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랜만에 들른 학교는 번쩍거렸다. 새로 들어선 웅장한 R&D 센터와 정문을 장악한 온갖 프랜차이즈 상점들이 나를 맞았다.

계속 걸어 들어갔다. 학교를 다녔던 2000년대 중후반, 학생자치활동이 많이 약화됐다던 그 시절만 하더라도 학생들이 어설프게 손수 써내려간 현수막과 대자보, 대안적인 담론과 비판적 메시지들은 어김없이 교정 한쪽을 채웠다.

그러나 지금은 매끈히 제작된 취업 포스터와 자기계발 모임 홍보물, 해외 배낭여행 현수막 등으로 캠퍼스는 치장을 했다. 순간, 멸균실에 들어와 있는 듯한 갑갑함에 숨이 막혔다.

그날 나는 씁쓸한 마음만을 가지고 발걸음을 돌렸지만, 누군가는 학교의 속살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아니, 속살이랄 것도 없었다. 대놓고 노골적으로 몰아치는 '기업식 개혁'으로 명명된 '대학 해체' 작업에 대응해간 것만으로도 버거웠으니.

대기업 두산의 중앙대 인수, 그 어떤 이유도 논리도 따져볼 겨를이 없었다. 대학이 완벽하게 서열화된 우리사회에서, 박용성 이사장의 말처럼 '서열 상승'과 직결되는 "자본의 논리"는 성전 그 자체였기에. 투자 없는 재단에 진저리를 치던 학교에서는 아무런 토론도 반대도 없이 돈 많은 "기업가의 방문"에 성은을 입은 듯 받아 모셨다.

딱히 다른 대안도 없는 게 현실이었다. 당시 운동권 성향이었던 안성 교정 총학생회마저도 "환영" 성명을 냈던 기억이 난다.

그렇기에 <기업가의 방문>(후마니타스)을 쓴 노영수 저자, 어쩌다보니 두산에 맞서는 투사처럼 알려진 그도 "재단 물러가라"는 싸움을 한 건 아니었다. 자신의 학과에 적을 뒀던 진보 지식인(진중권)이 석연찮게 학교를 떠나게 되는 상황에서 "수업권 보장"을 외쳤으며, 경영학을 팽창하고 인문학을 축소시키는 학과 구조조정을 보다 못해 나섰을 뿐.

즉, 자유로운 학문공동체로서의 대학이 어처구니없게 훼손되고, 자본과 효율의 논리만이 무차별 주입되는 자태에 대해 문제제기 했을 뿐. 그러나 그 대가는 너무도 컸다.

이 시대 청춘의 조금 특이한, 보편적인 기록

책표지 <기업가의 방문>
 책표지 <기업가의 방문>
ⓒ 후마니타스

관련사진보기

이 책은 '기업 대학'을 향한 투쟁의 기록이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등록금 마련을 위해 휴학하고 알바를 전전해야 하는(그는 심지어 험한 바다에서 뱃일을 했다) 이 시대에 놓인 청춘의 조금 특이한 보편적인 기록이다.

조금 다른 선택을 한, 그리하여 퇴학과 소송을 반복하며 "시간의 감옥"에 갇혀 삼십 줄이 넘도록 학교에 남아 있었던 한 젊은이가 짊어져야 했을 망망한 삶의 무게가 오롯이 담긴 처절한 현실의 기록이기도 하다.

학교에서 제기한 소송 빚도 버거운 가난한 청년에게, 장학금마저 "징계자라서 안 된다"는 대목. 심지어 받은 장학금마저 토해내야 하는 상황에서는, 그 치사함에 학자금 대출로 벌벌 떤 경험이 있는 사람이라면 더더욱 울컥하는 감정을 추스르기 어렵다.

오늘날 대학이 중앙대만 그러하랴. 그렇기에 김예슬은 대학 자체를 거부하며 트랙을 탈주했다. 노 저자는 그와도 다른 선택을 했다. 그는 대학생활에 만족했다. 대학은 "무의미하게 일탈적이었던 나는 점점 더 가치 있게 버르장머리 없는 법을 익힌" 곳이었으며, "청춘의 질풍노도를 따뜻하게 보듬어 주고 의미를 부여해 준 공간"이었다.

그는 낭만적이었던 농활의 추억, 대책 없이 즐거웠던 캠퍼스 생활, 술에 취해 교수의 머리를 쓰다듬기까지 한 수평적인 사제 관계 등을 되새긴다. 대학과 스승과 학과에 대한 진한 애정이 전해진다. 그의 기록은 대학을 등진 싸움이 아니라, 보금자리로 다시 돌아가기 위한 몸부림에 관한 것이다.

특히 이 책에 끌린 건, 몸으로, 발로, 생생한 현장에서 써내려간 글이기 때문이다. '돈키호테'라는 비아냥까지 들어야 했던 강경한 이미지의 그가 온전히 감내해야 했던 존재를 옥죄는 불안의 순간들. 그것은 과거 학생운동 세대들이 처했던 무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이었다.

'돈'으로 청춘을 길들이는 '기업대학'

2010년 7월, 중앙대 퇴학생 노영수(왼쪽)씨는 가슴에 "학교로 돌아가자"고 쓴 몸벽보를 붙이고 지난 1일과 2일 경남 진주에서 삼보일배를 했다.
 2010년 7월, 중앙대 퇴학생 노영수(왼쪽)씨는 가슴에 "학교로 돌아가자"고 쓴 몸벽보를 붙이고 지난 1일과 2일 경남 진주에서 삼보일배를 했다.
ⓒ 윤성효

관련사진보기


'기업 대학'은 노동자들에게 그랬듯 '돈'으로, 안 그래도 먹고 사는 걱정으로 젊은 날을 온전히 수험생처럼 보내야 하는 오늘의 청춘들이 가장 겁내하는 '돈'을 물리는 것으로 영혼을 갉아먹었다.

"몇 가지 욕망이 상충하는 시기"에서, "침묵할 것인가 저항할 것인가"를 되묻다가 결국 저항을 택했지만, "그 짧은 시간에도 이걸 나중에 돈으로 물게 되면 얼마짜리가 될지 걱정"하는 순간이 이어진다.

학교 연못 주위에 학과 구조조정에 대한 비판을 담은 천 조각을 매달자, 학교는 철거 고지와 함께 "비용 200만 원 청구"를 통보한다. 나아가 농성장 천막으로 인해 주변 환경이 망가졌다며 "학생처 주임이 사채업자처럼 찾아와 시비를" 건다.

압권은 타워크레인 고공시위로 인해 매겨진 손해배상 2500여만 원. 소통 없이 구조조정이 강행되자 "플래카드를 내걸면 바로 철거되고, 결정이 내일인데 학내에는 비판하는 대자보 한장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깨끗했다. 어떤 몸부림도 허용되지 않았다. 질식해버릴 것 같았다". 방법이 없던 그는 공사 중이던 타워크레인에 올라 거대한 현수막을 내걸었고, 그 대가는 천문학적인 돈이었다. 퇴학조차도 초라해 보이는 조치였다.

돈으로 길들이는 장면은 계속된다. 법정 싸움을 거쳐 뒤늦게 학교에 돌아간 그는, '징계 학생'이라는 이유로 학생회 피선거권까지 박탈 당했다. 다시 소송으로 이어졌고, 징계 학생들은 결국 후보 자격을 확인받았지만, 학교법인은 "300만 원 소송비용"을 청구해 왔다. "작별의 순간까지 두산 재단에 맞선 대가에는 씁쓸한 가격표가 붙었다." 천박한 '돈 물리기'는 결국 "노래 1회, 구호 1회, 대자보 1장당 100만 원을 내라고 간접강제 신청"을 하는 황당한 사태(연초 사회적인 빈축을 샀던 청소 노동자에게 가해진 행위)까지 이어진다.

말미에 그는 고시반 입반에 합격했던 때를 떠올린다. 얌전히 거기 남아 있었다면, 진중권 교수가 학교를 떠나지 않았다면, 인문학이 모멸 당하는 폭력적인 구조조정이 없었다면, 애초에 재벌 기업이 대학을 인수하는 기형적인 '거래'가 없었다면, 아니 회장님이 조금만 '세련되게' 자본의 논리를 대학에 이식시켜 나갔다면, 그는 그저 고시 준비에 열을 올리는 평범한 대학생으로 학창시절을 마쳤을까. "삶이 뒤엉키지" 않았을까.

그는 그에 대한 미련도, 긍정도 밝히지 않는다. 그가 첫 수업 때 교수에게 들었다는 말. "사회에 그대로 이식되는 부품이 아니라, 오직 자신에 투기함으로서 스스로를 찾아가라"는 가르침처럼, 결국 실존을 걸고 스스로에 기투했고 나머지는 책임져야 할 몫이라는 듯.

독재정권의 '엄혹했던 시절'을 되뇌이는, 그리하여 지금 청춘들의 무기력함을 책망하는 기성세대라면 특히 이 책을 꼭 봐야 한다. 대학에 방문한 기업가는 박정희나 전두환만큼이나, 어쩌면 그 이상으로 치밀해진 폭압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는 것을 절절히 살펴볼 수 있다.

서글픈 건, 이 현실이 일개 대학만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 문강형준 평론가의 말처럼 "이 책을 읽는 것은 우리 시대를 읽는 것이다".

덧붙이는 글 | <기업가의 방문>(노영수/ 후마니타스/ 2014-03-17 / 15000원)



기업가의 방문 - 어느 기업 대학에서 생긴 일

노영수 지음, 후마니타스(2014)

이 책의 다른 기사

청춘에게 이 남자를 권합니다

태그:#기업가의 방문, #노영수, #중앙대, #두산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