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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1월, 유라시아 횡단여행을 떠났습니다. 변변한 외국어 실력 없이 오롯이 패기 하나로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배낭을 짊어지고 낯선 땅을 돌며 보낸 4개월의 시간은 하루하루가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10여 개 국가를 여행했고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늦었지만 서랍 속에 간직했던 묵혀둔 일기장을 공개합니다. - 기자 주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점인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모습
▲ 블라디보스토크의 기차역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시발점인 블라디보스토크 기차역 모습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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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구가 보이지 않는다. 눈앞이 깜깜하다. 당황해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출구를 찾아 헤맨다. 그때, 어디선가 들여오는 낯익은 소리. 진원지를 찾아가자 한국인들이 모여 있다. 안도의 한숨을 내쉬자 '살았다'는 말이 뒤따라 입 밖으로 흘러나온다.

재러 교포 충고, 사라진 동환... "두려웠다"

천연덕스레 무리의 틈을 비집고 들어가 물었다.

"안녕들 하세요. 죄송한데 출구를 못 찾아서 그러는데, 혹시 어딘지 아세요?"

말을 걸자 중년의 남성이 고개를 돌린다. 곁에 있던 대여섯 명의 여학생들도 빤히 쳐다본다. 잠시 정적이 흐른다. 침묵을 깨고 중년의 남자가 말했다.

"한국에서 왔나 보네. 반갑네요. 그런데 어쩌다가 길을 잃었어요? 마침 우리도 밖으로 나가려고 했는데 따라오세요."

어느새 동환과 항근도 곁에 와 있다. '재러 교포'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출구를 빠져나왔다. 밖은 이미 어두워져 있다. 영하 17도의 날씨에 바람까지 불자 뺨이 얼어붙는다. 누군가 세차게 뺨을 후려친 것 같이 볼이 얼얼하다.

국제여객터미널 앞, 육교를 넘자 바로 기차역이 보인다. 한 차례 더 중년 남성에게 부탁했다.

"선생님, 죄송한데 저희가 기차표를 끊어야 하는데, 도와주실 수 있으신가요? 러시아는 다들 처음이라서요."

염치불구하고 도움을 요청하자 그는 흔쾌히 셋을 이끌고 기차역 대합실로 향한다. 매표소에서 항근과 나는 이튿날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는 기차표를 예약했다. 동환은 그 시각 이후 이르쿠츠크를 향하는 가장 빠른 열차를 알아봤다.

차례로 기차표를 발급받자 그는 서둘러 떠나며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연락하라"고 소셜네트워크(SNS)에 친구로 등록을 해주었다. 그리고 당부의 말도 전했다.

"내 말 잘 들어. 러시아에서는 절대로 지갑을 보이며 돈을 꺼내지 마. 위험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다들 러시아어를 못한다고 했지. 걱정이다. 여행하기 힘들 텐데... 아무튼 조심들 해. 얼마 전에도 한국인 커플을 만났는데 밥도 제대로 못 사 먹고 그러다 다시 그냥 돌아갔거든. 어쨌든 무사히 여행하고 좋은 추억 쌓길 바라."

말을 끝내고 뒤돌아 가는 그를 바라보며 왠지 모를 두려움이 밀려온다. 아무래도 그의 이야기가 어쩌면 가까운 미래에 나에게 닥쳐올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짧은 시간에 일어난 좌충우돌 경험에 식은땀이 절로 난다. 요동치는 심장을 억누르며, 마음을 다잡기 위해 애썼다. 어느 정도 마음이 진정이 되자 동환이 시야에서 사라진 것을 깨달았다. 항근이가 말했다.

"아까 기차표 끊고 난 뒤부터 안 보여. 정신없어서 어디로 갔는지도 모르겠는데. 열차 시간 얼마 남지 않아서 그냥 기차 타러 갔나 봐."

정신이 없기는 없었나 보다. 동환이가 보이지 않는 것도 몰랐다. 작별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헤어진 게 아쉬워 동환이를 찾아 나섰지만, 보이지 않는다. 머쓱해진 항근이와 난 애먼 '상황 탓'만 한동안 늘어놓았다.

재러 교포의 도움으로 다음 여행지로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표를 구입했다. 하지만 표를 발급받은 후 친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 기차역 매표소 재러 교포의 도움으로 다음 여행지로 출발하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표를 구입했다. 하지만 표를 발급받은 후 친구가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아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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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밤, 거리 헤매다 '꽈당'... 짜증이 밀려왔다

기차역을 빠져나오자 어둠에 뒤덮인 도시가 눈에 들어왔다. 듬성듬성 켜진 불빛만이 거리를 밝히고 있다. 깊게 숨을 한 번 내쉬고 눈 쌓인 길 위로 발을 내디뎠다. 다행히 항근이가 미리 한국에서 알아 온 숙소가 가까운 곳에 있다. 스마트폰의 지도서비스를 이용해 숙소 방향을 살핀다. 하지만 한국과 달리 가로등 수도 적고 눈에 띄는 간판도 없어 앞으로 나아가기가 어렵다.

칼바람에 옷깃을 여미며, 걸음을 재촉한다. 곧 기차역과 그리 멀지 않은 곳에 건물이 있다. 전형적인 유럽풍의 건축양식이다. 아무리 봐도 배낭여행객을 위한 숙소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마침 건물 앞에 눈을 쓸고 있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러시아 어르신이 보인다. 그에게 다가가 손짓, 발짓 등을 섞어가며 우리가 찾고 있는 숙소가 맞는지 물었다.

한참을 설명했는데 성과가 없다. 러시아어로 대답하는 그의 말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다. 그는 손가락으로 건물 뒤편을 가리켰다. 우리는 그게 돌아가라는 시늉인 줄 알고 그대로 믿고 따랐다. 이것이 불행을 자초하는 일이라는 걸 금방 깨달았다.

건물 뒤편으로 돌아가자 언덕길이 나타났다. 한눈에 봐도 계단이 얼었다. 거기다가 눈까지 덮여 있어 오르는데 여간 쉽지 않을 것 같다. 조심스레 발을 내딛으며, 계단을 탔다. 앞서 걷는데 뒤에서 항근이가 괴성을 지르며 '꽈당' 넘어졌다. 손에 들고 있던 짐 가방은 떼굴떼굴 굴러 길 옆에 내팽개쳐졌다. 상황은 웃긴 데 현실을 생각하니 울고 싶다.

항근이를 일으켜 세우고, 함께 손잡이가 끊어진 짐 가방을 들었다. 또다시 미끄러지지 않기 위해 우린 엉거주춤한 자세로 조심스레 계단을 올랐다. 짐을 맞잡고 낑낑 됐더니 온몸이 땀으로 뒤범벅이다. 고생하며 언덕길에 다다랐지만, 숙소가 보이지 않는다. 허탈하다. 말할 수 없는 짜증이 머리끝까지 치솟는다.

약 20분 정도 거리를 헤매다 결국 다시 아까 그 건물 앞으로 되돌아왔다. 스마트폰의 지도서비스가 가리킨 건물이다. 두리번거리다 출입구 주변을 자세히 살펴본다. 아뿔싸, 그토록 애타게 찾던 문구가 초인종 옆에 작게 표시돼 있다. 녹초가 돼 저만치 떨어져 있는 항근이를 불렀다.

"항근아! 여기다 여기. 간판이 어이없게 초인종 옆에 조그맣게 적혀 있다. 숨은그림찾기도 아니고 이걸 어떻게 찾으라고 이런 식으로 만든 거냐? 미치고 팔짝 뛰겠네."

벨 누를 생각은 안 하고 항근이에게 한풀이만 해댄다. 서른넷, 아직 철이 덜 들었다. 인터폰을 통해 직원과 통화했다. 항근이가 예약했다고 말하자 "삐~익"하는 소리와 함께 철문이 열린다. 그동안 숙소를 찾아 밤거리를 헤매며 고생한 일들이 주마등처럼 뇌리를 스쳐 지나간다. 숙소에 들어서자 얼어붙은 몸이 눈 녹듯 녹아내린다. 동시에 긴장감도 사그라진다. 안내데스크 직원에게 하룻밤 숙박비를 내고 숫자 '6'이 적힌 방으로 향한다.

방문을 열자 이층 침대와 그 곁에 어지럽게 널린 옷가지들이 한데 뒤엉켜 있다. 침대에 걸터 앉아 바느질하고 있는 이를 향해 우리는 반가운 마음으로 대뜸 소리쳤다.

"한국인 맞으시죠?" 

러시아는 한국과 달리 화려하고 큼직막한 간판이 없다. 숙소를 찾기 위해 밤거리를 헤매다 발견한 숙소. 조그마한 간판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 울고 웃게 한 문구 러시아는 한국과 달리 화려하고 큼직막한 간판이 없다. 숙소를 찾기 위해 밤거리를 헤매다 발견한 숙소. 조그마한 간판에 짜증이 머리끝까지 솟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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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뭇한 컵라면 하나

방에는 항근이와 나보다 먼저 온 세 명의 한국인이 쉬고 있다. 짐을 풀며 그들과 사소한 대화로 피로를 풀었다. 긴장이 풀리자 허기가 느껴진다. 세 명의 한국인에게 요깃거리를 살만한 곳을 물어 숙소를 빠져나왔다.

늦은 시간이었지만, 다행히 숙소에서 가까운 곳에 문을 연 작은 가게를 찾았다. 도로 옆에 들어선 가게는 마치 한국의 지하철 간이매점처럼 생겼다. 꼬르륵 소리를 내는 배를 달래기 위해 서둘러 먹을거리를 둘러본다.

유리 창문 너머로 익숙한 물건이 눈에 들어온다. 컵라면이다. 인터넷을 통해 러시아에서 컵라면이 인기라는 말을 전해 들었지만, 실제 판매하는 모습을 보니 신기하면서 흐뭇하다. '끼릴 문자로' 쓰인 '도시락'이란 문구가 왠지 낯설지 않다.

손가락 두 개를 피며 "도시락"이라고 외치자 매장 안 중년의 러시아 여성이 유리창 쪽문을 통해 컵라면 두 개를 내밀었다. 또다시 손가락을 사용해 빵과 물을 샀다. 숙소로 돌아오는 길, 두 손에 든 식량이 든든하다.

밤 11시, 배고픔을 달래고자 '도시락'에 물을 부었다. 러시아에서 먹는 첫 끼니다. 용기 안에 든 플라스틱 포크로 잘 익은 면발을 '후~후~' 불어 입안에 털어 넣는다. 한국서 맛본 것보다 약간 싱겁지만, 입맛에 맞는다.

게눈 감추듯 컵라면과 빵을 먹어 치우고 간단히 샤워를 했다. 그리고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휴게실에 앉아 느긋하게 커피를 마시며, 같은 방에 묵게 된 독일인과 수다를 떨었다. 말이 수다이지 영어회화가 안되니 몸이 고생이다. 독일인의 질문에 눈치껏 아는 영어 단어를 총출동하며, 몸짓으로 대답했다. 다행히 의사소통에는 별다른 지장이 없다. 물론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인지 의문이다.

휴식도 잠시, 갑자기 옆 테이블서 술을 마시던 러시아인이 항근에 소리를 지른다. 술에 취해 행패를 부리나 싶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험악한 분위기가 연출된다. 따지듯 소리를 지른 러시아인에게 다가가 이유를 물었다. 그는 러시아어로 소리치며 항근이의 빨랫감을 세탁기 위에서 치우며 "요리를 하는 싱크대에 왜 빨랫감을 올려놓느냐"고 과장된 몸짓을 섞어가며 화를 낸다. 그제야 우린 세탁기가 싱크대 한 귀퉁이에 설치된 사실을 깨달았다.

직접 요리하는 부분도 아닌데 불같이 성을 내는 그가 달갑지 않다. 한편으로 그다지 대수롭지 않게 여길 일도 아닌데 '꽥'하고 소리까지 지른 그에게 욱하고 화가 났다. 분한 감정을 꾹 참으며, 그를 달랬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이런 것도 문화 차이에 해당하나.'

수차례 이어진 항근이의 사과에도 러시아인은 계속해 혼자 중얼거리며, 인상을 찌푸린다. 구시렁거리는 그를 피해 방안으로 향한다.

러시아에서 처음 묵게 된 숙소. 이층 침대와 빨래 건조대, 그리고 어리럽게 너려 있는 옷가지들이 한데 뒤엉켜 너저분하다.
▲ 너저분한 숙소 러시아에서 처음 묵게 된 숙소. 이층 침대와 빨래 건조대, 그리고 어리럽게 너려 있는 옷가지들이 한데 뒤엉켜 너저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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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을 잊은 다섯 남자의 수다 "한국사람 맞나?"

짐 정리를 끝낸 다섯 명의 한국인이 방안에 둘러앉았다. 자연스레 여행에 대한 주제로 대화가 이어졌다. 같은 회사에 근무하는 두 명의 한국인은 해외근무를 끝마치고 한국으로 돌아가는 길이라고 말했다. 몽골에서 출발해 국경을 넘어 러시아로 이동해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약 2주간 여행했단다.
  
이튿날(2013년 1월 16일) 한국에 돌아간다는 30대 후반의 남자가 내게 말했다.

"알혼섬에 간다고 했지. 우리도 가려고 했는데 이르쿠츠크에서 출발하는 교통편이 없어서 허탕을 쳤어. 우리처럼 못 갈 수도 있으니 잘 알아보도록 해. (명함을 내밀며) 잘 곳이 필요하면 여기로 가봐. 우리가 묵은 곳인데 시설 좋고 직원도 친절하더라."

이어 그와 동행한 50대 남자가 입을 땠다. 그는 인심 좋은 '동네 아저씨'같은 인상을 풍겼다.

"솔직히 나도 러시아가 위험한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여행해 보니 내 생각이 틀렸던 거야. 한 번은 기차 안에서 러시아 여교사를 만났는데 어찌나 친절하던지 몸 둘 바를 모르겠더라고. 여태껏 만난 러시아인들은 거의 다 그렇게 친절했다니까."

다섯 중 가장 나이가 어린 스물넷의 상일이는 군입대를 앞두고 한 달간 러시아를 여행할 계획이라고 했다. 러시아행 배 안에서 그와 한 번도 마주친 적이 없어 함께 배를 타고 온 사실을 이때야 비로소 알게 됐다.

항근이는 러시아와 북유럽을 거쳐, 이탈리아에 사는 이모를 만나러 간다고 했다. 항근이의 북유럽행에 다들 "물가가 엄청나게 비싸다고 하던데"라며 합창하듯 묻자, 그는 "오로라를 꼭 직접 보고 싶어서요"라며 환희에 찬 표정을 지었다.

난 배낭에 넣어온 두꺼운 책자를 꺼내 보였다. 인터넷 검색을 통해 모은 여행정보를 묶어 만든 제본이다. 백과사전을 연상케 하는 두께에 다들 놀라는 표정이다. 4개월간 유라시아를 횡단할 계획이라고 말하자, 넷은 "좋은 회사 다니나 보네, 부럽다"며 한마디씩 한다. 하지만 "사표 쓰고 떠나는 여행"이라고 대답하자 "미쳤어" "용기가 대단하다" "멋있다" 등 탄식과 감탄이 뒤따른다.

한참을 웃고 떠들다 새벽 1시 즈음에야 침대에 누웠다. 다섯은 '한국남자 맞나'란 생각이 들 정도로 수다스러웠다. 길고 길었던 하루의 끝,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해 보지만, 괜스레 몸만 뒤척인다. 그리고 모두 잠든 후 조용히 담배 한 개비를 들고 밖으로 향했다. 

숙소에서 바라 본 블라디보스토크의 도시풍경.
▲ 도시 풍경 숙소에서 바라 본 블라디보스토크의 도시풍경.
ⓒ 정대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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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마트폰 사용자라면 어플을 적극적으로 이용하세요
기본적으로 환율과 지도서비스 앱은 반드시 다운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회화 앱은 한글과 영문 검색을 통해 다양하고 자신에게 적합한 어플을 두 가지 정도 설치하면 도움이 됩니다. 또, 항공권과 숙소를 예약할 수 있는 앱도 있으니 여행 전 살펴보고 미리 설치하면 요긴하게 쓸 수 있습니다.

한국과 마찬가지로 러시아도 무료로 와이파이를 사용할 수 있는 곳이 많습니다. 다만, 그렇지 않는 경우도 있으니 스마트폰에 필요한 정보를 미리 담아두는 지혜를 발휘해 보세요.

덧붙이는 글 | 기사에 담지 못한 이야기는 오블(http://blog.ohmynews.com/kaos80)에서 소개합니다.



태그:#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배낭여행, #유라시아횡단여행, #시베리아횡단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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