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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승태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2013년 12월 18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통상임금 관련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대법정에 앉아 있다.
 양승태 대법원장을 비롯한 대법관들이 2013년 12월 18일 오후 서울 서초동 대법원에서 통상임금 관련 전원합의체 선고를 위해 대법정에 앉아 있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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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노동부가 지난 19일 발행한 <새로운 미래를 여는 합리적 임금체계 개편 매뉴얼>(아래 매뉴얼)을 몇 장 들춰보기도 전에 내 입에선 이 말이 튀어나왔다. 지난해 12월 대법원이 통상임금에 대해 '요상한' 판결을 한 이후, 아니 더 거슬러 올라가 지난해 5월 박근혜 대통령이 미국 지엠(GM) 사장을 만나 "통상임금 문제를 해결하겠다"고 얘기한 것이 이렇게 노동부를 통해 완성되어가는 것 같다. 이렇게 노골적일 줄은 정말 몰랐다.

핵심은 기존의 연공급(호봉제)제를 성과급제로 바꾸겠다는 것인데, "장기근속자들의 생산성이 임금상승폭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매뉴얼의 해설은 애교다. 이 매뉴얼은 친절하게도, 법을 위반하지 않고 임금을 삭감하는 방법을 아예 드러내놓고 알려주고, 임금을 동결한 회사의 사례를 '모범사례'로 실어놓고 있다.

앞으로의 임금 체계는? (중략) 복잡한 임금항목을 단순화하고, 연공·근속 중심에서 일의 가치, 능력과 성과가 반영되는 공정하고 합리적인 임금체계로 개선해 나가야 합니다.(매뉴얼 19쪽)

취업규칙의 변경을 통한 임금체계 개편 시, 개편된 임금체계의 내용이 기존의 임금체계에 비해 근로자에게 불리한 경우, (중략) 취업규칙 변경의 유·불리 판단은 변경 취지와 경위, 해당 사업체의 업무 성질, 취업규칙 각 규정의 전체적인 체제 등 제반사항을 종합하여 판단.(매뉴얼 52쪽) 

○○전자 인건비 부담 완화방법: - 통상임금 범위 확대에 따른 기업의 인건비 부담을 낮추기 위해 임금을 동결하기로 결정 - 통상임금과 연동되어 있는 기타 수당의 지급기준 변경.(매뉴얼 72쪽) 

이 매뉴얼이 나온 다음 날, 나는 노동부의 한 지역지청 근로감독관에게 항의성 전화를 한 통 받았다. 금속노조에서 언론에 제보한 사례를 보고 전화를 한 것 같았는데, "취업규칙을 강제적으로 변경한 곳이 어디냐. 그런 곳이 있으면 자신들에게 제보해 줘야 하는 것 아니냐"는 것이었다.

노동조합이 없는 현장의 임금은 회사가 정한 취업규칙과 개별근로계약서로 결정된다는 것은 모두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다. 개별근로자는 사실상 임금에 대한 결정권이 없다. 일할 사람은 넘치고 일자리는 부족하다. 수요와 공급의 법칙에 따르면 노동자의 몸값은 계속 하락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정한 것이 근로기준법이고, 자본과의 관계에서 상대적 약자인 노동자들의 입장을 보호하고 대변하여야 할 국가기관인 노동부다.

최소한의 비용으로 무한이익을 취하려고 하는 기업에게 "최소한 노동자가 생활할 수 있는 임금과 근로조건을 지급"하도록 유도해야 하는 게 노동부의 역할이다. 하지만 이번 매뉴얼로 노동부는 '기업부' 아니냐는 조롱에 대해 대놓고 스스로 "그래, 우리 기업부다"라고 커밍아웃을 해버린 셈이다.

새로운 미래를 여는 합리적 임금체계? 노동부의 '기업부' 커밍아웃

경총이나 상공회의소 같이 기업의 이익을 대변하는 이익단체가 해야 할 일을 노동부가 '앞장서서 하겠다'고 선언한 꼴이 되어 버렸다. 뒤에서는 이러한 매뉴얼로 기업주들에게 임금삭감의 방법을 친절히 알려주고 이제 와서 근로감독관의 입에서 "법 위반을 시정시키기 위해서 현장지도를 나가겠다"는 말이 나오니 그 말을 어떻게 곧이곧대로 믿을 수 있겠나.

근로기준법은 근로자의 최소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최하한선이다. 근로기준법 제3조에는 "이 법을 이유로 기존의 근로조건을 저하시키지 못한다"는 '근로조건 저하금지' 조항이 명시돼 있다. 대통령이 앞장서서 "기업의 임금부담을 경감시켜주겠다"고 선언하니, 대법원이 "당연히 임금에 포함시켜야 하는 상여금을 '신의칙'을 들먹이며 예외의 폭을 열어"주고, 나아가 노동부는 "기업이 어떻게 하면 나이 든 노동자들의 임금을 삭감시킬 수 있는지" '생산성'과 '성과'를 들먹이며 근로기준법 제3조를 사문화 시키는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노동부가 <새로운 미래를 여는 합리적 임금체계 개편 매뉴얼>을 현장에 내리는 순간, 실제로 대법원 판결 이후 갈피를 잡지 못했던 다수의 기업주들에게는 '노동자들의 임금을 기존의 수준으로 묶어두거나, 장기적으로는 삭감할 수 있는 새로운 기업의 미래'가 열렸다. 이 매뉴얼에는 "상여금을 통상임금에 포함시키지 않아도 되는 방법", "근로기준법을 위반하지 않고도 임금총액을 저하시킬 수 있는 방법", "임금을 동결시킬 수 있는 방법" 등이 친절하게 안내되어 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부산지하철노조 등은 1월 28일 오전 부산 연제구 부산지방고용노동청을 찾아 통상임금 지도지침의 폐기를 촉구하고 임금체계 개악 중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민주노총, 금속노조 부산양산지부, 부산지하철노조 등은 1월 28일 오전 부산 연제구 부산지방고용노동청을 찾아 통상임금 지도지침의 폐기를 촉구하고 임금체계 개악 중단을 요구하는 기자회견을 열었다.
ⓒ 정민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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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부의 매뉴얼이나 행정지도는 현장 사용자들에게는 절대적이다. 금속노조 경기지부에서 2월부터 두 달 동안 거리상담을 진행한 바에 의하면, 예년의 경우 1월이면 완료되던 개별 근로계약 갱신이 2월, 3월로 늦어지는 흐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노동부는 2월 발행한 통상임금 지침서를 통해 "새로운 근로계약을 체결하기 전까지는 통상임금 범위는 기존의 범위 내에서 지급해도 무관하다"며, 임금체불 줄소송에 대한 임시 면책을 해주었다.

그리고 이번 매뉴얼을 통해 임금을 새로이 설계하여 통상임금 논란을 단번에 정리하고 임금부담을 경감하는 방법을 안내해줌으로써, 임금 인상에 대한 노동자들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고 말았다. 이미 현장에서는 임금체계를 불이익하게 변경하는 근로계약이 체결되기 시작했다. 노동조합이 없는 대다수의 현장에서는 울며 겨자 먹기로 개별 근로자들의 동의가 이루어지는 방식으로 취업규칙이 변경될 것이다.

민주당 장하나 의원실은 지난 2월 국회 상임위를 통해 "강제적으로 근로계약서와 취업규칙이 변경된 사례에 대해 노동부가 올바로 행정지도 하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노동부는 "조사한 바에 따르면 '강제적'으로 변경된 경우는 단 한 건도 확인되지 않았다"고 답변했다. 그것으로 노동부는 책임을 회피함과 동시에 노동부의 역할을 포기해 버렸다.

노동부는 어떠한 방식의 조사를 통해 '강제성'을 확인했을까. "근로자들이 동의하고 날인한 서류"를 그 근거로 제시하였다고 한다. 강제성은 계약을 체결하는 과정에서 보이지 않는 힘이 작용하는 것, 또는 강제적이라고 볼 수 있는 객관적 결과물로 설명할 수 있는 것이지, 최종 서류상의 날인 여부가 자율성과 강제성을 구분하는 기준이 될 수는 없다. 이는 현장의 노사에 대한 직접적인 조사가 진행되어야만 확인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사안을 대하는 안이한 노동부의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단적인 사례다.

'생산성' 들먹이며 임금 삭감... 근로기준법 무력화 매뉴얼

그렇다면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해야 할 노동계의 모습은 어떠한가. 임금체계에 대해 정부가 이렇게 적극적으로 개편의지를 보이는 것에 비해 노동계의 소극적이고 더딘 대응은 많이 아쉽다. 지난해 통상임금 논쟁으로 시작된 임금체계 개편의 문제가 올해 중요한 노사의 의제라는 것에 대해 아무도 부정하지 않는다.

지난해 12월 "상여금도 통상임금에 포함되나 신의칙에 의해 과거의 상여금에 대해 체불을 물어서는 안 되고, 회사의 경영상황에 따라 그 지급을 결정할 수 있다"는, '기업의 이해관계에 매우 충실'했던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 이후 이 문제가 법 개정까지 이어질 것이라고 모두 예측했다. 하지만 이 같은 상황판단에 걸맞은 사업과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지 못하다.

금속노조는 올해 임단협에서 "사용자들의 임금체계 개편 의도에 맞서 단협을 지켜내고, 통상임금 범위를 확대 적용한다"는 계획과 방침을 세웠지만, 전체 노동자의 임금이 삭감될 위기에 대한 투쟁과 사업계획은 명확히 보이지 않는다. 조직되지 않은 90%의 노동자들과 손잡고 정권과 자본의 임금삭감 의도를 막아내고자 하는 의지가 사업계획 속에서 잘 보이지 않는 것은 민주노총도 마찬가지이다.

노동조합이 있는 사업장에서도 통상임금 범위에 대한 기업들의 개악안이 나올 것이 예상된다. 이러한 공세 속에서 최선을 다해 임단협을 치러도 본전 이상을 기대하기 쉽지 않은 환경이 되었다.

노동계가 온 힘을 다해 2014년 임단협을 치러낸다고 해도, 이대로 10% 조직 노동자들의 상여금과 수당을 지켜내는 것에 그치면, 90%의 미조직된 현장을 초토화 시키고 '귀족노조', '밥그릇 싸움' 논리로 밀고 들어오는 정권과 자본의 의도를 막아낼 수가 없다. 90% 노동자들의 임금을 지켜내는 싸움에 민주노총, 금속노조가 적극적으로 임해야 한다. 그래야 모두가 산다.


#노동부매뉴얼#통상임금#임금체계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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