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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전시 사진
▲ 압록강을 건너는 길에 일제의 검색을 받는 한인들 안동독립운동기념관 전시 사진
ⓒ 안동독립운동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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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를 헤치며 달리는 사나이
오늘은 북간도 내일은 몽고 땅
흐르고 또 흘러 부평초 같은 몸
고향땅 떠난 지 그 몇 해런가
석양 하늘 등에 지고 달려가는 독립군아
남아 일생 가는 길은 미련이 없어라

이 노래 <광야를 달리는 독립군>은 1980년대 초 12·12사태와 5·17정변 그리고 5·18광주민주화운동을 거치면서 전두환 군사정권이 들어서는 데에 저항하여 대학생들이 많이 불렀던 저항가요이다. 이제는 세월이 흘러 노랫말만 보고는 음률을 떠올릴 수 없는 사람들이 훨씬 많겠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부르기가 아주 쉬운 노래이다. 윤심덕의 <사의 찬미>에서 멜로디를 따온 까닭이다.

따라서 <광야를 달리는 독립군>은 노랫말과 음률이 서로 겉도는 듯한 느낌을 준다. '남아 일생 가는 길은 미련이 없어라'라는 마지막 구절에 노랫말의 주제가 담겨 있는 만큼 <광야를 달리는 독립군>은 나라와 겨레를 위해 목숨을 내던질 각오를 다짐하는 비장미가 주조를 이루고 있는 반면, <사의 찬미>는 단순한 두 남녀의 정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룡이 이 집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 가족과 더불어 만주로 망명하자 일제는 민족정기를 끊는다며 집 바로 앞에 철길을 놓았다. 임청각은  국가 지정 문화재인 보물 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 임청각 이상룡이 이 집을 팔아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 가족과 더불어 만주로 망명하자 일제는 민족정기를 끊는다며 집 바로 앞에 철길을 놓았다. 임청각은 국가 지정 문화재인 보물 182호로 지정되어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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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심덕이 애인 김우진과 함께 뛰어들어 목숨을 버린 바다에는 현해탄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다. 현(玄)은 '검다'는 뜻이다. 부산과 대마도 사이의 바다는 뱃길로 가보면 정말 물빛이 검다. 검은 빛은 흔히 죽음을 상징한다. 그래서 현해탄이라는 이름은 윤심덕이 죽은 바다의 심상과 기묘한 어울림을 풍겨준다.

나라가 망해가는 1900년대 초반, 고향을 버리고 만주로 떠나간 사람들은 그 먼 거리를 걸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 보물 182호인 안동 임청각에 갈 때마다 <사의 찬미>와 <광야를 달리는 독립군>이 언뜻언뜻 떠오르는 것은 나만의 연상일까? 우리나라의 가장 오래된 민간 주택 중 한 채로, 아직도 70칸이 남아 있는 독립운동 유적 임청각에 서린 비장한 슬픔이 답사자의 가슴을 짓누른다.

공화정 체제를 추구한 독립협회 청년회원들

1907년, 양기탁, 안창호, 이동휘, 신채호, 김구, 이동녕, 박은식, 이회영, 이시영, 이상재, 윤치호 등 독립협회 청년회원들은 비밀결사체 신민회를 조직한다. 독립협회는 입헌군주국을 지향했지만 이들은 공화정 체제를 추구했다. 신민회는 비밀결사체였으므로 당연히 회원끼리도 서로 알지 못하는 점조직으로 이루어졌다.

하지만 신민회는 은밀한 점조직 체계의 비밀결사체였음에도 불구하고 1910년에 들어서는 주요 애국계몽운동가 대부분이 가입하여 전국의 군 단위에까지 지부를 둘 정도로 발전한다. 신민회는 평양 대성학교 등 많은 학교를 세웠고, 나라 밖에도 독립운동 거점 마련을 위해 만주에 신흥무관학교를 세웠다. 신흥무관학교는 '신'민회가 나라를 부'흥'시킨다는 거대한 의미를 담은 이름이었다. 물론 <광야를 달리는 독립군>은 이청천이 신흥무관학교 생도 300여 명을 이끌고 이동할 때에도 비장하게 불려졌다.

안동이 낳은 위대한 독립운동가들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들이다.
▲ 김동삼(왼쪽)과 이상룡 안동이 낳은 위대한 독립운동가들로, 안동독립운동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진들이다.
ⓒ 안동독립운동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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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는 1909년 비밀 간부회의를 열어 독립운동을 위해 만주 망명을 결정한다. 이때 안동의 이상룡도 조상 대대로 살아온 임청각을 팔아 마련한 독립운동 자금을 품고 1911년 1월 5일 안동을 떠난다. 그의 가족들은 걸어서 1월 12일 추풍령 아래에 닿고, 거기서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간다. "머리는 자를 수 있지만 무릎을 꿇을 수는 없다"는 말을 남긴 이상룡은 2월 7일에야 미리 만주로 가족 망명을 한 처남 김대락이 있는 횡도촌에 닿는다.

안동 임청각을 떠나 무려 한 달이나 걷고, 또 기차를 탄 끝에 만주에 당도한 이상룡 가족들은 한겨울 북풍한설이 휘몰아치는 길을 나아가면서 무슨 생각을 하였을까? 비록 바다를 건너지는 않았지만 윤심덕보다도 더욱 짙은 어둠을 그들은 느꼈을 것이다. '오늘은 북간도 내일은 몽고 땅, 흐르고 또 흘러 부평초 같은 몸'이 될 처지가 눈앞에 선연한데, 아무리 독립운동의 의지가 강인했을지라도 망국을 목전에 둔 망명 가족의 마음은 하염없이 처연하였으리라.

우리나라에는 현재 5기의 전탑이 남아 있다. 안동에 3기, 팔공산 자락의 송림사 5층전탑, 여수 신륵사 다층전탑뿐이다. 법흥사터 7층전탑은 국보이고, 나머지들은 모두 보물이다.
▲ 안동 법흥사터 7층 전탑 우리나라에는 현재 5기의 전탑이 남아 있다. 안동에 3기, 팔공산 자락의 송림사 5층전탑, 여수 신륵사 다층전탑뿐이다. 법흥사터 7층전탑은 국보이고, 나머지들은 모두 보물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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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는 이상룡 가족이 만주로 망명하자 그의 집앞에 철길을 놓았다. 민족 정기를 끊겠다는 것이 그들의 의도였다. 임시정부의 국무령을 지내는 등 1932년 병사할 때까지 독립운동에 매진한 이상룡은 비록 철길로 끊긴 임청각 마당일지라도 살아서 다시 광복 조국으로 돌아올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랐겠지만, 그 소망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다.

임청각 문앞에 철길을 놓은 일제

지금 임청각을 찾으면 일제의 철길에 고립무원 처지가 된 거대한 7층 전탑이 외로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어 더욱 마음이 애잔하다.

국보 16호인 이 '안동 법흥사터 7층 전탑'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불과 5기의 전탑 중 하나로, 전탑 중에서 가장 거대한 규모를 뽐낸다. 하지만 임청각과 더불어 이 전탑은 철길에 가로막혀 마치 검은 바다에 홀로 남은 외딴 섬처럼 어둡게 갇혀 있다.

독립운동 유적 임청각 앞의 '법흥사터 7층 전탑', 아직도 일제 잔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의 역사를 꾸짖는 듯 이상룡 선생을 기리며 오늘도 일제의 철길을 내려보며 위풍당당하게 서 있다.


태그:#이상룡, #임청각, #김동삼, #안동독립운동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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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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