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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다르질링의 토이 트레인. 뉴잘패구리역에서 다르질링까지 이 기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다르질링의 토이 트레인. 뉴잘패구리역에서 다르질링까지 이 기차를 타고 올라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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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써 2시간째다.

뉴잘패구리(NJP)역에서 다르질링으로 가는 지프는 2시간째 출발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조수석에 두 명, 뒷자리에 여덟 명을 꽉 채웠으면 벌써 정원에서도 네 명 초과다. 운전사는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했는지, 기차역을 하염없이 바라보며 차에 오를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

가야에서 다르질링까지 오려면 파트나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 가야역에서 8시간 대기 후, 새벽 3시에 파트나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기차 안에서 뜬 해가 다시 질 무렵 도착한 NJP다. 샤워고 뭐고, 잠이고 뭐고. 어제 낮 12시 보드가야에서 먹은 점심이 마지막 끼니다. 그 후의 저녁, 아침, 점심은 기차간에서 먹은 크래커 두 조각이 다다. 허기진 배가 신경을 돋운다. 제발 빨리 가잔 말이다.

뉴잘패구리역에서 다르질링까지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토이 트레인을 타고 히말라야 등자락을 따라 올라가는 낭만적인 방법도 있다. 하지만 그 구간은 산사태로 운영이 중단됐다. 토이 트레인은 못 타더라도, 지프를 타고 다르질링으로 가는 길 또한 경치가 아름답다고 한다. 하지만 이미 날이 어둑하다. 됐다. 내가 지금 경치 구경할 팔자냐. 멀미가 잘 난다는 지프 뒷좌석에 앉지 않은 것만이라도 감사히 여겨야지.

그래도 3시간만 지나면 이 길고 지루한 여정도 끝이다. 산을 타고 급히 내려가는 해. 그 해가 던지는 노을 사이로 히말라야 자락의 풍경을 조금이라도 볼 수 있을까 창밖을 기웃거렸다. 허사다. 얌전히 앉아서 우렁차게 성화하는 배나 진정시키자.

보드가야의 불교사원. 가야에서 다르질링까지 오려면 파트나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 가야역에서 8시간 대기 후, 새벽 3시에 파트나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기차 안에서 뜬 해가 다시 질 무렵 도착한 NJP다. 샤워고 뭐고, 잠이고 뭐고. 어제 오후 12시 보드가야에서 먹은 점심이 마지막 끼니다.
 보드가야의 불교사원. 가야에서 다르질링까지 오려면 파트나에서 기차를 갈아타야 한다. 가야역에서 8시간 대기 후, 새벽 3시에 파트나에서 기차를 갈아타고 기차 안에서 뜬 해가 다시 질 무렵 도착한 NJP다. 샤워고 뭐고, 잠이고 뭐고. 어제 오후 12시 보드가야에서 먹은 점심이 마지막 끼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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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드가야 일본 불교사원의 다이죠코 대불. 25m 높이로 인도에서 가장 큰 불상이다.
 보드가야 일본 불교사원의 다이죠코 대불. 25m 높이로 인도에서 가장 큰 불상이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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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자스탄에서 다르질링까지 사흘... '고작' 설산 때문

차에는 더스틴과 나를 포함한 12명의 승객이 타고 있었다. 좌석조차 없는 짐칸에 앉은 남자 네 명, 내 옆에 앉은 똘망똘망한 꼬마 아이와 아이의 엄마. 다른 인도 승객들보다는 나랑 더 닮은 티베트계 여자와 인도계 남자친구. 그리고 조수석에 앉은 남자 두 명.

짐칸에 좌석도 없이 앉은 남자들이 제일 신이 나 있다. 라자스탄에서 이곳까지 왔다고 한다.

"설산을 보러요."

라자스탄에서 다르질링까지라면, 갈아타는 기차 시간을 잘 맞춘다고 해도 이삼일은 꼬박 걸리는 여정이다. 그 긴 여행길의 이유가 설산이라니. 일, 돈, 가족, 건강, 일정... 무수히 많았을 변명 거리를 물리치고 사흘간의 기차 여행을 떠나온 이유가 고작 설산 때문이라니. 나는 아저씨의 대답이 마음에 들었다. 설산을 보기 위해 이 먼 길을 여행하는 마음이, 하얀 설산의 모습처럼 계산 없고 순수하다.

다르질링의 산책길 풍경. 농구대 너머로 차 농장을 일구어 놓은 산자락이 보인다.
 다르질링의 산책길 풍경. 농구대 너머로 차 농장을 일구어 놓은 산자락이 보인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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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똬리를 튼 뱀 마냥 구불거렸다. 운전사가 커브를 돌기 위해 핸들을 154번 정도 틀었을 시점. 잘 가던 지프가 멈춰 섰다. 사람들 사이에 힌디어로 대화가 오갔다. 곧 있으면 가겠지. 30분이 흘렀다. 지프는 멈춘 자리에서 한 바퀴도 구르지 않았다. 

옆에 앉은 꼬마가 코카콜라 병을 들고 나에게 장난을 쳤다. 아이랑 한참을 놀아도 차는 가지 않았다. 모두가 당연하다는 듯 묵묵히 앉아있었다. 꼬마 아이도 별 불만이 없는 듯했다. 더는 바보가 될 수 없다. 아이의 엄마에게 물었다.

"차가 왜 안 가는지 아세요?"
"아. VIP가 오고 있어서 그래요."


브이아이피(VIP)? 연예인이라도 오나? 근데 그래서 뭐? VIP가 오는데 왜 이 차가 멈춰야 하지? 나는 물음표를 잔뜩 단 얼굴을 하고 아이의 엄마를 바라봤다. 아줌마는 충분한 대답이 됐을 거라 생각했는지 고개를 돌려 다시 아이를 살폈다. 창밖을 보니 대기 중인 건 우리만이 아니었다. 십여 대가 넘는 지프가, 그놈의 VIP인지 뭔지 때문에 한 시간이 넘게 대기하고 있었다.

다르질링의 초우라스타 광장. 다르질링 몰이라고도 불린다. 오래된 상점이 늘어선 다르질링의 중심이다.
 다르질링의 초우라스타 광장. 다르질링 몰이라고도 불린다. 오래된 상점이 늘어선 다르질링의 중심이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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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후. 운전사가 승객들에게 힌두어로 뭐라고 외쳤다.

"내려요. 차에서 내리래요."

아이 엄마의 통역이다. 차에서 왜 내리지? VIP에게 절이라도 해야 하나? 혹시라도 다른 대답이 나올까, 앞좌석에 타고 있던 남자에게 물었다.

"차에서 왜 내려요? 여기서 왜 대기하고 있는 거죠?"
"아, VIP가 반대 방향에서 오고 있거든요."

그래서 어쩌란 말인가! VIP(Very Important Person, 매우 중요한 사람)가 얼마나 중요하건 말건! 지난 이틀간 잠도 못 자고 밥도 못 먹은 나보다 중요하단 말인가! 지프 십여 대의 행로를 가로막을 만큼 위대하단 말인가! VIP가 오고 있으니 대기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기는 이 사람들의 태도는 또 뭔가!

하지만 위대한 VIP님이 오고 계시는데, 힌두어도 안 통하는 조촐한 존재인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우리는 그저 운전사가 시키는 대로, 차에 들어가라면 들어가고 다시 나오라면 나오기를 몇 번이고 반복했다. 지프는 1시간이 지난 후에야 다시 출발했다.

토이 트레인을 탈 수 있는 다르질링 역. 토이 트레인을 타고 여러 역을 돌고 오는 관광용 순환 기차도 있지만, 순 교통기능을 하는 기차도 있다.
 토이 트레인을 탈 수 있는 다르질링 역. 토이 트레인을 타고 여러 역을 돌고 오는 관광용 순환 기차도 있지만, 순 교통기능을 하는 기차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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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맞은 히말라야의 밤은 추웠다

오후 9시면 도착하는 일정이었는데. 빌어먹을 VIP님 덕에, 다르질링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11시가 넘었다. 뉴잘패구리역에서부터 감돌던 산의 서늘한 기운. 해가 떠나고도 한참인 밤에 산 중턱에 뚝 하니 떨어지니, 몸이 오들오들 떨린다. 이제 몸을 녹일 집을 찾아야 한다. 숙소를 찾으면 그토록 갈망하던 밥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서울을 떠나고 처음 보는 눈길을 따라, 후보에 올려둔 호텔을 찾아 올라갔다.

한참을 눈밭을 헤매다 인도 소년의 도움으로 겨우 호텔을 찾았다. 호텔 문은 잠겨 있었다. 문을 두드렸다. 못 들어가면 밖에서 얼어 죽을지도 모른다. 대답 없는 문. 우리는 온 힘을 다해 문을 더 세게 두드렸다.

"예스?"

친절한 눈의 여자가 우리를 맞았다. 다행히 방이 있었다. 일단 얼어 죽지 않고 잘 수 있는 공간은 확보다. 36시간 동안 크래커 두 조각으로 버틴 몸이 급히 식당 표지판을 찾았다. 'Restaurant'라고 써진 안내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굳게 닫힌 문. 잠시 들어가 있던 관리인 여자가 인기척을 듣고 우리를 따라 올라왔다.

"식당과 매점은 10시면 문을 닫아요. 미안하지만 지금은 문을 열어 드릴 수가 없어서…. 내일 아침에 다시 오세요."

오 노! 불어터진 국수 한 그릇, 차가운 빵 한 조각, 설익은 감자 한 덩어리라도 먹을 수 없단 말인가! 매점 문을 매정하고 차갑게 걸어잠근 철조망 사이로 보이는 저 탐스러운 스니커즈 바! 달콤하고 아삭한 저 초콜릿을 한 입이라도 씹을 수 있다면, 내 VIP를 위해 춤이라도 춰 드리리! 아니지! 망할 VIP 때문에 2시간을 기다리지만 않았어도, 식당은 환하고 아늑하게 우리를 맞아 주었을 텐데! 따뜻한 국수와 포근한 빵과 잘 익은 감자 두덩이라도 얼마든지 먹을 수 있었을 텐데!

토이 트레인 안에서 본 다르질링. 인도 최고의 축제인 홀리(Holi) 페스트벌로 알록달록 가루를 덮어 쓴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토이 트레인 안에서 본 다르질링. 인도 최고의 축제인 홀리(Holi) 페스트벌로 알록달록 가루를 덮어 쓴 사람들이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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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텔 관리인은 고개를 푹 숙인 우리를 다시 방으로 데려다 주었다.

"따뜻한 물은 오후 4시에서 6시까지만 나와요. 근데 늦게 오셨으니까, 잠시 틀어드릴게요. 따뜻한 샤워라도 하세요."

식사 한 번 제대로 못 하는 팔자에 샤워가 무슨 소용이겠느냐마는, 언제 다시 올지 모르는 '핫샤워'의 기회를 놓칠 수는 없다. 미지근한 물이 졸졸 새어나왔다. 5분 후. 차가운 물로 냉정하게 돌아선 물줄기는 다시는 따뜻해지지 않았다. 이미 비누칠을 한 나는 얼음장같이 차가운 물로 눈물의 샤워를 마무리했다.

여행 와서 처음 꺼낸 내복. 셔츠 두 개와 오리털 잠바를 껴입고 슬리핑백 안으로 들어갔다. 산장에서 준비한 두꺼운 이불을 몸 위에 얹었다. 그래도 추위가 가시지 않는다. 얼은 손이 저려 왔다. 처음 맞은 히말라야의 밤은 매우 추웠다. 그리고 배고팠다.

티베트 음식점에서 바라본 다르질링 거리. 티베트 독립 평화 시위로, 다르질링 주민들이 촛불을 들고 조용히 행진하고 있다.
 티베트 음식점에서 바라본 다르질링 거리. 티베트 독립 평화 시위로, 다르질링 주민들이 촛불을 들고 조용히 행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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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점심 때 먹다 남긴 뚝바(티베트식 국수). 그거 먹고 싶다. 왜 남겼지? 내가 미쳤었나?"
"거기서 파는 콩고기로 만든 필리 치즈 샌드위치 기억나? 진짜 맛있었잖아."

"난 괄리어 인디언 커피하우스에서 먹은 야채 볶음면. 아삭아삭한 그 야채 질감…. 먹고 싶어 미쳐버릴 거 같아."
"다 됐고…. 아까 철창 안으로 보이던 초콜릿 바 딱 한입만 먹으면 소원이 없겠다. 제발 팔라고 빌어볼 걸 그랬나? 300루피(한화 약 6천 원) 정도는 아낌없이 내겠어."


"아. 배고프면 잠 안 오는데. 추워서 더 못 자겠어. 심장까지 덜덜 떨리는 거 같아. 추워…. 추워…."

"…. 근데 있지. 지금 우리 히말라야에 온 거야."
"…. 응."


히말라야에 왔다. 추워서 그런지, 히말라야에 왔다는 생각 때문인지, 간만에 가슴이 두근두근 뛴다.

다르질링의 티베트 타르초(기도 깃발). 다르질링에는 티베트계와 네팔계 인구가 많다.
 다르질링의 티베트 타르초(기도 깃발). 다르질링에는 티베트계와 네팔계 인구가 많다.
ⓒ Dustin Burnet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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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다르질링, #히말라야, #뉴잘패구리, #토이 트레인, #인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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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량한 부부의 히말라야 여행,' '불량한 부부의 불량한 여행 - 인도편'을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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