 인생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 아니었나? 먼 훗날, "제 인생의 전환점은 그때 그 여행이었죠"라고 말할 수 있을 만한 사건은 대체 언제 터지는가?

모두가 이미 찾은 그 순간을 나만 못 찾은 것 같은 초조한 기분. 여행 초기에 있었던 불안함과 초조함이 다시 엄습한다. 시킴을 떠나는 지금, 한 학기의 반을 지내고 중간시험을 기다리는 학생의 기분이다. 지금까지의 나의 여행은 어땠나. 다른 여행자들과 비교했을 때 나는 몇 등 안에 드는가. 중간시험을 망쳤다면 학기말 시험까지 점수를 회복할 여지가 있는가. 그때까지 시간은 얼마나 남았나. 그 시간 동안 점수를 회복하려면 난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여간. 여행을 떠난 지 3개월이 지난 지금, 난 이런 꾸리한 기분이다.

"저 여자 입 좀 다물게 할 수 없냐? 무슨 생각해?"


아무것도 담지 않은 멍한 내 표정을 본 더스틴이 묻는다.

"아무 생각도 안 해."
"거짓말. 무슨 생각하잖아. 무슨 생각해?"
"그냥…. 내가 하는 여행이 별거 없다는 생각."
"또 그러네…. 왜 또, 이번에는 누구 여행이 좋아 보이는데?"
"펠링에서 만난 한국 여자분 있잖아. 친구도 금방 사귀고, 안 가본 데 없이 다 다녔고…. 부러워. 난 여행을 잘못하고 있는 것 같아."
"'잘못'하는 여행이 어딨어. 왜 자꾸 다른 사람들이랑 비교해, 그러지 마. 내가 얘기했잖아. 우리 아빠는 우리가 이렇게 오랫동안 여행한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얼마나 자랑스러워한다고."
"시시해. 하나도 특별할 게 없어."


타쉬딩 곰파의 초르텐(티베트 불교의 불탑).
 타쉬딩 곰파의 초르텐(티베트 불교의 불탑).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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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쉬딩 곰파의 마니석(瑪尼石, 티벳불교의 경전이나 기도문, 진언을 얇고 넙적한 판석이나 크고 작은 바위에 새겨 넣은 것)
 타쉬딩 곰파의 마니석(瑪尼石, 티벳불교의 경전이나 기도문, 진언을 얇고 넙적한 판석이나 크고 작은 바위에 새겨 넣은 것)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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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하다. 특별할 게 없다. 3개월이 지난 지금, 난 무엇을 배웠나. 얼마나 변했나. 이 여행을 하겠다고 엄마를 서운하게 했고, 회사를 그만뒀고, 한국을 떠나왔다. 그럴 가치가 있는 일이었을까.

이러다간 끝이 없다. 자학엔 끝이 없고 답도 없다. 다시 나를 달래자. 어쨌든 네팔로 가야 한다.

'1등 여행자'가 될 이유는 없다

다시 생각해 보자. 가치? 가치 같은 건 잘 모르겠고. 어쨌든 난, 길 위에 있다. 한국을, 일상을 떠나, 지금, 이 길 위에 서 있다. 어제와 오늘에 차이가 없는, 반복되는 일상을 떠나, 한 치 앞을 알 수 없는 생경한 풍경 속에 서 있다 보니, 시간을 가늠하는 기준도 길게 늘어난 듯하다. 어제와 오늘은 같지 않고, 어제 일은 마치 일 주일도 전에 일어난 일만 같이 까마득하다.

느리게 걸어온 길을 따라, 느리게 변해온 것도 같다. 이 여행이 가치가 있는 일일까에 대한 결론을 내기 전에 떠나온 것 자체가 나에게는 변화다. 말만 많고 행동이 없었던, 생각이 너무 많아 그 생각을 말로 옮겨내는 것조차 힘들었던 내가, 이 길 위를 걷고 있다는 것 자체가 변화다.

내가 치른 값에 상응하는 무언가를 얻어내야 한다는 지금의 초조함은, 여행 초기의 그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계획한 대로 일이 풀리지 않아 짜증을 내는 일도 잦아들었다. 전 우주가 나를 위해 돌아가지 않는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달았다. 계획은 계획일 뿐, 세상은 인과 관계없이, 느닷없이, 그렇게 뻔뻔하게 굴러간다는 걸, 이젠 안다.

어쩌면 여행한다는 건, 경험한다는 건. 나를 이해하고, 그러므로 인해 타인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사려 깊지 못한 나의 행동이 누군가에겐 폭력일 수 있음을 깨닫는 일. 이 세상에는 공존해야 하는 무수히 많고 다양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 일이다.

끔찍하게 가난한 사람들을 보며, 더 많이 가진 우리에게 기꺼이 베푸는 사람들을 보며, 나와 생김새도, 문화도 다른 타인을 접하며, 내가 지금껏 생각해 보지 못했던, 생각해보려 하지도 않았던 수많은 타인과 그들의 삶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나를 봤다. 책임지기 싫어하고, 수동적이고,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고, 이기적이고 위선적인. 생각해 보지 않은, 알지 못했던 나의 못생긴 면면들을 들여다봤다. 딱 그만큼, 내 세계도 넓어졌다.


어쩌면 여행한다는 건, 경험한다는 건. 나를 이해하고, 그러므로 인해 타인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사려 깊지 못한 나의 행동이 누군가에겐 폭력일 수 있음을 깨닫는 일. 이 세상에는 공존해야 하는 무수히 많고 다양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 일이다.
 어쩌면 여행한다는 건, 경험한다는 건. 나를 이해하고, 그러므로 인해 타인을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려는 노력이다. 사려 깊지 못한 나의 행동이 누군가에겐 폭력일 수 있음을 깨닫는 일. 이 세상에는 공존해야 하는 무수히 많고 다양한 것들이 존재한다는 걸 깨닫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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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시하고 특별할게 없다고 느끼는 건, 내가 나를 누군가와 비교하고 있기 때문이겠지. 비교하고 있다는 건, 내가 많이 강하지 못하단 뜻이겠지. 나의 자아는 너무 작아, 아직 더 많이 배우고 성장해야 하지만, 그 성장의 끝에 가서 세상 누구와 비교해 1등이 될 필요는 없는 일이다.

원하는 무언가를 한다는 게, 1등이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닐 터다. 여행도 그럴 것이다. 나는 나의 여행을 하면 그만이다. 느리게 걸어왔고 느리게 배우고 있지만, 어쨌건 난 내가 갇혀 있던 작은 세계보다 더 넓은 세계를 보고 있고 더 많은 타인에 대해 생각하고 있지 않나.

1등 여행자가 될 이유는 없다. 다른 여행자와 비교해 더 많은 나라를 돌아볼 이유도 없고 더 오래 한 도시에 머물 이유도 없다. 돈을 더 아낄 필요도 없고 더 많이 쓸 필요도 없다. 남들과 같을 필요도 없고 남들과 달라야 할 필요도 없다. 다른 사람의 여행을 판단할 이유도 없다. 모두 저마다의 여행을 하고 저마다의 삶을 살며, 조금씩 걷고 조금씩 성장하는 길 위의 사람들이다.

네팔. 히말라야. 하얀 설산. 인도를 기다리는 감정의 대부분이 두려움이었다면, 네팔로 가는 지금 내가 느끼는 건 두려움보다는 기대와 설렘이다. 나는 아주 조금이나마, 내가 걸어가는 길만큼만은, 지금의 나보다 더 많이 겪어내고 살아낼 것이며, 그만큼 자라 있을 것이다.

멀찌감치 보기만 해도 가슴이 울렁대는 그 설산 위를, 나의 두 발로 조금씩 오르며, 그리고 내려오며, 지금껏 상상하지도 못한 세계와 마주할 것이며 상상하지도 못한 나로 자라나 있을 것이다.

네팔로 간다. 약하고 간사하고 못난 나의 자아를 질질 끌고. 저마다의 여행을 하는 여행자들 사이에 섞여, 저마다의 삶을 살아내는 사람들 사이에 섞여, 모자라고 어리지만, 그 나름의 여행을 해내고 있는 나를 풀어놓아 보자. 어쨌건 간에 계속 질문하는 길밖에는 없으니까. 좋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 그렇다면 좋은 삶을 찾기 위한 좋은 여행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 그 질문의 꼬리를 놓지 않는 한, 나는 괜찮을 것이다.

좋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 그렇다면 좋은 삶을 찾기 위한 좋은 여행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 그 질문의 꼬리를 놓지 않는 한, 나는 괜찮을 것이다.
 좋은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 그렇다면 좋은 삶을 찾기 위한 좋은 여행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 그 질문의 꼬리를 놓지 않는 한, 나는 괜찮을 것이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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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시킴, #조레탕, #타쉬딩, #인도, #시킴 트레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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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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