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12장 춘계문답 (1)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관련사진보기


현관 입구에 혁련지가 눈에 광채를 내며 서 있다.

"어? 혁련 소저, 오늘은 웬일로 이리 일찍 오셨소이까?"

사내가 갑자기 물먹은 창호지처럼 풀어지며 혁련지를 향해 예를 취했다. 

"대체 무슨 권리로 제 손님을 이렇게 함부로 대하는 거예욧?"

혁련지가 화난 얼굴로 위약청을 향해 따지듯 물었다.

"소, 손님? 이 자가 소저의 손님이란 말입니까?"
"그래요, 내 손님이에요."
"그, 그럼 미리 말씀을 주시지 그랬어요."
"내가 손님 오는 걸 댁한테 일일이 얘기해야 하나요?"

혁련지가 쌀쌀하게 나오자 위약청은 더욱 수그러졌다.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런데 손님이 집안을 이 지경으로 만든단 말입니까?"
"아니오! 내가 그런 게 아니란 말이오."

관조운이 소리쳤다.

"일단 저 포박이나 빨리 풀어주세욧."

혁련지는 사내에게 명령조로 말했다.

사내는 어깨에서 칼을 꺼냈다. 꺼내고 보니 박도(朴刀)이다. 박도는 날이 넓고 두껍기 때문에 대개 양손으로 잡는다. 그래서 쌍수대(雙手帶)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한다. 그런데 이 자의 박도는 손잡이 부분이 짧고 날이 길다. 두 손으로 잡을 부분을 한 손만으로 잡게 만든 것이다. 박도는 어지간한 힘이 없으면 도의 무게에 휘둘리게 된다. 그런데 이 자는 마치 가벼운 검처럼 한 손에 들고 있다. 사내는 관조운의 가슴을 향해 사악 휘둘렀다. 그러자 관조운의 몸을 묶고 있던 천이 바닥에 털썩 떨어졌다.

"무슨 짓예욧! 예의 없이."

혁련지가 고함을 꽥 질렀다. 사내는 머쓱한지 머리를 긁었다. 자신의 칼 솜씨가 칭찬은커녕 무례하다고 핀잔만 들으니 억울한 표정이다. 어쨌거나 그 무거운 박도로 사람의 몸을 묶고 있는 천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베어낸 것을 보면 그 자의 칼 솜씨는 감탄할 만했다. 관조운의 학창의는 보푸라기 하나 건드리지 않고 말짱했다.

혁련지는 그제서야 집안을 둘러보았다. 그녀는 엉망이 된 자신의 집을 보자 얼굴빛이 변했다. 특히 도자기가 진열된 방에서는 분을 못 이겨 씩씩 거리는 숨소리가 거실까지 들려왔다. 도자기는 아마 일부러 수집한 예술품였던 모양이다. 잠시 후 거실로 나온 혁련지는 감정을 추스렸는지 다시 차분한 인상으로 돌아와 있다. 그녀는 위약청을 향해 말했다.

"인사하세요. 이 분은 저와 같은 사문으로 사형뻘 됩니다."
"사형이면 사형이지 사형뻘은 뭡니까?"

위약청이 투박한 목소리로 반문했다.

"그냥 그렇게 알고 있으세요. 같은 사문이지만 배움이 달라서 그래요"

혁련지가 대충 얼버무렸다.

"우리 이미 인사를 나눴죠?"

관조운이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거, 미안하게 됐수다. 제 성질머리가 워낙 급해서 앞뒤 안 가리다 보니. 형씨에게 못할 짓을 했소이다."

위약청이 미안했던지 포권을 하더니 허리를 굽혀 절을 했다.

이때다! 관조운은 위약청의 낭심을 냅다 걷어찼다.

으악!

위약청이 사타구니를 부여잡고 허리를 또 한번 꺾었다. 그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며 어깨 위의 박도에 손이 갔다.

"그만들 해욧! 하여튼 사내들이란……"

혁련지가 다시 한 번 고함을 꽥 질렀다.

"왓핫핫핫, 좋소. 이걸로 피장파장 합시다."

갑자기 위약청이 표정을 풀고 호탕하게 웃었다. 관조운도 포권을 하며 그의 사과를 받아들였다.

"그런데 아까 화산파 도인이라고 하셨는데 무슨 도인의 성정이 그리 급합니까?"

관조운이 슬쩍 짚고 넘어갔다.

"실은 저는 도(道)를 연성하는 도사가 아니고 무예를 연마하는 속가제자일 뿐입니다. 혹시 화산오걸(華山五傑)이라고 들어보셨는지요?"
"……"
"이 공자님은 책만 보는 서생이라 강호의 소식을 모르십니다."

관조운이 가만히 있자, 혁련지가 나서 도와주었다. 그러더니 관조운을 향해 다시 말했다.

"말 만들기 좋아하는 강호인들이 화산파에서 기량이 뛰어난 젊은 협객 다섯 사람을 모아 화산오걸이라 칭한답니다. 위 대협은 개산일도(蓋山一刀)라는 별호로 오걸 중 두 번째로 치고 있습니다."

혁련지가 대협이라고 칭하자 위약청은 얼굴이 환해지며 입가가 절로 올라갔다.

"근데 집안이 이렇게 된 건 대체 어찌된 일이오?"

관조운 물었다.

혁련지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입을 열었다.

상인은 멀리 떨어진 고장에 상품을 조달하는 객상(客商)과 지역 상인인 토상(土商), 그리고 점포상인인 좌고(坐賈)로 나눈다. 객상은 규모가 클수록 이익이 많이 남는 관계로 대상인들이 장악하고 있는데, 이 가운데 가장 유명한 상인들이 '산서상인(山西商人)'과 '신안상인(新案商人: 신안(新案)은 현재의 안휘성을 일컫는 휘주부의 옛 이름이다.)'이다. 영락대제는 황궁을 북평(北平: 현재의 북경)으로 옮긴 후 비록 북쪽으로 쫓겨 갔다고는 하나 아직까지 위협적인 몽고족 토벌을 위해 친정(親征)을 했다. 전쟁 동안 군량미 확보를 위해 산서지방 상인들에게 식량을 운반케 했다. 그 대가로 나라가 전매하고 있던 소금판매권을 주는 바람에 이들은 미곡상과 염상을 겸하게 되었다.

산서상인은 황실과의 밀착과 그들로부터 받은 특혜로 거대한 부를 쌓았다. 반면 신안상인은 객상으로 활약하여 부를 축적했다. 그들은 풍부한 곳의 산물을 귀한 곳으로 운반하여 차액을 얻는 본래 의미의 상업에 충실했다.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상업의 정도를 걸은 신안상인은 황실에 밀착하여 특혜로 성장한 산서상인을 은근히 무시하였다. 그러나 성화제 연간 조세를 은으로 납부할 수 있는 은납제로 바뀌자 화폐의 유통만으로 돈을 벌 수 있는 염상이 된 자가 많아졌다. 이들은 소금 도시 양주로 이주한 산서상인과 함께 염업계의 주도세력이 되었다. 이제 산서니 신안이니 하는 상인의 구별이 무의미하게 되었다. 이들의 주요 업무는 염상(鹽商)과 전당상(典當商: 금융업)이 되었다. 이제 소금의 유통은 소주를 중심으로 산서상인 출신의 상계(商契), 신안상인 출신의 상계, 본래 소주 본토박이인 동정상계로 각축이 벌어졌다.

덧붙이는 글 | 당분간 화, 목, 주2회 연재합니다.



태그:#무위도 29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