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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칼럼'은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들이 쓰는 칼럼입니다. [편집자말]
지난 3일 오전 경기 수원시 영통구 원천동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 사건 결심공판 모습이 역사적인 재판인 것을 고려해 시작전 10분가량 언론에 공개되었다.
▲ 언론에 공개된 '내란음모' 결심공판 지난 3일 오전 경기 수원시 영통구 원천동 수원지방법원에서 열린 통합진보당 이석기 의원 등의 '내란음모' 사건 결심공판 모습이 역사적인 재판인 것을 고려해 시작전 10분가량 언론에 공개되었다.
ⓒ 사진공동취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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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의된 폭동의 실현가능성과 실질적 위험도 충분히 인정할 수 있다."

내란음모 등의 혐의로 법정에 선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 등에 대한 선고가 있던 17일, 판사가 한 말이다. 정국을 뒤집었던 지난해 5월 12일 합정동 강당에서의 발언이 실제로 폭동을 일으켜 실질적 위험을 가져올 근거로 '충분하다'는 것이다.

5월 10일과 5월 12일 강연 녹취록이 정말 내란과 폭동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내란 참 쉽다. 내란이라는 것이 박정희나 전두환·노태우처럼 총과 탱크를 앞세우고 군사작전 펴듯 이리 저리 수많은 병력을 배치하지 않아도 이루어질 수 있으니 말이다. 검찰이 오랫동안 첨단 장비를 통해 샅샅이 뒤졌음에도 내란을 준비했다는 '기술·물질적' 근거들을 제시하지 못했지만, 재판부는 실질적 위험을 "충분히 인정"했다.

말로도 할 수 있는 것이 내란이라면, 이제 대한민국은 내란 천하가 될 것이다. 선술집에서, 카페에서, 또는 어느 강당에서 몇몇이 모여 "이 놈의 세상 확 뒤집어 버렸으면 좋겠다"고 했다면 내란음모다. "이 사회를 어떻게 바꾸는 게 좋을까? 이야기해볼까?"했다면 내란 선동이다. 총? 칼? 필요 없다. 내란 참 쉬워졌다. 세계 변혁촉진위원회 같은 곳이 있다면, 재판부에게 공로상이라도 주어야할 판이다. '내란의 대중화'는 온전히 국정원과 재판부의 공이다.

노골적인 사법의 정치화

재판부는 국정원 민간인 조력자의 일관된 진술도 칭송했다. 지난해 11월 21일 6차 공판에 등장한 소위 '조력자' 이아무개씨는 2003년 RO라고 주장하는 조직에서 가입식을 했다고 주장하다 2004년에 정식으로 가입했다고 번복했고, 11월 22일 7차 공판에서는 세포조직활동, 총선출마 동기, 지휘성원 여부, 5월 12일 모임을 주최한 주체 등에 대해 모두 '추측'이라 답했다. 11월 25일 8차 공판에서는 RO 조직운영 원리도 다른 공안사건 자료를 보고 추측한 것이었다고 증언했으며 11월 26일 9차 공판에서는 국정원 직원과 최소 150차례 만나 정기적으로 일정 금액을 수수했음도 인정했다.

그런데도 재판부는 이 제보자의 '일관성과 신빙성'을 의심하지 않았다.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 무죄를 선고한 재판부가 그 근거 중 하나로 '권은희 전 수사과장 진술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내세운 것을 떠올리면, 그 신빙성의 기준이 무엇인지 더욱 헷갈린다.

솔직히 말하자. 정치 재판이었다. 지난해 8월 말부터 세상을 들썩였던 '내란 음모'는 애초부터 공안기관의 관심법과 언론의 여론몰이에 의존했다. 이제는 누더기가 된 녹취록이라는 것이 언론을 도배했고, 공안기관과 여당, 정부는 물론 야당까지 마녀사냥에 합세했다.  

재판이 진행될수록, 많은 이들이 '내란'이라는 것의 실체에 대해 합리적 의심을 품기 시작했다. 그래서 이런 저런 정치 상황을 고려하면 '국가보안법은 유죄, 내란음모는 무죄'로 판결하는 선에서 적당히 무마될 것이라는 관측도 심심치 않게 나왔다. 

통합진보당 김재연(가운데), 김선동(뒤) 의원이 17일 경기도 수원 수원지방법원 앞에서 내란음모죄 혐의로 법원의 선고를 앞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무죄를 촉구하는 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통합진보당 김재연(가운데), 김선동(뒤) 의원이 17일 경기도 수원 수원지방법원 앞에서 내란음모죄 혐의로 법원의 선고를 앞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무죄를 촉구하는 집회에서 구호를 외치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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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박근혜 정부는 멈추지 않았다. 헌법재판소에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을 청구했다. 반드시 내란음모를 확정지어야만 하는 최고 수준의 정치적 압박을 가한 것이다. 선고 이전, 많은 이들이 재판 결과에 따라 박근혜 정권은 큰 타격을 입을 수도, 위기를 넘어설 수도 있다고 관측했다. 바꿔 말하면, 박근혜 정부가 타격을 입지 않기 위해서는 이번 재판에 전방위적 압력을 가할 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도 된다. 이런 상황에서 원래부터 정치적 성격이 강한 공안사건의 재판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이미 정해져 있었다.

그럼에도 결과를 쉽게 예측하지 못했던 이유는 재판 과정에서 국정원과 검찰이 제시한 근거와 소위 내부 조력자의 증언의 신빙성이 너무 쉽게 반박되었기 때문이다. 내부 제보자도 이 사건이 세상에 공개될 시점에는 '내란 사건'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고 증언했고, 검찰 측 증인으로 출석한 가스, 통신, 전력 회사 임직원들도 5월 12일 강연 이후 국정원으로부터 시설 경비 강화 등을 위한 어떤 조치도, 연락도 받지 못했다고 증언했다. 국정원 조차, 5월 12일 즈음에는 이날의 발언이 실제 내란에 착수하기 위한 조치라고 보지 않았다는 정황이다. 

유죄를 향한 정치 환경은 무르익었지만, 그래도 최소한 법적 양심은 남아 있을 줄 알았다. <변호인>의 흥행과 33년만에 무죄를 받은 부림사건 피고인들, 1991년 정국을 들쑤셔놨던 강기훈 유서대필 혐의의 무죄판결이 불과 며칠 전의 일이다. 검찰이 2004년 재심에서 무죄로 판결난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의 법리를 들이밀 때에는 자충수다 싶었다. 최근 '서울시 공무원 간첩사건'과 관련해서는 국정원의 공문 조작 의혹도 일고 있다. 그러나 재판부는 변호인단의 반론을 모두 외면하고, 각종 조작 의혹이 끊이지 않는 국정원과 검찰만 전적으로 신뢰했다.

일각에서는 변호인단 재판 전략의 잘못을 지적하는 모양이지만 설득력 없는 이야기다. 내란 혐의의 입증 책임은 검찰에 있다. 검찰은 재판과정에서 이 역할을 그다지 성공적으로 수행하지 못했다. 과거 유죄판결을 받은 내란 사건을 보라. 변호전략 때문에 유·무죄가 갈렸던가? 문제의 핵심은 정치를 하는 사법부였다. 사법의 정치화다. 사법과 권력의 카르텔이다.

통합진보당, 과연 내란을 꿈꾸었나?

통합진보당은 정말 내란을 음모했는가? 어떤 저명한 진보논객은 이번 판결 이후, 통합진보당이 "비합혁명정당 노선을 추구하면서 그렇지 않은 척 나와 유권자들에게 표를 요구"했기 때문에 유권자를 기만했음은 분명하다고 평가했다. 그것이 망상일지언정, 내란의 의도를 가진 것은 맞지 않으냐는 비아냥이다.

과연 그런가? 80~90년대에 걸쳐 매우 급진적인 목표를 추구하던 급진세력들은 2004년 민주노동당의 원내 진출 이후 급격히 체제내화 되었다. 만일 이들이 내란을 통해 정권을 바꾸려는 의지를 고수하고 있었다면, 그 가능성이 가장 높았던 2008년의 촛불 정국은 절호의 기회였다.

그 당시 진보정당의 입장이 어떠했던가? 운동권과 전혀 상관없던 수많은 사람들이 '이명박 퇴진'을 외칠 때, 비합법적인 반란을 준비했던가? 아니었다. 촛불정국 내내 이들의 주도권은 관철되지 않았고, 촛불시위가 내리막을 걸을 때도 비합법 변혁의 징후는 보이지 않았다. 이들은 범국민적인 저항의 물결 속에서 '선거 심판론'만 내세웠다. 선거연합, 후보단일화 협상에만 집중했다. 난무하는 급진적 구호와 실제 행동은 달랐다. 

통합진보당의 창당도 유사한 맥락에 있다. 통합진보당의 창당은 비합법 변혁노선의 불가능성이 인식되면서 정치적 실리획득을 목표로 이질적인 세력들이 손을 잡은 결과다. 2012년 비례경선을 둘러싼 격렬한 내부 갈등 역시, 본질은 총선에서 실리분배 실패에 있었다.

이른바 '내란음모의 수괴'라는 이석기 의원의 등장도 마찬가지다. 만일 이석기 의원이 RO라는 혁명조직의 총책에 상응하는 위치에 있다면, 이석기 의원의 비례경선 출마 자체가 노선변화를 말해 준다. 호시탐탐 은밀한 내란을 준비하면서 단선연계, 복선포치 등 점조직으로 운영되는 어떤 비밀혁명조직이 자신의 수뇌부를 선거에 출마시키고 대중 앞에 노출시키는가? 

이런 맥락에서 보면, 2013년 5월 12일의 발언들도 내란을 위한 실제적 음모였다고 보기 어렵다. 오히려 2012년 통합진보당 비례경선 부정을 둘러싼 내부 갈등과 분당을 전후한 대대적인 공세, 진보진영으로부터의 고립, 대선에서 박근혜 당시 후보와의 날 선 대립 이후 소속 국회의원에 대한 다각도의 사법처리 시도 등 일련의 위기가 가중되는 조건에서 악화된 2013년 한반도 정세가 만들어낸 '위기의식'의 표출이었다.    

녹취록을 선입견 없이 본다면, 그 곳에서 오고 간 말들은 내란을 실행하기 위한 공세적인 자신감의 표출이 아니라 극도의 위기감에서 나오는 수세적 반응이라는 것을 알아채기 어렵지 않다. 몇몇 자극적인 말들도 있지만, 이는 항상 외부의 위협을 과잉 극단화하고, 내적 결기를 최대화하는 그들 특유의 생존방식일 뿐이다. 비합법적 봉기로 정권을 바꿀 수 있다는 생각은 이처럼 '구호'로만, '말'로만 존재했을 뿐, 실체가 없었다.  

기준선 낮아진 내란, 칼자루 쥔 공안당국

통합진보당 의원 및 당직자등이 17일 경기도 수원 수원지방법원 앞에서 내란음모죄 혐의로 법원의 선고를 앞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무죄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 이석가 무죄선고 기다리는 통합진보당 통합진보당 의원 및 당직자등이 17일 경기도 수원 수원지방법원 앞에서 내란음모죄 혐의로 법원의 선고를 앞둔 이석기 통합진보당 의원의 무죄를 촉구하는 집회를 열고 있다.
ⓒ 이희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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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판결이 가지는 심각성은 바로 여기에 있다. 이미 상당정도 온건화되고 정치적 영향력도 급격히 상실된 정치세력에게 가장 급진적이며 실제적 위협을 갖춘 세력이라는 낙인을 찍었다. 통합진보당에 대한 정당해산심판을 청구한 논리도 마찬가지다. (구)민주노동당의 강령에 있던 '사회주의의 원칙과 이상'이라는 급진적 표현을 선거에 유리하도록 온건하게 바꾼 '진보적 민주주의'라는 표현을 위헌정당의 근거로 삼았다. 체제에 순응하려는 노력을 반체제로 찍어내 버린 것이다. 

이것은 내란이나 위헌정당의 기준을 매우 낮춘 동시에 해석의 자의성을 대폭 강화시킨 것으로, 공안기관에게 칼자루를 쥐어준 꼴이다. 말만으로 가능한 내란이라니, 진보적 민주주의조차 북의 대남 혁명전략이라니. 이런 식이라면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정책을 표방하고 있는 단체는 공안당국이 마음만 먹으면 빠져 나갈 수 없다.

김용판 전 서울경찰청장에게 무죄판결을 내린 사법부에 성토를 쏟아내던 민주당의 반응도 가관이다. 민주당은 이번 판결에 대해선 "국민 상식에 반하고 시대 흐름과 동떨어진 행위에 대한 사법부의 판단"이며 "헌법의 가치와 민주주의 질서를 훼손하는 그 어떤 행위에 대해서도 타협하거나 용납하지 않는다는 원칙에 흔들림이 없다"고 논평했다.

두 재판에 대한 민주당의 입장이 다른 것은 두 가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첫째는 내란 혐의자들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일 테고, 둘째는 이들과 한통속으로 몰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의 발로일 것이다. 그래서 무섭다. 마음에 들지 않는 대상은 어찌되어도 상관없다는 이 배제의 논리가, 제1야당조차 두려움에 떨게 만드는 이 공안정국이.

내란을 위한 은밀한 모의는 RO와 같은 작은 조직에서가 아니라 자의적인 권력과 배제, 공포가 작동하는 바로 이런 환경에서 자란다. 가히 내란 천국이다. 내란의 대중화다. 입법·행정·사법 3각 카르텔의 공이다!


태그:#내란음모, #통합진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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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이보다는 공통점을 발견하는 생활속 진보를 꿈꾸는 소시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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