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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사는 수상촌을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 이 마을에 사는 사람 대부분이 베트남에서 탈출한 보트 피풀이어서 양쪽 나라에서 상륙허가를 받지 못해 이곳에 모여 산다고 한다
 자신이 사는 수상촌을 바라보는 아이의 모습. 이 마을에 사는 사람 대부분이 베트남에서 탈출한 보트 피풀이어서 양쪽 나라에서 상륙허가를 받지 못해 이곳에 모여 산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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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일정의 마지막은 캄보디아 심장으로 여겨져 '위대한 호수'라 불리는 톤레삽과 크메르루주 정권 시절 학살된 사람들의 유골과 뼈를 모아 놓은 왓 트마이 사원이다.

톤레삽은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큰 담수호로 계절에 따라 호수의 크기가 달라진다. 내륙에 있는 톤레삽은 톤레삽 강과 연결되고, 톤레삽 강은 프놈펜을 거치면서 메콩강으로 합류된다. 때문에 평상시에는 2700㎢에 불과한 평범한 호수가 우기가 되면 최대 16000㎢까지 커진다.

호수의 깊이도 평상시에는 1m에 불과하지만 우기에는 9m로 깊어진다. 호수 크기의 변화는 메콩강의 범람을 막아줄 뿐만 아니라 적정 양의 물을 공급해 비옥한 토양을 제공해준다. 때문에 크메르 제국의 왕들은 톤레삽을 끼고 수도를 정했으며 국가도 번창했다.

톤레삽 호수에서 고기잡는 어부의 모습. 뒤에서는 아내가 배를 잡아주고  있다
 톤레삽 호수에서 고기잡는 어부의 모습. 뒤에서는 아내가 배를 잡아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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톤레삽 호수로 가는 길에 보았던 둑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
 톤레삽 호수로 가는 길에 보았던 둑 주변에 사는 사람들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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톤레삽은 캄보디아 농업은 물론 어업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데 연간 잡히는 민물고기의 75%이상이 톤레삽에서 잡힌다. 톤레삽에서 가장 많이 잡히는 고기의 이름이 '리엘'로 캄보디아의 화폐 단위가 되었으니 캄보디아 사람들에게 톤레삽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지 알 수 있다. 

씨엠리업에서 40분쯤 비포장 도로를 달려 톤레삽에 있는 수상촌을 방문했다. 차에서 내려 본격적인 수상촌으로 10여분 동안 가는 뱃길 주변으로는 가난한 주민들이 사는 가옥들이 보인다.  찢어져 비가 샐 것 같은 천막지붕은 얼기설기 엮어져 있고 양동이며 밥솥 등의 가난한 세간이 보인다.

생필품을 나르는 배들과 수십대의 관광유람선을 비껴 지나자 드디어 거대한 호수가 나타나고 물위에 집을 짓고 사는 커다란 마을이 나타났다. 호수 끝을 바라보니 지평선만 보인다. 이곳이 호수? 차라리 바다라고 부르는 게 낫지 않을까?  캄보디아 국민의 단백질 40%를 여기서 잡힌 고기로 공급한다고 하니 호수가 얼마나 큰지 가늠할 수 있다.  

수상촌에 사는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 모습
 수상촌에 사는 학생들이 다니는 학교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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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상촌에는 교민과 코이카에서 파견한 자원봉사자들이 이들을 돕고 있었다
 수상촌에는 교민과 코이카에서 파견한 자원봉사자들이 이들을 돕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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톤레삽에 사는 14개 부락 중 가장 못사는 이 마을은 주민의 90%가 베트남 출신들이라고 한다. 베트남 전쟁 중 고국을 탈출한 베트남 사람들은 베트남에서도, 캄보디아에서도 정착을 허락하지 않아 이곳 수상촌에서 산다. 육지에 발을 딛고 살아야할 사람들이 어찌할 수 없어 선택한 이곳 수상촌에는 학교도 병원도 있다.

반가운 것은 한국교민들과 코이카에서 파견한 한국인 자원봉사대가 어려운 이들을 돕고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선진국들로부터 원조를 받고 살던 국가 중 못사는 후진국에 원조를 하고 있는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하다고 하니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

킬링필드 사원인 왓 트마이에서 정치가 뭔지 고민하다

수상촌 방문을 마친 일행은 '새로운 사원'이라는 왓 트마이 사원을 방문했다. 왓 트마이는 씨엠립에 있는 불교 사원으로 역사나 건축적인 특별함은 없지만, 경내에 있는 조그만 불탑 때문에 관광객들이 찾는다. 불탑은 프놈펜에 있는 킬링필드 위령탑과 비슷하며 크메르 루주(1975~1979년) 집권 때 학살된 사람들의 유골과 뼈를 모아 놓았다.

크메를 루주가 학살한 주검들을 모아 전시한 킬링필드 전시관 모습
 크메를 루주가 학살한 주검들을 모아 전시한 킬링필드 전시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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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루주 정권 당시 크메르 루주에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200만명 이상을 죽인 학살 모습. 여자의 뒤에는 총구가 아닌 드릴의 모습이 보인다.
 크메르 루주 정권 당시 크메르 루주에 반대한다는 명목으로 200만명 이상을 죽인 학살 모습. 여자의 뒤에는 총구가 아닌 드릴의 모습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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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메르 루주 정권시절 사원 주변의 정글에서는 무자비한 처형이 이뤄졌다고 한다. 폴포트의 군인들은 비밀 정보요원인 '앵카'라는 조직을 동원해 동네 어른들이 하는 얘기를 일러바치게 했고 밤이면 크메르 루주가 이들을 처형했다. 당시 앵카는 14세 정도의 소년들이었고 15~19세의 죄의식을 모르는 소년병들은 이들을 무자비하게 처형했다.

당시 앵카 단원이었던 한 사람의 증언에 의하면 자기 어머니와 아버지를 대나무 창으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 사진 속 한 여인의 모습에 그 시절이 얼마나 참혹했는가를 가늠케 한다. 포승줄로 묶인 그 여인의 목 뒤에는 드릴이 있었고 여인의 얼굴은 평온했다. 살아서 고통 받느니 차라리 죽는 게 더 평안을 얻겠다는 생각이었는지 체념한 채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캄보디아 근대사는 캄보디아 정치인뿐만 아니라 전세계 모든 국가의 책임

찬란한 문명을 자랑했던 크메르 제국은 근세에 이르러 험난한 시기를 보냈다. 19세기 초, 제국주의 시절 인도차이나의 서쪽은 영국이, 동쪽은 프랑스가 지배하며 식민통치를 했다. 1953년, 100여년 간의 프랑스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 국왕은 중립주의를 표방한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사이에 전쟁이 터지자 론놀장군은 쿠데타로 시아누크를 실각시키고 정권을 잡았다. 북베트남군이 군수물자를 나르는 통로로 캄보디아를 통과하자 미국은 1970년 3월 베트콩을 사살한다는 구실로 캄보디아를 폭격해 30~50만 명이 폭사당한다. 미군의 무차별적인 폭격에 반감을 가진 크메르 루주 군은 1975년 베트남이 통일되자 정권을 잡는다.

크메르 루주가 주민을 학살하던 시절 죽은 사람들과 고문 도구가 전시된 사진
 크메르 루주가 주민을 학살하던 시절 죽은 사람들과 고문 도구가 전시된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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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링필드가 한창이던 시절 죽은이들의 사진 모습
 킬링필드가 한창이던 시절 죽은이들의 사진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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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간의 식민통치를 목격한 폴포트는 10년 동안 외세를 단절하고 경제를 발전시키겠다는 신념하에 전국민을 집단농장에 배치했다. 당시 정치인, 지식인, 교사, 안경낀 사람, 손에 굳은살이 없는 사람 등은 체포되어 옥살이하다 무참하게 처형됐다. 일행 중 한 분인 김은희씨의 얘기다.

"이념과 사상으로 포장되어 많은 사람들이 이렇게 처참한 죽음을 맞이해야 될까 생각해 봤습니다."     

내전 당시 묻힌 지뢰가 4~600만개라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 제거되었지만 숲속에는 들어가선 안된다는 경고를 들었다. 지뢰 폭발로 다리가 잘린  상이군인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자선을 요청했다
 내전 당시 묻힌 지뢰가 4~600만개라고 한다. 지금은 대부분 제거되었지만 숲속에는 들어가선 안된다는 경고를 들었다. 지뢰 폭발로 다리가 잘린 상이군인들이 악기를 연주하며 자선을 요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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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으로 북서쪽 산악지역으로 후퇴한 크메르 루주는 산악지역에서 게릴라전을 벌였다. 1993년 유엔 감시하에 총선거를 치른 캄보디아에는 시아누크가 복귀했고훈센이 총리를 맡아 오늘에 이르렀다.

경제발전을 원하는 캄보디아는 외국원조의 부족과 숙련기술자와 전문가의 부족으로 극심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가는 곳마다 "원 달러!"를 외치는 캄보디아인들을 보며 정치가 누굴 위해 존재 하는가 곰곰 생각해 보았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캄보디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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