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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8일 금요일] 집 나간 자식들이 돌아오다

오늘로 사흘째 일을 하면서 도저히 한 가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나를 발견했다. 한 가지 일만 계속해야 진척이 되는데, 혼자서 일하다 보니 힘들고 지루해서 30분 이상을 계속할 수가 없다. 결국 네 가지 일을 돌아가면서 20, 30분씩 하게 되었다. 일의 진척은 더뎠지만 지루하지 않아 힘이 덜 들었다.

하나, 타고 남은 장작들을 삽으로 얼음을 깨가며 꺼내는 일
둘, 모은 장작들을 태우는 일
셋, 베란다의 폐기물들을 비닐 포대에 주워 담는 일

넷, 손수레에 음식물 폐기물을 실어다 밭에다 뿌리는 일

괴로운 철거 작업을 하는 중에도 즐거운 일이 생긴다. 베란다에 무수히 널려 있는 불탄 폐품들 속에서 화재 피해를 입지 않은 물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먼저 작년 시월 농기계 박람회에서 산 모판 묶는 도구를 찾았다. 아이디어가 뛰어난 제품으로 모내기를 하고 나서 모판을 정리할 때 쓰려고 소중하게 보관하다가 사용도 못하고 다 태워 버린 줄 알았다. 그런데, 타 버린 포장지 속에서 약간의 그을음만 묻었을 뿐 잘 보존되어 있었다.

수천(기자의 어머니)께서 정성들여 담가 놓으신 매실 진액과 고추 장아찌도 피해가 없었다. 까치와의 경쟁에서 이겨 거둔 땅콩과 들깨도, 탄저병과 싸우며 힘들게 거두었던 고추 가루도 잿더미 속에서 살아 있었다. 그 밖에도 커다란 스테인리스 그릇 두 개, 김치 누르는 돌, 스패너, 하얀 설탕 등 끊임없이 쓸 수 있는 물건들이 나타났다. 집 나간 자식이 살아서 돌아온 것 같았다.

좋지 않은 소식도 있었다. 고물상에 베란다를 뜯어가라고 했더니 샌드위치 패널이 불에 타서 활용에 문제가 있고, 화재 현장이라 철거의 어려움이 있어서 못하겠다고 한다. 하루라도 빨리 철거를 해서 집짓기의 속도가 붙게 되기를 바랐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마을 입구 내곡 슈퍼의 아주머니가 오셨다. 수천께서 고추 가루를 사려고 전화를 드렸더니 부랴부랴 한 봉지를 싸들고 오셨다. 게다가 인삼밭 작업자들을 위해서 월요일부터 국을 끓이는데, 좀 넉넉하게 끓여서 가지고 오시겠다고 한다. 참 고마운 인심이다.

마을 청년들이 회관 뒷마당에 1년 동안 쌓여 있던 재활용품들을 정리하는 대청소를 마치고 돼지 한 마리를 잡았다. 우리가 일을 끝내고 들어가자 회관 거실에서 동네 잔치가 벌어졌다. 소주 한 잔에 돼지고기 비계를 충분하게 먹었더니 잿더미로 낀 때가 잘 씻겨 내려간다. 인터넷 회선은 아직 복구되지 않아 외로웠다.

목조주택이 의외로 화재에 강해서 한 시간 여 동안의 화재에도 전소되지 않았다. 샌드위치 패널은 화재를 키우고 유독가스를 내뿜는 등 집과는 어울리리지 않는 소재다.
▲ 화재로 소실된 우리집 목조주택이 의외로 화재에 강해서 한 시간 여 동안의 화재에도 전소되지 않았다. 샌드위치 패널은 화재를 키우고 유독가스를 내뿜는 등 집과는 어울리리지 않는 소재다.
ⓒ 박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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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3월 9일 토요일] 나 홀로 목조주택학교가 되다

어제 늦은 밤에 부천으로 돌아왔더니 아침 8시 반이 다 되어서야 간신히 눈을 뜰 수 있었다. 아이들과 아내는 개학을 해서 적응하느라 몹시 피곤했고, 무일(기자의 호)도 오랜만에 사흘 동안 노동을 한 터라 쉽게 몸을 일으키지 못했다. 김밥과 고속도로 휴게소의 커피로 아침 식사를 대신했는데도, 오전 11시가 다 되어서야 마을 회관에 도착했다.

동생 부부와 사촌 누이까지 모두 9명의 인력이 동원되었고, 거래하던 고물상 사장님이 뒤 베란다를 뜯으러 와 주셨다. 오후에는 윗집에 사는 서 과장님과 양씨 아저씨까지 일을 도와 주셔서 철거 작업과 폐기물 정리 작업, 공사 준비까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사람이 많이 움직이다 보니 휴식 시간도 별로 없이 일을 했는데도 피곤을 모르겠고, 쉬고 있었는데도 다른 사람들이 움직이니 일이 진행이 되었다. 이래서 함께 일하는 것이 즐거운 모양이다.

동네 분들은 연세들이 높으셔서 눈과 입으로만 격려를 해 주셨다. 양씨 아저씨와 서 과장님은 쉬는 날 쉬지도 못하고 공사에 방해가 되는 폐목들을 한 차 가득 전부 이장네 마당으로 옮겨서 태울 준비를 해 주셨다. 드럼통에 두 세 토막씩 찔끔찔끔 태우니 진척이 되지 않았는데, 트럭으로 한 가득 실어서 옮겨 버리니 금방 폐목들이 치워져 버린다. 거실과 안방에 있는 가구들 중에서 식탁은 하우스로 옮겨서 공사기간 동안에 점심 식사할 장소를 확보했고, 침대와 중요한 가구들은 전부 컨테이너와 하우스로 분리해서 옮겨놓았다.

선구네 식당 부부가 위로 방문을 오셔서 저녁 식사를 하자고 하시는데, 우리 식구가 워낙 대부대라서 다음에 부모님 모시고 가겠다고 했다. 바쁜 가운데도 정성을 다해 도와주시니 너무 고맙다. 늦은 오후에 가스 연결을 위해 오신 가스집 사장님이 석유통에 남아 있는 석유를 어떻게 빼내고 보관할 것인지에 대해 현장을 지휘해 주셔서 어려운 일을 잘 처리할 수 있었다. 일하는 내내 농담으로 사람들을 즐겁게 해 주더니 가스를 연결해 준 돈은 받지도 않고 떠나 버리신다. 재미있고 고마운 분이다.

오늘 역시 가장 고마운 분은 고물상 사장님이다. 아침까지 근무하고 피곤한 몸을 이끌고 뒤 베란다 뜯어내기라는 골치 아픈 작업을 묵묵히 하셨다. 고물들이 없어서 생활비 벌기가 어려워 할 수 없이 취직을 하셨다고 한다. 그래도 벌이가 시원치 않아 쉬는 날이면 고물 작업을 하러 다닌다고 한다. 일은 힘들어도 오늘처럼 가져갈 것이 많은 날이 더 좋다고 한다. 무일이 고물값을 받지 않겠다고 했더니 너무 고마워하신다. 무일로서도 같이 일을 해서 한결 쉽게 철거작업을 해 낼 수 있었다.

불에 녹은 건축자재와 생활용품들은 모두 재활용이 불가능한 폐기물이다. 재산을 잃은 나도 힘들지만 폐기물을 떠 안은 지구도 아프다. 화재는 모두에게 불행이다.
▲ 화재 폐기물 불에 녹은 건축자재와 생활용품들은 모두 재활용이 불가능한 폐기물이다. 재산을 잃은 나도 힘들지만 폐기물을 떠 안은 지구도 아프다. 화재는 모두에게 불행이다.
ⓒ 박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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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거 작업을 하면서 오늘도 수입을 얻었다. 거의 반드럼에 가까운 석유가 그 상황에서도 그대로 타지 않고 남아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사용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고마운 일이다. 쇠로 만든 기름통이 매우 어설퍼 보였는데, 불 속에서도 견뎌낸 것을 보면 대단한 일이다. 만일 지금 남아 있는 기름에 불이 붙었다면 화재 피해는 훨씬 더 컸을 것이다. 기본에 충실하고 안전하게 만들어진 제품들이 얼마나 유용한 것인지를 기름통을 보며 알 수 있었다.

일을 마치자 마침 장목수가 회관으로 찾아왔다. 목조주택학교를 열려고 했는데, 신청자가 적어서 열지 않고, 목수들과 작업을 하기로 했다고 한다. 장목수로서는 학생들이 없어서 인건비 때문에 부담스러운 공사가 될 것이다. 무일의 입장에서는 매우 안타까운 일이지만 일을 직접 하면서 배우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고, 나홀로 학생인 상황이니 배우는 환경은 더 좋을 것이다. 수천께서도 여러 사람 밥 해 먹이는 부담이 줄었으니 고생이 덜어지셨다. 좋게 생각하자.

기름 보일러를 설치할 것인지 화목 보일러를 설치할 것인지를 놓고 다시 한 번 가족들과 논의를 했다. 겨울철 난방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농한기에는 시골집을 비워 두기로 하고, 기름 보일러를 설치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시골집을 비워야 한다는 아쉬움이 있지만 한겨울을 도시에서 보내는 것도 그리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일요일의 휴식을 위해 가족들과 함께 부천으로 올라왔고, 진통제와 한방 몸살약을 한 병 마시고 잠자리에 들었다. 인터넷 선은 아직도 복구되지 않았다.

주방과 식당, 휴게소로 활용이 된 비닐 하우스. 이것이 없었다면 매끼 점심식사비 지출도 컸을 것이다. 수리비 절감에 큰 도움이 되었다.
▲ 못자리 하우스에 설치한 식당 주방과 식당, 휴게소로 활용이 된 비닐 하우스. 이것이 없었다면 매끼 점심식사비 지출도 컸을 것이다. 수리비 절감에 큰 도움이 되었다.
ⓒ 박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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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기자의 다음 블로그 무일농원에 이 기사의 초안이 게재되어 있습니다.



태그:#무일, #무일농원, #화재, #집짓기, #목조주택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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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없이 살아도 나태하지 않는다. 무일입니다. 과학을 공부하고, 시도 쓰며, 몸을 쓰고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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