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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 백수> 책 표지. 처절하면서도 낭만적인 백수로 살아가기.
 <어느 날, 백수> 책 표지. 처절하면서도 낭만적인 백수로 살아가기.
ⓒ 비아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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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뒷면은 검은색이다. 그리고 상단에 "얼지 마, 죽지 마, 부활할 거야!"라는 문구가 쓰여 있다. 카넵스키의 영화 속 강제노동막사가 떠오르는 것만으로도 이미 살풍경하다. 백수(白手)가 가진 위기감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정녕 백수는 이토록 처참한 것일까.

입에 달고 다니는 "이 지긋지긋한 직장 때려치워야지"라면서 20년을 다니다가 상무까지 된 한 형이 생각난다.

직장은 가깝고도 먼 존재다. 그런데 정운현 선배는 49살에 약간의 자발성이 낀 비자발적인 형태로 백수가 됐다.

사실 나 역시 선배의 그 나이까지 3년여가 남았으니 정말 그곳이 멀지 않은 셈이다. 나희덕 시인이 말한 그곳은 육신이 차가운 죽는 것이라면, 백수는 사회적 관계가 차갑게 식어버리는 상황이다. 그리고 나 역시 그곳이 멀지 않다는 것을 다시금 느낀다. 

백수가 된 지 6년째. 그 사이에 대여섯 번쯤 본 듯한데, 술값을 내는 후배들을 붙잡지 않는 것 말고는 그는 언제나 꼿꼿했다. 그러니 그렇게 속이 문드러졌으리라고 생각지 않았다. 사실 백수지만 직장인 만큼 하는 일이 많으니 여느 백수와는 다르겠지만, 부채가 많으신 듯하니 속으로는 많이 곪았을 것 같다.

"글쓰기는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방법이자 신경안정제"

책은 가볍다. 분량으로 보면 <정이란 무엇인가>보다 ⅔에 미치지 못할 것 같다. 하지만 글의 깊이나 내용의 중량감은 전작에 비할 수 없다.

우선 작가는 자신의 처지를 바탕으로 '실직 인정하기'로 시작한다. 사실 얼마나 억울할 것인가. 1급 공무원도 하고, 언론계 대표기관의 연구이사였다가 하루아침에 실업자로 나 앉았으니 그럴 것이다.

하지만 작가는 그 처음이 자신의 상황을 인정하는 것에서 시작하라고 전한다. 꼿꼿한 경상도 사람의 전형 같은 스타일이니 그 기분이 100% 눈에 선하다. 그러니 책에서조차 "죽일 놈들, 나쁜 사람들…"이라며 욕을 퍼부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인정을 하고 나면 생활의 길들과 지혜가 생긴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맞는 지혜들을 제시한다. 자신의 관리나 건강 관리는 물론이고, 도서관이나 SNS 활용 등 실제 경험에서 녹아난 다양한 이야기들이 있다. 또 창업이나 귀농·귀촌 같은 것에 무모하게 도전하는 것도 지극히 경계하라 설명한다.

그중에 가장 다가온 것은 글쓰기 습관이다. 작가는 "글쓰기는 내가 살아 있음을 확인하는 방법이자 신경안정제와 같은 역할을 한다"며 꼭 글을 쓸 것을 말한다. 나 역시 최근 가장 절감한 요소였기에 깊이 공감할 수 있었고 반가웠다.

가장 안타까운 부분은 2009년 빚 독촉에 시달리다가 자살을 생각했을 때의 안타까운 상황이다. 사실 가장 고백하기 힘든 부분이었음에도 작가가 발벗고 이 내용을 쓴 것은 정말 이제 스스로의 벽을 넘어섰다는 것을 말하기도 한다.

앞서 이 책이 전작보다 깊이가 느껴지는 것은 아마 이런 고통을 진주로 만들어내는 작가의 힘도 있지만, 그간 더 깊게 파고든 독서의 결과가 아닌 듯싶어 반가웠다. 책 안에는 다산을 비롯해 아주 적절한 인용과 사례들이 이질감 없이 잘 녹아있다.

세상에서 가장 바쁜 백수가 되었으면...

사실 이 책이 팔렸을 때, 작가에게 돌아가는 수익이 1300원 정도이니 큰돈은 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도 노년을 팔던 소노 아야코 같은 백수 전문 글쟁이가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크게 경하할 만한 일이다. 아울러 지극한 어려움이 있다면 커밍아웃했으면 한다. 그래야 딸 아들도 꿈꾸던 법의학자나 중국 전문가의 꿈을 이루지 않을까 싶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내 고향도 백수다. 내 고향 마을에 있는 뫼부리(岫)가 99개여서 일백 백(百)에서 한 일(一)을 빼내서, 백수(白岫)라 불린다. 백수는 그래서 나에게 성스러운 이름이다. 그리고 언제가 돌아가야 할 가장 아름다운 이름이기도 하다.

이제 작가도 백수라는 이름이 결코 이질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백수를 사랑하듯 정 선배도 세상에서 가장 바쁜 백수가 되었으면 싶다. 아울러 이 말도 해주고 싶다.

"직장은 짧고, 백수는 길다."


어느 날, 백수 - 나에게 불쑥 찾아온 중년의 실직, 망가지지 않고 당당하게 사는 18가지 방법

정운현 지음, 비아북(2014)


태그:#정운현, #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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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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