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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달 28일 대가야의 역사가 여전히 살아 숨쉬는 듯한 경북 고령을 가까운 지인 두 분과 함께 다녀왔다. 562년 신라 진흥왕의 공격을 받고서 역사의 뒤안길로 그만 사라져 버린 대가야는 지금으로부터 1600여 년 전에는 철기시대의 강력한 무력과 농경문화의 발전으로 우리 고대사의 한 축을 이루며 가야 사회를 주도했던 나라였다.

 주산 기슭에 자리 잡은 대가야역사관. 주산 능선 따라 줄지어 늘어선 대가야시대의 무덤들이 보인다. 
 주산 기슭에 자리 잡은 대가야역사관. 주산 능선 따라 줄지어 늘어선 대가야시대의 무덤들이 보인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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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오전 9시 20분쯤 마산에서 출발하여 대가야박물관(경북 고령군 고령읍 대가야로 1203)에 이른 시간은 11시께. 대가야 왕을 비롯하여 왕족과 귀족들의 무덤 200여기가 능선을 따라 줄지어 늘어선 주산(310m) 기슭에 자리 잡은 대가야역사관을 바라보자 왠지 모를 감동이 밀려왔다.

우리는 대가야역사관 안으로 들어섰다. 지산동고분군 최초의 왕릉인 지산동 73호분에서 출토된 봉황무늬 고리자루큰칼을 비롯하여 무늬 없는 고리자루칼, 쇠창, 쇠화살촉 등이 전시되어 철의 왕국 대가야의 위용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전성기를 누리던 대가야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서 크게 유행했던 금귀걸이 장식들을 보면서 정교하면서도 화려했던 그 시대의 세공에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다.

전성기 당시 대가야는 합천, 거창, 함양, 남원 등 넓은 지역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정치제도의 발전이 백제나 신라와 비슷한 수준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대가야의 건국신화가 하늘에서 여섯 알이 내려왔다는 금관가야의 신화와 사뭇 다른 것도 흥미로웠는데, 42년 '정견모주'라는 가야산의 여신과 '이비가'라는 하늘신 사이에 태어난 아들 가운데 형이 대가야의 시조 '이진아시왕'이 되고, 아우는 금관가야의 시조 '수로왕'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대가야왕릉전시관에는 지산동 44호분의 내부를 실물 크기로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대가야왕릉전시관에는 지산동 44호분의 내부를 실물 크기로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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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왕이 묻혀 있는 '으뜸돌방.' 2명의 순장자도 누워 있다.
 왕이 묻혀 있는 '으뜸돌방.' 2명의 순장자도 누워 있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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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가야역사관에서 5분 정도 걸어 올라가면 대가야왕릉전시관이 나온다. 순장된 사람이 40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지산동 44호분의 내부를 원래 모습 그대로 재현해 놓았다. 대가야에서는 왕이나 신분이 높은 사람이 죽었을 때 산 사람을 죽여 함께 매장하는 순장이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다 한다. 이는 사람이 죽은 후에도 살아 있을 때의 삶이 지속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대가야왕릉전시관.
 대가야왕릉전시관.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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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 가운데에 3기의 대형 돌방이 보였다. 가장 큰 돌방은 왕이 묻힌 '으뜸돌방'으로 2명의 순장자도 누워 있었다. 다른 2기는 왕의 내세 생활을 위해 껴묻거리를 넣은 '딸린돌방'인데, 거기에도 각각 1명의 순장자가 있다. 무엇보다 특이한 점은 대형 돌방을 둘러싸듯 배치된 32기의 순장돌덧널이 있다는 거다. 이렇게 별도의 순장덧널을 만든 장례 풍습은 세계적으로도 거의 유례를 찾아보기가 어렵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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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행 가운데 역사를 전공한 김건선 선생이 고령에 오면 꼭 들른다는 소문난 할매국밥집으로 가서 소주를 곁들여 돼지국밥을 먹었다. 개인적으로는 평소 육류를 피해 식사를 하는 편인데 이런 경우는 어쩔 수가 없다.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밥과 술을 함께하는 자리는 언제나 즐겁다.

오후 2시께 우륵박물관(고령읍 가야금길 98)에 도착했다. 가야금의 창시자 우륵은 대가야 성열현 출신으로 가실왕의 명을 받아 이곳 정정골에서 가야금을 만들고 작곡, 연주도 하였다. 대가야가 멸망하기 전 우륵은 신라로 망명하여 신라 음악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가야금을 만들던 곳, 금장지. 
 가야금을 만들던 곳, 금장지.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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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야금 울림통 위판을 만들기 위해 가야금 크기에 맞게 세로로 잘라낸 오동나무를 건조하고 있다.
 가야금 울림통 위판을 만들기 위해 가야금 크기에 맞게 세로로 잘라낸 오동나무를 건조하고 있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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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륵박물관 건물 바깥에는 오동나무 건조장이 있다. 수령이 25년 이상 된 오동나무를 건조해서 가야금 울림통 위판을 만드는데, 오동나무를 가야금 크기에 맞게 세로로 잘라내어 건조하는데 무려 5년이나 걸린다 한다. 오동나무의 섬유질이 완전히 제거되어야 가야금 소리가 변하지 않고 뒤틀림 또한 막을 수 있기 때문이다.

5년 동안의 기나긴 건조 과정에도 수시로 앞뒤를 뒤집어 주거나 위아래로 방향을 바꾸어 주어야 나무가 상하지 않고 잘 건조된다. 그렇게 공들여 건조한 나무 가운데 연주자용 가야금을 만들 수 있는 것은 고작 10% 정도밖에 안된다 하니 좋은 악기를 하나 만들어내는데 얼마나 오랜 정성이 요해지는지 그저 감탄스러울 따름이다.

 고령 장기리 암각화(보물 제605호). 대가야시대에 와서 이곳 바윗돌을 떼어 무덤 뚜껑돌로 사용한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고령 장기리 암각화(보물 제605호). 대가야시대에 와서 이곳 바윗돌을 떼어 무덤 뚜껑돌로 사용한 어처구니없는 일도 있었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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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동기시대 때 제사를 지내던 터로 여겨지며, 바위면에 새겨진 동심원 그림은 태양신을, 가면 모양은 신의 얼굴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청동기시대 때 제사를 지내던 터로 여겨지며, 바위면에 새겨진 동심원 그림은 태양신을, 가면 모양은 신의 얼굴을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 김연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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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일행은 우륵박물관을 뒤로하고 고령읍 회천변의 알터마을 입구에 위치한 고령 장기리 암각화(보물 제605호, 고령읍 아래알터길 15-5)를 보러 갔다. 너비 6m, 높이 3m 정도의 바위면에 나이테 같은 동심원과 네모진 가면 모양의 그림 등이 군데군데 새겨져 있었다. 동심원은 태양신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며, 가면 모양은 신의 얼굴을 상징하며 부적과 같은 의미로 새긴 듯했다.

이곳은 청동기시대 때 제사를 지내던 터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바위그림들은 풍년과 자손의 번성을 위해 제단을 만들고서 비, 바람, 구름, 농사를 주관하던 태양신을 향해 간절한 소원을 빌었던 농경사회 신앙을 표현한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다. 하지만, 조상들이 신앙으로 숭배했던 장기리 바위그림이 훼손되기도 했다. 대가야시대에 이곳 바윗돌을 떼어 무덤 뚜껑돌로 사용해 버린 어처구니없는 일을 겪기도 했고, 후대에 와서 문화재로 지정되기 전에 바위그림의 귀중한 가치를 모르고 탁본을 뜨는 사람들도 있었다 한다.

 비화가야의 도읍지 창녕 교동고분군(사적 제514호)에서. 
 비화가야의 도읍지 창녕 교동고분군(사적 제514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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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동강을 바라보며 마산을 향해 달렸다. 우리는 비화가야의 도읍지인 창녕에 내려 교동고분군(사적 제514호)을 잠시 거닐었다. 창녕 교동고분군에 가면 일제강점기 때 일본인들에 의해 상당한 유물이 도굴되었던 아픈 역사가 떠올라 마음이 무거워지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야문화의 숨결이 느껴져서 좋다.

역사적으로 삼국시대가 아니라 사국시대로 봐야 한다며 가야문화의 비중을 강조하는 분들도 있다. 이번 여행길에서 고령 지산동고분군을 걷지 못한 게 아쉽다. 언젠가 고령 지산동고분군을 한가로이 거닐면서 대가야의 생생한 숨결을 다시 한번 느껴보고 싶다.


태그:#대가야, #순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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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8.3.1~ 1979.2.27 경남매일신문사 근무 1979.4.16~ 2014. 8.31 중등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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