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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가의 방문> 표지.
 <기업가의 방문> 표지.
ⓒ 후마니타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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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상식으로부터 독립된 공간'이자, '자본의 논리가 모든 걸 지배하는 곳'에서 시작된다.

대학 등록금, 생활비를 감당할 수 없어 돈을 벌기 위해 나섰다. 웬만한 사람은 뼈도 못추린다는 '어업 현장'.

중앙대학교 03학번 노영수는 제대한 지 1년째 되는 날 부산으로 내려가 그렇게 선상 생활을 시작한다. 2008년 1월이었다.

바다는 현실이었다. 운치는 찾기 어려운, 단지 까만 어둠만이 있었다. 그가 탄 어선은 조업 활동에 최적화된 구조였지만 선원의 안전과 편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어선 몇 개월만 타면 떼돈 번다는 말도 있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다. 

관만한 공간에서 시체처럼 잠들어 몇 시간 눈도 못 붙인 뒤 다시 나와 퇴근 시간 없는 노동을 해도 최저 시급조차 벌지 못했다. 우여곡절 끝에 1학기 동안 번 돈은 2학기 등록금에도 미치지 못했다.

노영수가 쓴 <기업가의 방문>(후마니타스)의 1/5을 차지하는 선상 체험은 이리도 허무하게 끝난다. 중앙대를 인수한 두산 재단에 맞서 싸우는 미련한(?) 젊은이 노영수가 기록한 이 책에서 선상 체험은 어떤 의미가 있을까.

기업화된 대학의 서늘한 풍경

'부채 인간'으로 호명되는 350만 대학생의 일상이 그와 다르지 않다고 한다. 더 많은 어획고를 위해 무슨 일이든 자체적으로 처리하고, 상식밖의 일이 비일비재한 선상에서의 체험은, 학교와의 싸우과 맞물리는 점이 있다는 것이다. 노영수는 '대항해'를 끝마치고 학교로 돌아왔지만, 이후 더 혹독한 대항해가 시작된다.

2008년 5월 두산 재단(아래 '두산')이 전격적으로 중앙대학교(아래 '중앙대')를 인수한다. 대기업 두산의 진출은 날이 갈수록 위상이 격하되는 중앙대에 절호의 기회로 인식됐다. 다른 재학생뿐만 아니라 저자 노영수도 기대감을 드러냈다. 물론 경계심도 존재했다. 즉, 학교 발전에 대한 기대와 대학의 기업화에 대한 우려가 공존했다.

사실 필자는 저자 노영수와 같은 학번이자 같은 군번이다. 그가 기억하는 2003년 새내기 때의 풋풋함을 공유할 수 있다. 물론 당시에도 현실은 각박했다. 온 사회가 IMF의 악마적 손길에서 겨우 벗어나 다시 시작하던 때였다. 조금이나마 학교에 낭만이라는 게 있었다. 지금처럼 학교에 건물이 많지 않고 편의 시설도 부족했지만 다른 게 넘치던 때였다. 교수의 눈빛에서 '직원'이 아닌 '선생님'을 읽을 수 있었고, 학생의 눈빛에선 '배움'의 의지도 보였다. 

저자의 옛 이야기는 아련한 추억을 부르지만, 다가올 폭풍을 예견하는 듯한 서늘함도 묻어 있다. 어김없이 찾아온 기업가, 얼마 되지 않아 두산의 비즈니스적 마인드가 본격적으로 발휘된다.

곧바로 시작된 것이 '역사상 가장 강도 높은 구조조정'이다. 숨 돌릴 틈도 없이 총장직 임명제, 계열별 부총장제, 등급별 교수 평가, 차등 연봉제, D학점 5% 의무 부과제, 학과 통폐합, 교양과목 축소, 회계학 필수 과목 재정, 재단에 위협적인 진중권 교수 해임, 재단과 총장 비판 목소리 억압 및 탄압, 새터 및 농활 폐지, 선거권 침해... 이는 단순히 비즈니스적 마인드에 기초한 조처로 보기 힘들다. 저자에 따르면, 학내 민주주의가 파괴된 것이다. 그야말로 식민지 아닌 식민지였다.

2010년 7월 중앙대 퇴학생 노영수(왼쪽)씨는 가슴에 "학교로 돌아가자"고 쓴 몸벽보를 붙이고 삼보일배를 했다.
 2010년 7월 중앙대 퇴학생 노영수(왼쪽)씨는 가슴에 "학교로 돌아가자"고 쓴 몸벽보를 붙이고 삼보일배를 했다.
ⓒ 윤성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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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문은 상품이 되었고, 학생은 그 상품의 소비자가 되었으며, 교수는 그 학문의 생산자가 되었다. 그리고 모두가 시장 원리에 따라 성과를 내지 못할 경우 채찍을 맞아야 했다. 대학은 더 이상 성찰적 시민을 양산하는 공간도, 시장에 대한 대안을 제시하는 공간도 아니었다. 대안은커녕, 시장이 원하는 부품을 찍어 내기에 바쁜 공장, 직업 양성소가 되어 버렸다.(중략) 대학 역시 정글이 되어 버렸다." - 본문 중에서

저자를 중심으로 투쟁의 새로운 역사를 써내려간 친구들의 기록은 가히 엄청나다. 그가 처음 움직이기 시작한 건 진중권 교수 재임용 불발 때였다. 재단의 지극히 섬세한 관심(?)과 간섭 때문이었다. 저자는 이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노영수의 말에 따르면, 그 이후 그의 삶은 뒤엉키기 시작했다. 펜을 쥐어야 할 손에 매직과 붓을 들고 대자보와 현수막을 쓰기 시작했다.

그는 공부는 언제 하나 싶게 반발하고, 시위하고, 점거 농성을 했다. 급기야 두산건설 공사 현장의 타워크레인에 올라 시위도 벌였다. 물론 상당한 반향을 일으키면서 많은 이들의 주목을 끌었다. 하지만 그에게 돌아간 것은 2500만 원에 육박하는 손해배상 청구와 퇴학 처분 통보였다.

이후 그는 퇴학 처분 무효화를 위한 시위에 들어갔다. 두산 주최의 국토대장정에 맞서 '삼보 일배' 원정 퍼포먼스를 펼쳤다. 이 또한 타워크레인 시위처럼 많은 이들의 관심과 응원, 후원을 불러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한 징계가 뒤따랐다.

결국 법원 판결로 퇴학 징계가 취소되었지만, 재단 측의 초법적인 발상으로 또다른 징계가 내려진다. 징계위원회가 이야기한 내용은 무시무시하다.

"퇴학생이 소송에서 이겨 복학하게 되더라도 다시 무기 정학을 내릴 것이고, 또다시 소송을 벌여 학교로 돌아와도 최장 기간의 유기 정학을 내릴 것이다."

이는 눈으로 볼 수 없는 시간의 감옥과 같았다. 저자는 지난한 11년 간의 대학 생활에 마침표를 찍고 올 2014년에 졸업했다. 노영수는 정말 지루하고, 지독하게, 열심히 싸웠다. 하지만 역시 역부족이었고 세상은 바뀌지 않았다. 두산에 의한 중앙대의 기업화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문제는 중앙대만이 자본의 영역으로 넘어간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다른 수많은 대학도 마찬가지다. 시각을 더 넓혀 보면, 대학의 기업화는 이 사회 전체의 기업화에서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이 책은 대다수 대학생들에게 공감을 얻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또한 대다수 기업인, 회사원들에게도 환영받지 못할 듯하다. 저자의 생각과 활동을 통해 대리 만족을 느끼기도 어려울 것이다. 그에게 내려진 처분이 너무나 처참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점이 이 책으로 필자를 이끌었을까? 그건 아마도 저자가 보여준 투쟁의 숭고함, 흔들리지 않는 신념, 불도저같이 밀어붙이는 추진력에 존경심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가 친구들과 함께 진한 필체로 써 내려간, 대학 생활의 추억 때문일 것이다. 그는 분명 후회 없는 청춘을 보낸 듯하다. 

노영수는 기업화로 무너지는 대학의 처참한 모습을, 자기 청춘의 모습으로 잘 보여줬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singenv.tistory.com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기업가의 방문> / 노영수 지음 / 후마니타스 펴냄 / 15000원 / 260페이지 / 2014년 3월



기업가의 방문 - 어느 기업 대학에서 생긴 일

노영수 지음, 후마니타스(2014)


태그:#기업가의 방문, #두산 재단, #중앙대학교, #투쟁, #비즈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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冊으로 策하다. 책으로 일을 꾸미거나 꾀하다. 책으로 세상을 바꿔 보겠습니다. 책에 관련된 어떤 거라도 환영해요^^ 영화는 더 환영하구요. singenv@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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