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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단자결'이 있었던 동굴이다. 왼쪽에는 조각상이 오른쪽에는 비석이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고 있다.
▲ 찌비찌리 가마 '집단자결'이 있었던 동굴이다. 왼쪽에는 조각상이 오른쪽에는 비석이 희생자들의 넋을 달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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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의 목을 졸라 죽인다. 뒤이어 엄마는 낫으로 자신의 목을 찌르고 자살한다. 남자들은 서로를 몽둥이로 때려 죽인다. 한 여인은 자신을 죽여 달라며 애원한다. 피란길에 들고 나온 도구들로 단숨에 목숨을 끊기는 역부족이다. 생명의 불꽃이 사그라지는 신음이 어두운 동굴벽을 때린다.

믿기 어려운 이 이야기는 오키나와 중서부에 위치한 한 마을의 작은 동굴에서 실제로 벌어졌던 일이다. '집단자결'이라는 참극이다.

1945년 4월 1일 미군은 중서부 '요미탄(読谷)' 마을의 잔파곶(殘波岬)을 통해 오키나와에 상륙한다. 미군의 거센 공격에 요미탄 마을 사람들은 마을 어귀에 있는 동굴로 피신한다. 동굴이 많은 오키나와의 특성상 사람들은 몇 군데로 나뉘어 몸을 숨긴다. 그중 140명의 사람들이 피신한 곳은 '찌비찌리 가마(동굴)'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많은 이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집단자결'이라는, 말로는 상상조차 어려운 사건이 벌어진 '찌비찌리 가마'를 찾아가봤다.

전쟁 중의 피신처였던 만큼 '찌비찌리 가마'는 쉽게 눈에 띄지 않는 곳에 있었다. 사탕수수밭과 생강밭이 펼쳐진 시골 마을, 동굴을 나타내는 표지판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러 번 방문했다는 안내자도 길을 헷갈릴 정도였다.

숲 덤불 사이에 숨은 듯 놓여 있는 철 계단을 찾았다. 계단을 내려갔다. 계단 끝에는 나무로 뒤덮여 햇빛이 거의 들지 않는, 이승과 분리된 것만 같은 공간이 나타났다. 동굴은 이 공간의 한쪽 구석에서 짙은 어둠을 발산하고 있었다. 동굴 입구 양 옆에는 이곳에서 희생된 영혼을 달래고, 평화를 염원하는 조각과 비석이 놓여 있었다.

허리를 반으로 접고서 한 치 앞도 보이지 않은 컴컴한 동굴 안으로 들어갔다. 휴대전화 빛에 의지해 내부를 살펴봤다. 약 20평 남짓 되는 공간이다. 140명이 들어가 있기에는 턱없이 좁아 보인다. 겁에 질린 채 다닥다닥 붙어앉아 있는 280개의 눈빛을 상상해 본다. 가슴이 먹먹해진다. 동굴 한쪽에는 당시 사용했던 도구들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놓여있었다. 얼마 전까지 수습되지 않은 유골들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번에는 찾아볼 수 없었다.

자국 군대에 의해 가족을 죽이도록 강요당하다니

이 좁고 어두운 공간에서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동굴에 숨어든 사람들 중에는 종군간호원으로 중국에서 전투에 참여했던 사람들이 있었다고 한다. 그들은 사람들에게 "미군에게 잡히면 팔다리가 잘리고, 여자들은 능욕 당한다"라며 자신들이 중국에서 본 일본군의 만행을 상기하며 이야기했다. 그러니 욕을 보기 전에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자고.

전쟁이 일어난 뒤부터 일본군은 현민들에게 이와 같이 선전해 왔다. '미군은 악마이며 그들에게 잡히면 죽는 것으로 끝나지 않으니 오명을 남기지 말고 국가를 위해 자살을 하라'고…. 사람들은 이 말을 의심 없이 믿었다. 왜냐하면 조선에서, 대만에서, 중국에서, 동남아시아 곳곳에서 일본군들이 저질렀던 짓이었기에 미군도 그럴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결국 찌비찌리 가마에 숨어든 사람들은 '집단자결'을 감행한다. 어머니가 아들을, 딸이 아버지를, 오빠가 동생을…. 능욕 당하느니 일왕을 위해 목숨을 바치고자 서로가 서로를 죽였다. 그렇게 해서 140명 중 절반이 넘는 83명이 집단자결로 목숨을 끊었다.

어두운 동굴에 숨어 가족의 손에 죽어간 사람들의 죽음을 어떻게 봐야 할까.  동굴 앞의 비석에는 이들의 희생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집단자결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치고, 살아서 포로의 굴욕을 당하고 죽는 오명을 남기지 말라는 황민화 교육과 제국주의에 의한 강제된 죽음이다.'(비석 내용 중)

비석에 적힌 내용처럼 집단자결의 배경에는 오키나와인들을 총동원하기 위해 일본 군부가 주입시킨 황민화 교육이 있었다. 찌비찌리 가마의 진상이 밝혀지고 사건의 배경을 인식하면서 오키나와 사람들은 '집단자결'이 아닌 일왕제와 일본 군부에 의해 강요된 '집단강제사'라고 바꿔 부르고 있다.

일왕제 수호를 위해 미군에게 오키나와를 송두리째 바친 일본. 일왕과 제국주의 일본에 의해 희생을 강요당한 오키나와 사람들.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장 힘없는 민중들이, 어둡고 컴컴한 동굴 속에서 가족이 서로를 죽이고 죽는 사건이 세상천지에 또 있을까.

"헌법 9조 전쟁 포기를 지켜라"라는 오키나와 사람들

천진무구하고 열정이 넘치는 오키나와의 풀뿌리 조각가 긴조 미노루(가운데)씨.
▲ 긴조 미노루 천진무구하고 열정이 넘치는 오키나와의 풀뿌리 조각가 긴조 미노루(가운데)씨.
ⓒ 김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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끔찍한 전쟁을 겪었고, 전쟁이 끝난 오늘날까지 일본에 의해 희생을 강요받아온 오키나와에는 '미군기지 반대 투쟁' '헌법 9조(비무장, 전쟁 포기 조항) 개정 반대 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반전·평화 의식은 일본의 어느 지역보다 높다.

오키나와 출신으로 오키나와의 독립운동을 하고 있는 풀뿌리 조각가 긴조 미노루씨를 만나봤다. 긴조씨는 영어 교사를 하던 당시 밀로의 비너스 상을 보고 반해, 그 길로 조각을 홀로 공부했다.

지난 2005년, 미군이 여중생을 윤간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로 인해 오키나와 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그의 작품 주제는 오키나와 현대사가 됐다. 긴조씨는 '오키나와 전쟁' '집단자결' '미군기지 반대' '헌법개정 반대' 등의 메시지를 담은 작품을 내놓고 있다.

긴조씨는 우리가 도착했을 때도 한참 작업을 하고 있었다. 그는 하던 작업을 멈추고 우리를 반갑게 맞아줬다. 그는 자택과 작업 공간 옆에 있는 노천 전시장으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리고는 본인의 작품을 하나하나 설명해줬다. 열정적이고 구체적인 설명이 우리를 그의 작품으로 빠져들게 했다.

오키나와 전쟁을 새겨 놓은 본인의 작품을 기행단에게 설명하고 있는 긴조 미노루씨.
 오키나와 전쟁을 새겨 놓은 본인의 작품을 기행단에게 설명하고 있는 긴조 미노루씨.
ⓒ 김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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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작품을 모두 한 줄로 세우면 134미터나 된다고 했다. 그는 오키나와 전쟁과 전후 오키나와 민중들의 삶·투쟁을 작품으로 승화 시켰는데 "지역 아이들과 함께 만든 작품도 있다"라면서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10년간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그의 작품들은 '전쟁과 인간'이라는 주제의 전시회로 2007년 대중에게 공개됐다. 긴조씨는 일본 전국에 팬을 두고 있는 평화 민중예술가이자 일본으로부터 오키나와 독립을 외치는 독립운동가다.

작품에 대한 그의 설명은 계속 이어졌다. 2012년 9월 13만 명이 모인 오스프리 반대 현민대회를 기념해 오키나와 독립의 길로 나가라는 의미를 담은 작품, 일본의 평화 헌법을 형무소에 가둬 헌법 9조를 지켜야 한다는 의미를 나타내는 작품, 오키나와 전쟁에서 가장 처참했던 주민 '집단자결'을 새긴 작품 등 오키나와의 현대사를 관통하는 작품들을 소개해줬다.

긴조 미노루씨의 작품들. 집단 자결을 새긴 작품(왼쪽)과 일본국 헌법 9조를 형무소에 가둔 작품(오른쪽)이다.
 긴조 미노루씨의 작품들. 집단 자결을 새긴 작품(왼쪽)과 일본국 헌법 9조를 형무소에 가둔 작품(오른쪽)이다.
ⓒ 김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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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에 끌려와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조선인이 곡물을 훔쳤다가 일본군에 의해 무참하게 처형당한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
 오키나와에 끌려와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조선인이 곡물을 훔쳤다가 일본군에 의해 무참하게 처형당한 사건에서 모티프를 얻은 작품.
ⓒ 김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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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중에서 긴조씨가 가장 열심히 설명해 준 작품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한'이라는 작품이다. 일제 때 오키나와에 끌려와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조선인이 고구마와 곡물을 훔쳤다가 일본군에 의해 무참하게 처형 당한 사건에서 모티브를 얻었다고 한다.

"폭행하고 있는 일본 군인에 비해 조선인 청년은 몸도 아름답고, 아름다운 인간의 존엄성을 보유하고 있다. 이와 대조적으로 일본 군인은 겁을 먹은 채 인격을 상실한 얼굴, 빈약한 얼굴을 하고 있다."

극명한 대조를 통해 조선인 징용자에 대한 추모와 전쟁 가해자의 인격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이 작품은 경상북도 문경에 동상으로 세워져 있다고 한다.

긴조씨는 작품 설명을 마치고 우리를 집안으로 안내해 20년 된 귀한 뱀술을 선뜻 내줬다. 방문객을 기쁘게 맞이하는 넉넉한 인심과 천진무구한 표정을 가진 평화운동가 긴조씨를 보고 있자니, 이내 가슴이 뜨거워졌다. 뱀술 기운과 함께.

긴조 미노루씨의 집 담벼락. '헌법 9조 전쟁포기 지켜라! 아이들을 전장에 보내지 마라'라고 쓰여있다.
 긴조 미노루씨의 집 담벼락. '헌법 9조 전쟁포기 지켜라! 아이들을 전장에 보내지 마라'라고 쓰여있다.
ⓒ 김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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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조씨 집에서 또 한 명의 운동가를 만날 수 있었다. 치바나 쇼이치라는 분이다. 시간 여유가 없어 잠시 인사만 나눴지만, 인상이 강하게 남았다. 그는 찌비찌리 가마를 맨 처음 발견한 사람으로 발견 뒤 진상 규명과 사건 조사를 통해 '찌비찌리 가마 집단자결' 사건을 세상에 알렸다. 그리고 그는 1987년 10월 26일 오키나와에서 열린 전국체전 당시 히노마루(일장기)를 불태워 유명해지기도 했다. 이 사건으로 지명수배돼 도망자의 신세가 됐지만, 나중에 요미탄 마을의 의원에 당선돼 3선 연임하기도 했다.

"우리 마을의 집단 자결 사건을 조사하면서 전쟁의 책임은 히노마루·기미가요·천황제에 있는 것을 알게 됐다. 그것은 과거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금 또 강제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히노마루를 태움으로써 이를 사람들에게 경고할 생각이었다."

그와 긴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지만, 2009년 <류큐신보>의 인터뷰 내용을 통해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다. 그는 미군기지 반대 운동과 오키나와의 독립운동에 헌신적이다. 소중한 만남을 뒤로한 채 다음 행선지로 이동하기 위해 긴조씨의 집을 나섰다. 그의 집 담벼락에는 '헌법 9조 포기 반대!'라는 문구가 석양 빛을 받아내고 있었다.

미군기지 턱밑에서 '전쟁반대' '평화' 외치는 사키마 미술관

관장인 사키마 미치오씨. 기행단에게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 사키마 미술관 관장인 사키마 미치오씨. 기행단에게 작품 설명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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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오키나와 전쟁을 사람들에게 지속적으로 알리고, 평화의 의미를 전파하기 위한 활동을 이어가고 있는 곳을 찾았다. 바로 사키마 미술관. 이 미술관은 오키나와 기노완시 후텐마 기지 바로 옆에 있다. 미군기지와 철조망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다.

사키마 미술관은 사키마 미치오씨가 운영하는 개인 미술관이다. 해마다 4만 명 이상이 이곳을 찾을 정도로 오키나와 평화기행의 필수 코스가 됐다. 중앙 전시실에서는 오키나와 전쟁의 참상을 그린 <오키나와 전쟁도>가 상설 전시돼 있었다. 가로 4미터, 세로 8.5미터의 거대한 작품이 대형 전시실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이 작품은 사키마 미술관의 상징이다.

이 미술관에서는 상설 전시 외에도 특별전이 열리는데, 전시의 주된 테마는 '생과 사' '고통과 구제' '인간과 전쟁'이다. 2005년에는 광주 5·18 민중항쟁을 주제로 작품활동을 하는 판화가 홍성담 화백의 판화전도 열렸다.

사키마 미술관의 상설 전시 작품 인 <오키나와 전쟁도>.
 사키마 미술관의 상설 전시 작품 인 <오키나와 전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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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키마 관장은 우리 기행단에게 <오키나와 전쟁도>를 직접 해설해줬다. 그는 전쟁 생존자들의 증언을 기반으로 그려진 이 그림에 담긴 의미 하나하나를 자세하고 섬세하게 설명해줬다.

전쟁으로 인해 인격이 붕괴된 눈 없는 군인들, 죽여달라고 애원하는 여인, 아이의 목을 조르는 어머니, 피바다로 변한 오키나와의 해안…. 그림을 뒤에 두고 그의 내러티브 해설을 듣다 보니 일왕제와 제국주의 폭력속에서 사라져간 민중의 고통이 눈앞에 되살아나는 듯했다.

사키마 미술관은 반전 평화의 상징물 중 하나다. 건물 끝에 있는 계단을 올라가면 후텐마 미 공군기지를 훤히 내려다 볼 수 있는 옥상이 있다. 삼엄한 경비와 두꺼운 벽으로 가려져 있는 한국의 미군기지와는 상당히 대조적이었다.

사키마 미술관 전경(좌), 옥상에서 내려다 본 후텐마 미 공군기지(우). 옥상에 올라가려고 하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 사키마 미술관 사키마 미술관 전경(좌), 옥상에서 내려다 본 후텐마 미 공군기지(우). 옥상에 올라가려고 하자 갑자기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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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연신 "헐~"과 "대~박"을 외쳤다. 안내자는 "지난해 12월 일본국회에서 '특정비밀보호법'이 성립되기까지 군사시설 보호에 대한 특별한 법이 없었다"라며 "아직까지 보호할 기밀의 구체적 범위가 규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기지가 탁 트여있다"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방문했던 날은 일요일이어서 그랬는지 훈련이 없어 기지는 아주 조용했다. 하지만 평일 훈련을 하는 시간에는 비행기 이착륙 소음이 어마어마하다고 한다.

옥상 계단 끝에 있는 1미터 남짓의 벽에는 구멍이 하나 있다. 이 구멍은 오키나와 전쟁이 실질적으로 끝난 날인 6월 23일(위령의 날)의 태양 일몰선에 맞춰서 만들어졌다. 일몰의 빛이 이 구멍을 통과해 태양 빛이 일직선으로 들어오게 돼 있다. 사키마 관장은 "이 빛은 평화를 염원하는 빛"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방문했을 때는 오전이었던 데다가 갑자기 비까지 내려 '평화의 빛'을 직접 보지는 못했다. 아쉬웠다. 하지만 평화를 염원하는 마음은 우리의 마음속에도 전해졌다.

오키나와의 평화 운동가들은 오키나와 전쟁과 같은 비극적인 전쟁이 두 번 다시 재현돼서는 안 된다고 입을 모아 말한다. 그들이 '헌법 9조 개헌 반대' '미군기지 반대' '반전평화'를 외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일본의 재무장, 오키나와의 미군기지는 동아시아의 권역에 있는 국가에 엄청난 영향을 끼친다. 한국도 예외는 아니다. 즉, 오키나와의 외침은 우리의 외침과 맞닿아 있을 수밖에 없다. 전쟁의 역사를 잊지 않고 알리는 활동, 평화를 지키기 위한 그들의 분투에 동지의식까지 샘솟았다.

일본 제국주의의 부활을 꿈꾸며 '후텐마 기지 이전' '특정비밀보호법 제정' '집단자위권 행사 용인' 등을 추진하고 있는 아베에게 권하고 싶다. 단 한 시간만이라도 찌비찌리 가마의 어둠 속에 들어가 보라고….

덧붙이는 글 | 오키나와 기행은 1월 25일~28일까지 겨레하나 여행사업단 '더하기 휴'의 '서승 교수와 떠나는 오키나와 평화감성여행' 프로그램으로 진행되었습니다.



태그:#집단자결, #찌비찌리 가마, #킨조 미노루, #사키마 미술관, #오키나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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