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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개월 동안 남편과 인도·네팔·동유럽으로 배낭여행을 다녀왔습니다. 한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여자와 미국에서만 평생 살아온 남자가 같이 여행하며 생긴 일, 또 다른 문화와 사람들을 만나며 겪은 일 등을 풀어내려고 합니다. - 기자 말

펠링 상가촐링 곰파(Sangacheoling Gompa, 불교 사원)의 동승들.
 펠링 상가촐링 곰파(Sangacheoling Gompa, 불교 사원)의 동승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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갱톡 지프 정류소 너머, 안개 사이에 숨어있던 설산의 모습이 맑게 드러났다. 다르질링 타이거 힐에서 처음 마주했었지. 떠오른 태양 아래 하얀 얼굴을 삐쭉 내밀던 칸첸중가. 보일 듯 말 듯, 구름 사이에 숨어 수줍게 제 모습을 감추던 갱톡에서의 모습. 오늘은 그 칸첸중가를 더 가까이 만나러, 펠링으로 간다.

몇 채 안 되는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산 중턱 위에 자리한 곰파(Gompa, 불교 사원). 티베트 전경기와 오색 기도 깃발. 울뚝불뚝 솟은 산. 한적한 산책길. 펠링의 풍경은, 내가 상상했던 시킴에 조금 더 가까운 모습이다.

숙소에 짐을 풀고 1층 식당으로 내려갔다. 식당 한쪽엔 며칠 전 쏭고 호수로 동행했던 프랑스 아주머니가 앉아 있었다. 펠링으로 온 지 3일이 되었지만, 날씨가 좋지 않아 칸첸중가를 제대로 보지 못했다며 아주머니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비가 내렸다. 몇 방울씩 조심스럽게 떨어지던 비는 이내 사정없이 퍼붓기 시작했다.

오후 지프를 타고 온 여행자들이, 비에 젖어 숨을 헐떡이며 호텔로 들어왔다. 각자의 방에 짐을 푼 숙박객들이 하나둘 식당으로 모여들었다. 난로 가에 퍼지는 조곤조곤하고 따스한 대화. 나는 시켜 놓은 시킴 라이스를 꿀떡꿀떡 삼켰다. 따뜻하다. 비가 오니, 내일은 날씨가 좋겠지.

몇 채 안 되는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산 중턱 위에 자리한 곰파(Gompa, 불교 사원). 티베트 전경기와 오색 기도 깃발. 울뚝불뚝 솟은 산. 한적한 산책길. 펠링의 풍경은, 내가 상상했던 시킴에 조금 더 가까운 모습이다.
 몇 채 안 되는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마을. 산 중턱 위에 자리한 곰파(Gompa, 불교 사원). 티베트 전경기와 오색 기도 깃발. 울뚝불뚝 솟은 산. 한적한 산책길. 펠링의 풍경은, 내가 상상했던 시킴에 조금 더 가까운 모습이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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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녘 마주한 칸첸중가, 잠이 확 깬다

후드득. 빗소리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아직 설익은 것 같은 서린 공기에 몸을 뒤척였다. 잠든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더스틴이 내 몸을 흔들어 깨웠다.

"수지, 일어나 봐."
"아 왜. 졸린데 왜."
"칸첸중가가 보여. 지금 안 일어나면 해가 더 높이 떠서 산이 안 보일 거야."
"아, 몰라. 잘 거야. 칸첸중가 너나 먹어. 잘 거야…."
"일어나라니까."

아, 짜증 나. 나는 얼굴을 팍 구기고 일어났다. 그래 어디 한 번 보자. 그 잘난 칸첸중가 얼굴이 얼마나 잘생겼나, 어디 커튼 한 번 젖혀봐라.

"짠."
"와!"

잠이 확 깨는 설산의 모습. 다르질링 타이거 힐에 올라, 관광객 백여 명과 함께 바라본 손톱만한 칸첸중가의 모습과는 비교가 안 된다. 갱톡을 떠날 때 본 말간 모습과도 비교할 수 없다. 새벽의 푸른 하늘을 바탕으로 선, 눈이 시리게 하얀 칸첸중가.

바람의 몸짓이 눈 위에 새겨놓은 자국이, 칸첸중가를 들어 올리고 있는 근육처럼 팽팽하다. 산꼭대기에 바람이 분다. 바람에 눈보라가 인다. 저 눈보라가 수만 년을 인다 한들, 그래서 덮인 눈을 모두 앗아간다 한들, 칸첸중가는 변함없이 저 자리에 하얗게 서 있을 것 같다. 창밖으로 보이는 모습이 성에 안 찬 나는, 한달음에 옥상으로 달려갔다.

펠링 숙소에서 바라본 설산.
 펠링 숙소에서 바라본 설산.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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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패드에서 본 설산
 헬리패드에서 본 설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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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엔 내 차례다.

"당장 나와. 지금 안 나오면 후회해."

부드러운 이불에 엉겨 게으름을 만끽하고 있는 더스틴을 보챘다. 언제 또 날씨가 안 좋아질지 알 수 없다. 우리는 펠링에서 설산이 가장 잘 보인다는 헬리패드(소규모 헬리콥터 이착륙장)로 가기로 했다.

새벽 5시밖에 안 된 탓에, 미명만 밝은 길은 아직 푸르고 어둑하다. 낮에는 죽은 듯 잠만 자다, 밤만 되면 일어나 짖기 시작하는 인도 개들의 습성은 이곳 펠링에서도 마찬가지다.

"워! 워!"

사납게 짖어대는 개들. 개들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이번에는 정말로 달려들어 내 다리를 덥석 물어버릴 것만 같다. 어렸을 때부터 큰 개를 키워 개를 다루는 데 익숙한 더스틴을 방패 삼아 길을 걸었다. 알파 수컷 더스틴의 명령에, 오메가들이 쭈뼛하며 다시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이제는 좀 안전할까. 더스틴 뒤를 쫓아 얼마간을 더 갔다. 마을 경찰서 입구에 앉아있던 개 한 마리가 우리를 감지했다. 달려온다! 더스틴의 경계에도 발길을 멈추지 않는다. 으악! 저리 가!

이제는 정말로 물리는 건가. 찔끔 감은 눈을 가늘게 떴다. 달려든 개의 뒷모습이 보였다. 개는 내 앞으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총총걸음을 걷고 있다. 검은 털 바탕에, 목에는 세로로 긴 하얀 털을 넥타이처럼 두른 개다. 제복을 입고 출동한 보초라도 되는 듯한 모습이다. 앞서 가던 개는 우리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이따금 뒤를 돌아봤다. 너무 멀리 떨어졌다 싶으면 잠시 서서 기다리다,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지면 다시 앞으로 돌아 길을 걸었다. 가는 길 중간중간 한쪽 다리를 번쩍 들어 영역 표시를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이 개는 뭐지. 헬리패드로 가는 길 안내라도 하겠다는 건가?

갑자기 달려든 개 한마리, 사실은 관광안내견?

우리의 표돌이(?)는 정말로, 구불구불한 길을 20분 동안 걸어 헬리패드까지 우리를 안내했다. 그 길의 끝에서, 칸첸중가와 이웃 설산들이 어서 오라는 듯 우리를 지긋이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 이렇게 아름다운 모습이. 사이좋게 어깨동무를 하고, 하얗고 하얗게 늘어선 설산의 무리. 펠링 토박이 표돌이도 그 모습이 새삼 감탄스러운지, 꿈같은 칸첸중가의 하얀 모습을 잠자코 바라봤다.

앞서 가던 개는 우리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이따금 뒤를 돌아봤다. 너무 멀리 떨어졌다 싶으면 잠시 서서 기다리다,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지면 다시 앞으로 돌아 길을 걸었다. 가는 길 중간중간 한쪽 다리를 번쩍 들어 영역 표시를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앞서 가던 개는 우리가 잘 따라오고 있는지 확인이라도 하려는 듯, 이따금 뒤를 돌아봤다. 너무 멀리 떨어졌다 싶으면 잠시 서서 기다리다, 거리가 어느 정도 좁혀지면 다시 앞으로 돌아 길을 걸었다. 가는 길 중간중간 한쪽 다리를 번쩍 들어 영역 표시를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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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돌이도 설산을 배경으로 한 장, 찰칵!
 표돌이도 설산을 배경으로 한 장, 찰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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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 표돌이와 우리의 사이좋은 산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악한 동네 개의 무리가 우리를 향해 짖으며 달려들었다. 3대 1의 싸움! 우리의 의젓한 표돌이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기를 누르기 위해 험하게 짖다, 다가오는 적을 향해 앞발 하이킥! 표돌이의 승리! 기죽은 개들이 꼬리를 내리고 뒤돌아 도망간다. 의젓한 표돌이의 모습에 반한 한 마리만 남아 표돌이 주위를 살살 돈다. 우리는 설산에 여념이 없고 표돌이는 우리를 지키기에 여념이 없다. 표돌이에게 반한 개는 표돌이의 관심을 자신에게로 돌리는 데 여념이 없다.

표돌이는 자기가 지린 오줌 냄새를 맡으며, 다시 마을로 우리를 안내했다. 표돌이가 앉아있던 마을 입구 경찰서에 도착했다. 표돌이는 작별 인사도 없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경찰서로 돌아가 의젓하게 앉았다. 표돌아, 네 정체는 뭐니? 헬리패드 전용 안내견? 별 희한한 개 다 봤다. 가만, 팁을 원했던 건데 너무 눈치 없이 보냈나?

표돌이와 우리의 사이좋은 산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악한 동네 개의 무리가 우리를 향해 짖으며 달려들었다. 3대 1의 싸움! 우리의 의젓한 표돌이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기를 누르기 위해 험하게 짖다, 다가오는 적을 향해 앞발 하이킥! 표돌이의 승리!
 표돌이와 우리의 사이좋은 산책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악한 동네 개의 무리가 우리를 향해 짖으며 달려들었다. 3대 1의 싸움! 우리의 의젓한 표돌이는 조금도 움츠러들지 않는다. 기를 누르기 위해 험하게 짖다, 다가오는 적을 향해 앞발 하이킥! 표돌이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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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리패드에서 본 설산의 풍경
 헬리패드에서 본 설산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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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은 실패, 하지만 순간은 충만

해가 하늘 위로 높이 솟았다. 칸첸중가도 구름 속으로 수줍게 모습을 감췄다. 야채 볶음밥과 달달한 시킴 티로 점심을 양껏 먹고, 기분 좋은 산책에 나섰다. 구불구불 이어진 길. 오르막길이지만, 빽빽이 들어선 나무를 바라보며 쉬엄쉬엄 오르니 많이 힘들지는 않다.

산 중턱에 난 상가촐링 곰파(Sangacheoling Gompa, 불교 사원). 300년이 되었다는 곰파 안에서, 승려들이 줄지어 앉아 염불을 외고 있다. 가에 앉은 어린 동승들이 염불에 맞춰 북을 쳤다. 북을 치던 동승들의 집중이, 우리의 등장에 금세 흐트러졌다. 우리를 흘끔흘끔 엿보며 키득거리던 동승들의 북소리 장단이, 어느새 염불보다는 우리의 발걸음과 더 비슷해져 간다.

산 중턱에 길게 늘어선 티베트 오색 깃발(Tibetan Prayer Flags). 그 깃발이 들어선 언덕에 앉아, 마을을 바라보며 눈을 감았다. 바람에 펄럭이는 오색 깃발의 소리가 동승들의 북 치는 소리에 감겨 평화롭다.

산 중턱에 난 상가촐링 곰파(Sangacheoling Gompa, 불교 사원)에 올랐다. 300년이 되었다는 곰파 안에서, 승려들이 줄지어 앉아 염불을 외고 있다.
 산 중턱에 난 상가촐링 곰파(Sangacheoling Gompa, 불교 사원)에 올랐다. 300년이 되었다는 곰파 안에서, 승려들이 줄지어 앉아 염불을 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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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촐링 곰파 안 교실
 상가촐링 곰파 안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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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하는 방법 알려줄까?"

어설프게 눈을 감고 앉은 나를 발견한 더스틴이 묻는다.

"명상하는 방법이 따로 있어? 그냥 눈 감고 '음~'하면 되는 거 아니야?"
"노노. 그러면 잡생각만 잔뜩 몰려오기 마련이지. 자, 이렇게 양 무릎 위에 손을 올려. 손은 계란을 쥔 듯이 살포시 말고. 눈을 감은 다음 배로 숨을 쉬는 거야. 천천히. 들이마신다. 내쉰다. 주위 소리를 잘 들어. 바람 소리, 깃발 소리, 북소리, 새 소리…. 그 소리에 깊이 빠져들어야 해. 소리를 계속 들으면서, 나와 주위가 하나다. 내가 그것이고 그것이 나다…. 나는 없다…. 마음을 비우면서, '옴~' 하고 탄트라(명상할 때 집중하기 위해 외는 경구)를 외워. 탄트라는 잡생각을 물리치려고 외는 것이기 때문에 아무것이라도 상관없어."

상가촐링 곰파
 상가촐링 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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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가촐링 곰파
 상가촐링 곰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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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호. 이런 건 또 어디서 배웠데. 나는 더스틴이 시키는 대로, 배로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내쉬었다. 들이마신다. 내쉰다. 들이마신다. 옴~ 바람 소리가 들린다. 새들이 지나가는 것 같다. 펄럭펄럭. 눈을 감기 전 담아둔 마을의 모습이 보인다. 나는 없다. 옴~ 엄마는 잘 지내나. 오늘 저녁은 뭘 먹을까. 숙소에 가면 따뜻하고 달달한 차 한잔 먼저 마셔야지. 아니 벌써 잡생각이. 다시 다시. 옴~ 동승들의 모습. 산의 모습. 초록색. 바람 소리. 구름. 하늘. 하나다. 옴~ 암쏘쏘리 벗알러뷰 다 거짓말. 옴~ 음? 아니 갑자기 웬 빅뱅 노래가. 

잡생각의 홍수로 명상은 실패다. 명상은 포기하고, 게으르게 앉아 내 앞에 놓인 풍경을 바라봤다. 지금이 좋다. 어제도 참 좋았는데. 내일도 설렌다. 어제도 좋고 오늘도 좋고 내일도 좋은 지금. 세계와 내가 하나가 되는 명상은 실패여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오롯이 충만하다.

펠링 숙소에서 바라본 설산. 다르질링 타이거 힐에 올라, 관광객 백여 명과 함께 바라본 손톱만한 칸첸중가의 모습과는 비교가 안 된다.
 펠링 숙소에서 바라본 설산. 다르질링 타이거 힐에 올라, 관광객 백여 명과 함께 바라본 손톱만한 칸첸중가의 모습과는 비교가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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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펠링, #시킴, #칸첸중가, #히말라야,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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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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