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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는 죽으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으면 무덤을 남긴다. 그가 권력 언저리에 있었거나 국가를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면, 그 무덤은 크고 화려할 뿐더러 많은 사람이 두루 찾을 수 있는 묘지에 묻혀 추모를 받기도 한다. 가죽 한 장만 달랑 남기고 영원히 무(無)의 존재가 되는 호랑이와 달리 사람은 죽어서도 산 자들에게 부단히 영향을 미치는 살아 있는 존재가 되는 것이다.

살아있는 자는 죽은 자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

 <죽은 자의 정치학> 표지
 <죽은 자의 정치학> 표지
ⓒ 모티브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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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미국·한국 국립묘지의 탄생과 진화'라는 부제가 붙은 이 책 <죽은 자의 정치학>은, 죽은 자를 매개로 산 자들의 정치적 열망과 의지가 어떻게 투영되는지를 분석하고 있다.

저자 하상복이 대상으로 삼은 분석 공간은 프랑스의 빵떼옹 국립묘지와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 한국의 국립 서울 현충원이다.

무덤을 통해 죽은 자와 산 자가 만나고, 산 자들이 무덤 속의 죽은 자를 놓고 벌이는 정치적 투쟁은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현상이다. 저자에 따르면, 죽은 자와 그를 담고 있는 공간은 정치적 욕망이 표출되는 가장 중요한 자리가 되어 왔다.

저자는 살아 있는 자는 권력의 이해관계 속에서 죽은 자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고 말한다. 그 지점에서 사자와 그가 안장되어 있는 곳은 정치적 연극의 소재와 배경이 된다. 국가가 관리하는 국립묘지는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공간이다. 저자는 이들 공간에서 정치와 권력의 성격, 그 근대화의 과정을 본다.

근대국가는 군주라는 정치적 인격체에 토대를 두고 움직이는 전통국가와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근대국가에는 국가를 표상하는 인격적 존재가 없고 국민(nation)이라는 추상적인 집단적 인격에 의해 대표된다. 주권을 표상하는 인격적 실체가 없는 국가를 향한 애국의 심리를 창출하기 위해서는 국민의 존재와 가치를 감각적으로 재현해내는 일이 필요하다. 근대의 국립묘지는 그와 같은 정치적 원리의 귀결이다. (21쪽)
 
저자는 왜 '죽은 자의 정치학', 곧 국립묘지의 정치적 성격을 문제 삼는가.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국립묘지'를 둘러싼 역사적 변천 과정과 그에 얽힌 정치 환경의 변화를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국립묘지의 변천사는 다사다난했던 한국 현대사이기도 하다. 

군인 묘지였던 국립 묘지, 엄격한 위계질서 공간으로 변형

이 책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국립묘지는 1948년 여순사건과 1950년 한국전쟁을 배경으로 창설되었다. 국립묘지는 역사상 유례 없는 이들 두 개의 '반공주의' 사건에서 희생된 군인과 경찰관들을 안장하기 위해 1956년에 만들어졌다. 국립 서울 현충원의 최초 명칭이 '국군묘지'였던 까닭이다.

저자는 그뒤 국립 현충원이 반공군사주의가 응축된 공간으로 자리매김해 오다가, 이승만과 박정희라는 두 권력자가 묻히면서 새로운 정치적 운명을 맞게 되었다고 분석한다. 단지 군인들의 묘소였을 뿐인 국립묘지가 권력을 중심으로 한 엄격한 위계질서의 공간으로 변형된 것이다. 저자는 서울 현충원에서 참배 정치가 일상적으로 연출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본다.

당연하게도, 유명 정치인들이 벌이는 참배 정치는 '정치적'이다. 정치인의 참배 동선은 그들의 정치적 지향점과 목표, 현재의 정치 구도 등 많은 정치적 메시지를 공공연히 드러낸다. 정치인의 참배 정치는 국립 서울 현충원울 둘러싸고 벌어지는 이념적 긴장과 균열을 잘 보여 준다.

저자에 의하면 국립묘지를 둘러싼 참배와 죽은 자의 정치는 보편적인 정치 현상이다. 이와 관련하여 저자가 주목하는 것은 '묘지'의 이중적인 성격이다. 묘지는 대결의 대상이고 갈등의 표상인 동시에 화합의 장치이자 통합의 상징이 될 수 있다. 지금 우리나라는 묘지와 사자를 사이에 놓고 끊임 없이 긴장하고 대립한다. 저자가 한국의 국립묘지를 분석하기 위해 프랑스의 빵떼옹이나 미국의 알링턴 국립묘지를 비교 공간으로 끌어온 배경이 여기에 있다.

서구의 두 나라, 미국과 프랑스는 사자와 국립묘지를 놓고 치열한 이념 갈등을 겪었지만, 궁극적으로 그 속에서 화해와 통합을 실천했다. 프랑스는 19세기 후반 한 위대한 정치가(빅토르 위고)의 장례식을 계기로 국민적 화합의 가능성을 창출해냈으며, 미국은 19세기 말 남부의 대의를 위해 사망한 전몰병사들의 시신을 연방주의의 상징적 공간인 알링턴 국립묘지 안으로 수용함으로써 그 목표를 달성할 수 있었다. (24쪽)

프랑스와 미국이 경험한 일을 우리도 만날 수 있을까. 당분간은 힘들어 보인다. 2009년 고 김대중 전 대통령의 안장과, 전두환 전 대통령의 경호실장인 안현태씨를 둘러싸고 벌어진 극심한 갈등과 대립을 떠올려 보자.

 지난 2009년 8월 23일 오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안장식에서 이희호씨가 마지막 헌화와 분향을 하며 오열하고 있다.
 지난 2009년 8월 23일 오후 서울 동작구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고 김대중 전 대통령 안장식에서 이희호씨가 마지막 헌화와 분향을 하며 오열하고 있다.
ⓒ 인터넷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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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에 따르면, 당시 보수우익단체 회원 100여 명은 기자회견을 통해 김대중 전 대통령의 현충원 안장을 "친북세력의 알박기"로 규정했다. "또 당하지 않으려면 이제라도 온 국민이 빨갱이 타도에 나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들은 대통령까지 지낸 '김대중'을 여전히 '빨갱이'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현충원에 묻힌 김 전 대통령은 박정희 전 대통령의 묘소 아래 쪽에 있다. 봉분 형태로 되어 있는 박 전 대통령의 묘소는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보다 더 '높은' 쪽에 있다.

저자에 따르면, 국립 서울 현충원의 묘역 배치도는 박 전 대통령의 묘가 현충원의 가장 '높은' 곳을 차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이를 권력의 영속성과 절대성을 향한 열망, 혹은 죽어서도 최고 권력자의 위치를 차지해야 한다는 정치적 열정 등으로 읽는다.

국립현충원과 민주묘지 사이, '적극적 빈공간' 만들자

내가 보기에 국립 현충원은 이율배반적이다. 민족과 국가를 위해 헌신한 사람만이 아니라 반민족적인 전력을 가진 이들도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최초에 국군묘지로 출발한 국립 현충원의 역사적 연원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국립묘지가 갖는 정치적 위상이나 국가적 의미 등을 고려하면 심각하게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되는 문제다.

저자가 인용하는, 역사학자 박한용의 분석 자료(<친일파들의 국립묘지 안장실태>)에 따르면, 국립 서울 현충원에는 만주국군 상위 출신으로 육군대장과 국회의장을 역임한 정일권을 포함하여 30여 명의 반민족주의자 군인들이 묻혀 있다. 대전 현충원에도 군 출신으로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이들이 16명이나 있다.

저자는 용맹스러운 군인으로 표상되는 애국주의가 친일이라는 반민족주의뿐만 아니라 군사쿠데타라는 반민주주의마저 탈색해 버린다고 말한다. 그 사례로 저자는 대전 현충원에 안장된 안현태를 포함해 12·12 군사반란 및 5·18 내란 사건 관련자들인 김호영, 유학성, 정도영, 정동호 등의 군인들을 들고 있다.

안현태씨를 둘러싼 논쟁은 특히 더 격렬했다. 안씨는 뇌물수수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은 전력도 갖고 있었다. 저자가 보기에 그를 현충원에 안장할 것인가 말 것인가의 문제는 12·12 내란의 수괴인 전두환과 노태우를 국립묘지로 받아들이는 문제와 직결되어 있었다.

저자의 말처럼, 안현태의 안장과 동일한 경로를 밟게 된다면 전두환과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의 국립 현충원 안장 또한 가능해진다. 전·노 두 사람은 내란죄를 범했지만 사면·복권되었다. 이에 따라 안현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안장이 국립묘지의 영예성에 부합하지 않는가의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안장대상 심의위원회를 개최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안현태는 그 심의 과정을 통해 현충원 안장이 결정되었다.

 2012년 10월 16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서울 수유리 4.19국립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2012년 10월 16일, 박근혜 새누리당 대선후보가 서울 수유리 4.19국립묘지를 참배하고 있다.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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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에 따르면, (현충원으로 대변되는) 국립묘지는 1990년대 이후 민주화 과정에서 국립 3·15, 4·19, 5·18민주묘지가 건립되면서 애국의 공간으로서의 유일함과 절대성의 위상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국가주의 메시지에 충실한 현충원과, 민주의 이름으로 국가권력과의 정치적 긴장을 말해주는 민주묘지 사이의 대립 구도가 정립되었다. 저자는 2000년대 초반부터 사자의 정치의 전개되는 배경도 이런 점에서 찾고 있다.

현재 한국의 정치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자의 정치는 보수의 정체성이 뿌리내리고 있는 국립 현충원의 이념적 외벽을 진보가 흔드는 양상이다. 한국의 보수는 반공군사주의에 기초한 애국주의 그리고 그 이념을 체현하는 권력자의 공간인 국립 현충원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정체성을 발견하고 있고, 그 정체성을 흔드는 일체의 정치적 의도와 행위를 부정하고 공격하고 있다. ··· 역으로 한국의 진보는 민주묘지가 구현하고 있는 역사와 가치 속에서 자신들의 정치적 존재성을 찾고 있으며, 민족·자주의 이름으로 국립 현충원의 제도와 양상을 비판하고 있다. 2011년 안현태 안장을 놓고 벌인 일대 대결이 그 지점을 명확히 드러내고 있다. (450~451쪽)

국립 현충원과 민주묘지를 하나로 통합하는 일은 요원해 보인다. 저자의 말처럼, 두 묘지 사이의 이질성은 단순한 차이가 아니라 정치적 적대성으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서와 같이 좌우의 존경을 한 몸에 받는 위대한 인물이 죽더라도, 현재로서는 그를 어디에 묻을 것인가를 놓고 격렬한 다툼이 일어날 게 뻔하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국립 현충원과 민주묘지 사이에 '새로운 묘지'를 건립하는 것을 하나의 대안으로 상상한다. 그 묘지는 좌와 우, 진보와 보수 모두가 인정하는 진정한 애국적 인물을 받아들인다. 이 프로젝트를 위해서 프랑스가 운영하고 있는 것처럼, 안장 후보자의 공과를 국민적 차원에서 철저히 검증할 충분한 '유예의 시간'이 필요하다.

물론 그 '새로운 묘지'에 들어갈 수 있는, 진정한 애국지사가 없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 그럼에도 '빈 공간'으로 남아 있는 그 '새로운 공간'을, 저자는 한국의 정치사회적 현실을 말해주는 상징으로 볼 수 있다고 말한다. 왜 그런가.

그 빈 공간은 프랑스 루이 필립의 7월 왕정이 좌우 어느 쪽도 자극하지 않기 위해 단 한 건의 빵떼옹 안장식도 거행하지 않음으로써 만든 '소극적' 빈 공간이 아니라, 좌우의 화해를 가능하게 할 인물을 기다리는 '적극적' 빈 공간이기 때문이다. (454쪽)

내가 보기에 국립 서울 현충원으로 상징되는 '호국'과 국립 5·18 민주묘지 등으로 상징되는 '민주'는 전혀 별개의 가치가 아니다. 호국 없는 민주나 민주가 빠진 호국은 국가 공동체 전체에 막대한 폐해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문제는 한국의 진보와 보수가 이들 사이에 평화적인 공존이 이루어지기 힘들다고 인식하고 있다는 점이다. 그들은 심지어 이들이 서로 적대적이고 상반되는 가치를 갖고 있는 것처럼 바라본다.

제3의 새로운 공간을 만들어 적극적인 빈 공간을 그려보는 저자의 상상이 의미있게 다가오는 이유다. 죽은 자를 활용하는 극심한 대결의 정치나 상징 정치로는 그 어떤 진정한 의미의 호국이나 민주도 이룰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상상 속에서나마 빈 공간을 바라보며, 그곳을 채울 호국·민주 인사를 염원하는 정치인과 국민들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덧붙이는 글 | <죽은 자의 정치학> (하상복 지음 | 모티브북 | 2014. 2. 15. | 478쪽 | 23,000원). 제 오마이뉴스 블로그(blog.ohmynews.com/saesil)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죽은 자의 정치학 - 프랑스 미국 한국 국립묘지의 탄생과 진화

하상복 지음, 모티브북(2014)


#<죽은 자의 정치학>#하상복#모티브북#국립 현충원#민주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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