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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디 축구장을 연상시키는 벼 육묘장
 잔디 축구장을 연상시키는 벼 육묘장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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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토요일(24일) 군산시 나포면 주곡리 신촌마을 벼 육묘장(하우스)에 들렀다. 잘 다듬어진 잔디 축구장을 연상시키는 하우스 주인은 이 마을 터줏대감(60) 이기홍 이장. 대를 이어 농사를 짓고 있다는 그는 "지난 18일 묘판에 파종해서 사흘 재웠다가 21일 하우스로 옮겨 놓았다"며 "어린 모들이 품 안의 자식처럼 귀엽고 사랑스럽다"고 했다.

하우스에서 자라는 어린 모들을 사랑스러운 눈빛으로 바라보는 이장님 표정에서 첫발을 어렵게 떼는 돌쟁이를 대견스럽게 보며 흡족해하는 부모의 마음이 그려졌다. 그래서 그런지 녹색 카펫을 깔아놓은 것 같은 묘판의 모들이 더욱 풋풋하고 귀엽게 보였다.

손으로 만지기조차 조심스러운 묘판위의 새싹들. 6월 초순에는 가녀린 몸으로 물이 흥건한 논바닥으로 옮겨져 드넓은 십자들녘을 초록으로 물들이며 장관을 이루다가 가을 풍년가 소리와 함께 황금 들녘의 주인공이 될 것을 생각하니 보는 것만으로 풍요가 느껴졌다. 

이기홍 이장네 집 못자리하던 날

신록의 달 5월도 며칠 남지 않았다. 달력이 없던 시절에는 요즘을 '소만'(小滿: 5월 21일~6월 5일) 절기라 했다. 더위가 본격적으로 시작됨을 알리는 소만은 24절기 중 여덟 번째 절기로 만물이 성장하여 풍성해진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사라진 '보릿고개'란 말도 이때를 말하며 내남없이 양식이 떨어져 힘겹게 연명했다.

묘판을 싣고 가는 트랙터와 선거 현수막들.
 묘판을 싣고 가는 트랙터와 선거 현수막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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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기자가 사는 군산시 나포면 농민들 발걸음은 6·4지방선거에 출마한 시도지사 후보들만큼이나 종종걸음이다. 이 마을 저 마을로 못자리(묘판) 만들기 품앗이를 다녀야 하기 때문이다. 조생종 벼(이른 모)들은 진즉 모내기가 시작됐으니 이 사람 저 사람 새벽부터 바쁘기는 매한가지다.

나포면은 5월에 접어들면서 못자리가 시작됐다. 옛날 어른들은 '쌀농사는 묘판을 만들면서 시작된다'고 했다. 못자리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얘기가 되겠다. 그래서 그런지 농법과 농기구가 현대식으로 바뀐 지금도 시골에서는 '못자리는 1년 농사의 절반'이라는 말이 회자되고 있다.

지난 18일(일요일)은 이기홍 이장네 집 못자리하는 날. 볍씨 파종은 어떻게 하는지 보고 싶어 눈을 뜨기 무섭게 달려갔다. 이장네 집까지는 거북이걸음으로 5분 거리. 십자들녘에서 산들바람을 타고 들려오는 이앙기 소리가 농번기임을 말해주는 듯하다. 물이 흥건한 논에서 먹이를 찾아 뒤뚱이며 걷는 왜가리들 모습은 평화 그 자체다.

앞산의 뻐꾸기 울음소리는 한층 맑고 고운 음률로 녹음이 짙어가는 산과 들을 더욱 푸르게 물들인다.

못자리 작업이 한창인 이기홍 이장네집 앞마당
 못자리 작업이 한창인 이기홍 이장네집 앞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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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네 집 앞마당에 들어서자 시골장날 아침처럼 시끌벅적하다. 작업 인원은 모두 15명. 그중 모판을 정리하는 두 아주머니는 성산면(이웃마을)에서 품앗이하러 왔단다. 일에 얼마나 열중인지 낯선 사람이 들어서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기홍 이장이 알아보고 반갑게 맞아준다. 유종록(77), 황인동(68), 김대기(60)씨 등 낯익은 얼굴도 보인다.  

묘판을 컨베이어에 차례로 얹는 아주머니 손길이 재빠르다. 육묘용 자동 파종기가 상토를 깔아주고, 파이프로 물도 뿌려주고, 파종도 알아서 해주고, 동그란 막대가 누르면서 팽팽하게 고루 펴준다. 볍씨를 뿌리고 상토를 골라주는 아주머니 손길에는 정성이 가득. 배가 아프다고 보채는 손자 아랫배를 쓰다듬어주는 외할머니 약손을 떠오르게 한다.

어렸을 때 손으로 파종하는 모습만 보다가 모든 게 기계로 이루어지는 것을 보니 모두가 신기하다.

예전 우리 부모들은 못자리를 앞두고 몸을 정갈히 했다. 상가(喪家) 문상은 금기였다. 부정한 일을 봐도 대문 앞에 불을 피우고 악귀를 태운 후 목욕재계하고 간절한 마음으로 볍씨를 담그고 파종을 했다. 부정한 짓을 하거나 보기만 해도 볍씨가 발아하지 않아 그해 농사를 망친다고 믿었던 것. 그만큼 정성이 깃들어 있었다는 얘기가 되겠다.

신동진벼에 대해 설명하는 이기홍 이장
 신동진벼에 대해 설명하는 이기홍 이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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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홍 이장이 "볍씨 종자는 '신동진벼'"라고 귀띔한다. 2007년 해방 후 처음으로 미국에 수출했던 대한민국 수출 1호 쌀(철새도래지쌀) 품종으로 나포 십자들녘에서 경작을 많이 한단다. "철새도래지쌀로 밥을 지으면 기름기가 자르르 흘러 군침을 돌게 한다"는 그의 쌀 자랑은 사법시험에 합격한 자식을 자랑하는 아버지를 떠오르게 했다.

"요즘에는 농사꾼도 당당히 외화벌이에 나서고 있는데 정부는 항상 푸대접한다"는 푸념에서는 농사꾼으로의 자긍심도 함께 느껴졌다.

볍씨 파종을 마친 모판이 컨베이어를 타고 나오자 한쪽에 차곡차곡 쌓아두었다가 경운기로 옮겨 싣는 청년은 이장의 막내아들이란다. 순간 '나도 저런 아들 하나 있었으면···' 소리가 절로 나온다. 이리저리 오가며 뒷수발을 하던 이장이 다가와 "3남매(1남 2녀) 중 직장에 다니는 막내인데 착하고 성실하다"며 "쉬는 날이어서 도와주고 있다"고 귀띔한다. 

농촌에서 가장 맛있고, 즐거운 간식, 새참을 먹고 있다.
 농촌에서 가장 맛있고, 즐거운 간식, 새참을 먹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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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토 담당인 황인동 아저씨가 "엊저녁에 누구네 집 제사 지냈대?"라고 외치기에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돌리니 마당 한쪽에 새참이 걸쭉하게 차려진다.

새참은 예나 지금이나 농촌에서 가장 즐거운 간식이다. 막걸리와 각종 음료수, 수박, 바나나, 찐 달걀, 묵무침, 돼지고기 수육, 마른오징어 등 간단하면서도 푸짐하다. 색깔도 곱다. 잘 삶아진 수육이 입맛을 당긴다. 수육 한 첨에 김치를 포개 입에 넣으니 돼지고기 특유의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감돈다. 이만한 자리에서 한 잔 순배가 빠질 수 없다.

"조 선생요, 이리 와서 한 잔 허쇼. 내 얼굴도 잘 나오게 찍어주고··· 허허"

유종록 할아버지가 기자를 부르더니 막걸리를 권한다. 마시지는 못하지만 정겹기 그지없다.

이기홍 이장은 이 집이 '쌈터'라고 했다. 60년 전 이곳에서 태어나 학교도 다니고, 지금의 아내(58)와 결혼도 하고, 건넌방에서 첫날밤을 보내고 신혼살림을 시작했단다. 그는 평생 농사꾼으로 살았지만, 부모에게 물려받은 초가집을 아내와 함께 벌어서 새 건물로 중축하고, 자식 셋 건강하게 키워냈으니 대장부 살림살이 이만하면 족하지 무엇을 더 바라겠느냐"고 되물으며 껄껄 웃었다.

이기홍 이장이 태어나 신혼시절 살았다는 바깥채
 이기홍 이장이 태어나 신혼시절 살았다는 바깥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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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신문고뉴스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못자리, #새참, #이기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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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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