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 수정: 21일 오전 11시 29분]

* 이 기사에는 영화의 주요 줄거리가 포함돼 있습니다.

 송승헌, 임지연 주연의 영화 <인간중독>

송승헌, 임지연 주연의 영화 <인간중독> ⓒ 영화 홈페이지


이 영화를 어떻게 말해야 할까?

간명하게 이렇게 말해 보자. 송승헌, 임지연 주연 '포르노'판 <화양영화>라 이름 붙일 수밖에 없는 <인간중독>. 거기서 들려오는 목소리다.

"여자들은 목숨 걸어 자기를 사랑하는 남자가 진짜로 있다고 믿는 걸까? 바보처럼. 그런 남자는 여중생용 로맨스소설에나 나오지 현실엔 없다. 절대로."

때는 미국-베트남전쟁이 한창이던 1969년. 쓰리스타(중장)의 잘나가는 사위로 승승장구하는 젊고 잘생긴 장교가 있다. 점잖고 신사적인 그에겐 거칠 것이 없다. 내조 잘하고 선량한 아내와 보장된 미래. 또래 장교들의 시기와 질투는 그에겐 팔에 붙은 모기의 귀찮음에 불과하다. 사단 교육대장 대령 김진평(송승헌 분). 그러나 이 모든 '안온한 일상'은 그녀가 나타나기 전이었다. 아, 장만옥, 양조위가 출연한 <화양연화>의 향기가.

그녀, 종가흔(임지연 분). 1950년 한국전쟁. 화교 아버지는 '빨갱이 중공군'에 부역했다는 오해를 피해 산으로 숨는다. 그리고 정해진 수순처럼 절명. 바람끼 있던 엄마는 딴 남자 찾아 도망치고, 딸은 아버지의 시체 냄새를 맡으며 한참을 지내다 발견된다. 그리고 입양. 뺀질뺀질한 군인 남편과 '착한 척 하는' 시어머니는 종가흔을 애완견 혹은 젖소처럼 이용한다. 이건, 박찬욱의 <박쥐>와 유사한 설정.

이쯤 되면 주절주절 스토리를 더 나열할 필요도 없다. 김진평과 종가흔의 만남과 불붙은 열정 그리고 파멸에 이르는 뜨거움과 헤어짐까지. 이미 수십 편의 영화를 통해 수백 번을 확인한 지루하고, 뻔하며, 보나마나한 레토릭.

그러나 이런 정도의 이야기는 필요할 수도 있겠다. 이 영화를 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위해. 그래, 이런 거다. <인간중독>에선 전혀 보이지 않지만, 세상을 사는 누구나가 이미 알고 있는 사실.

'남자의 사랑은 뜨겁다. 해도(海圖)가 없던 시절. 무작정 바다를 헤매며 새로운 길을 찾던 그 옛날 스페인 뱃사람처럼 목숨을 건다. 그러나 남자의 사랑은 짧다. 냉장고 밖에 방치한 생선의 부패 속도처럼. 여자의 사랑은 차갑다. 이성적 계산과 합리적 사고가 육체적 열정에 우선한다. 그러나 여자의 사랑은 늦게 오는 만큼 길다. 겨울 이기고 핀 연분홍 매화를 닮았다. 연애가, 세상의 결혼이 불행하다면, 만약 그렇다면. 그건 어쩔 수 없는 '차이' 탓이다. 남녀의.'

<인간중독>이 제대로 된 영화가 되려 했다면, 위의 진술을 돌아봐야 했다.

사랑만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배가 고프니 밥을 먹고, 눈이 부시면 선글라스를 쓰고, 인생이 슬프면 술을 마신다. 그런데 <인간중독>에 등장하는 배우들의 행위에는 '이유'가 보이지 않는다. 핍진성의 부재다. 그 '부재'는 캐릭터를 평면적으로 전락시키고, 극이 치고나갈 앞길을 막는다. 여기에 더해 반전 하나, 의외성 하나 없다. 영화의 1분 후, 아니 10분 후가 훤히 짐작되고 그 짐작은 그대로 적중되는 심심함. 이렇게까지 말하면 너무한 것일까?

 영화 <인간중독>을 지루함과 밋밋함에서 구하는 건 조연들이다.

영화 <인간중독>을 지루함과 밋밋함에서 구하는 건 조연들이다. ⓒ 영화 홈페이지


단 하나, <인간중독>을 그래도 '터무니없는 영화'에서 구하고 있는 건 매끄러운 조연들의 연기력이다. 퇴역 하사관으로, 춤 선생이 되는 유해진과 무언가 '거대한 비밀'을 숨긴 듯 한 월남 파병군인 배성우. 천박하고 한없이 저렴해 보이는 종가흔의 엄마 역할을 맛깔나게 소화한 윤다경(김진평 역을 맡은 송승헌 앞에서 윗도리를 까서 보이는 연기가 그중 압권이다).

이야기가 길어졌다. 가져다 놓고 비교할 바도 아니지만, <화양연화>의 틀에 <박쥐>의 설정을 가져와 만든 '정체불명의 영화' <인간중독>. 엔딩 크레딧이 올라오는 동안 베트 미들러가 불러 유명해진 '로즈(The Rose)'가 극장 가득 울려 퍼진다. 딱 그 순간만은 아까운 돈 내고 재미도 감동도 없는 영화를 본 마음이 풀어져 아래와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영화의 결말에서 극장 안 몇몇 아줌마들이 울었다. 그러나 처녀들은 울지 않았다. 지나온 생이 아줌마들을 '결코 존재할 수 없는 사랑'의 열망에 관해 생각하게 했을 터다. 처녀들은 아직 '그 죽고 죽일 수 있는 사랑'에 관해 알기엔 경험이 일천하겠지. 어떤 면에선 아줌마가 아가씨보다 낭만에 가깝다.

인간중독 임지연 화양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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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꽃> <한국문학을 인터뷰하다> <내겐 너무 이쁜 그녀> <처음 흔들렸다> <안철수냐 문재인이냐>(공저) <서라벌 꽃비 내리던 날> <신라 여자> <아름다운 서약 풍류도와 화랑> <천년왕국 신라 서라벌의 보물들>등의 저자. 경북매일 특집기획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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