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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강기훈 씨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결심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북받치는 감정에 눈가를 훔치고 있다.
▲ 북받치는 감정에 눈가 훔치는 강기훈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강기훈 씨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결심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북받치는 감정에 눈가를 훔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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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년 만에 누명을 벗었지만 그는 담담했다. 표정 변화도 거의 없었다. 오랜 세월 그와 함께 싸워온 함세웅 신부가 "아들의 무죄를 위해 불철주야 애쓰신 어머니도 하늘나라에서 자랑스러워하실 것"이라고 말하자 잠시 고개를 숙였을 뿐이었다.

내내 차분하던 말투는 사법부와 검찰을 언급할 때 조금 단호해졌다. 13일 '유서대필사건' 재심(서울고등법원 형사10부·부장판사 권기훈)에서 유서 대필과 관련 무죄 판결을 받은 강기훈씨는 이날 사법부가 과거 잘못을 바로잡았다는 데는 의미가 있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국가보안법 혐의를 그대로 적용,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을 선고한 부분에는 문제를 제기했다.

"(선고 직후 든 생각이) '재판부가 유감 표시를 안 하네?'였다. 이 재판은 제 재판이 아니다. 사법부가 과거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이고, 검찰이 잘못을 반성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데에 의미가 있다. 사법부의 권위는 저를 세워놓고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 이렇게 선고한다고 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잘못을 겸허하게 인정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때 세워진다."

"검찰은 반성조차 하지 않는다"는 지적도 빼놓지 않았다. 강씨는 지난 1월 16일 최후진술에서 "사법개혁이 화두였던 김대중 정부 초기, 부끄러웠던 사법부의 과거 대표 사례로 유서대필사건이 언급되기도 했지만 담당 검사들과 검찰의 입장은 한결 같았다"고 비판했다. 그는 13일에도 "1991년 사건에 관여한 검사들이 유죄에 대해 확신을 가지지 못했던 모습도 기억한다"며 "그분들의 생각(반성)이 변해야 오늘 재판이 가치가 있고, 성과가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

그가 '유서대필사건'을 자신만의 일이 아니라고 한 이유는 더 있다. 이 사건으로 당시 많은 민주화세력이 비판을 받았고, 여러 사람이 고통스러웠기 때문이다. 강씨는 "제 주변에서 1991년의 기억을 갖고 똑같이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삶이 뒤틀렸던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하고 있다"며 "이분들의 아픔이 오늘의 판결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하는 게 제 마음이고 바람"이라고 말했다. 또 지금껏 자신들 도와준 이들에게 거듭 고마움을 표시했다. 담담하게 기자회견을 마치고 그들과 악수를 나누던 강씨의 눈가가 촉촉해지는 순간이었다.

다음은 그가 기자회견에서 밝힌 소감, 기자들과 주고받은 일문일답을 정리한 내용이다.

"저와 똑같이 아파한 분들 잊지 않겠다"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강기훈 씨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결심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날 강 씨는 "오늘 사법부의 판결은 1992년 대법원 판결 등 자신들의 판단과 징역 등 일련 과정의 잘못을 고백한 것이란 점에 큰 의미가 있다"며 "저는 당사자로 재판받았지만 주변에서 똑같이 아파한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한다. 이 분들의 아픔이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하는 마음이고 바람"이라고 말했다.
▲ '유서대필' 강기훈 23만에 무죄 판결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강기훈 씨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결심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소회를 밝히고 있다. 이날 강 씨는 "오늘 사법부의 판결은 1992년 대법원 판결 등 자신들의 판단과 징역 등 일련 과정의 잘못을 고백한 것이란 점에 큰 의미가 있다"며 "저는 당사자로 재판받았지만 주변에서 똑같이 아파한 수많은 사람들을 기억한다. 이 분들의 아픔이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하는 마음이고 바람"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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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강기훈 씨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결심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지지자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 무죄 판결 축하 받는 강기훈 노태우 정권 퇴진을 요구하며 분신자살한 김기설 씨의 유서를 대필했다는 혐의(자살방조)로 1992년 징역 3년을 선고받았던 강기훈 씨가 13일 오후 서울 서초구 서울고등법원에서 열린 재심 결심공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뒤 지지자들로부터 축하를 받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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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 결과에 대해서 한 말씀만 드리면, 재판이라는 게 객관적 사실 혹은 진실을 전부 다 설명할 수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오늘 사법부의 판결은 과거 대법원이 확정 판결한 자신들의 판단과 그걸 문서로 표현하고, (저를) 감옥에 보낸 일련의 모든 과정이 잘못됐다고 고백한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게 오늘 드리고 싶은 말의 전부다.


1991년부터 23년째다. 그 과정에 있었던 많은 이야기들은 그동안 제가 많이 했다. 오늘 저는 당사자로 재판받았지만 제 주변에서 1991년의 기억을 갖고 똑같이 아파하고, 괴로워하고, 삶이 뒤틀렸던 수많은 사람들을 저는 기억하고 있다. 이분들의 아픔이 오늘의 판결을 통해서 조금이라도 풀렸으면 하는 게 제 마음이고, 제 바람이다. 어쩌면 옆에서 지켜보는 분들이 더 고통스러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걸 잊지 않겠다. 또 제가 최후진술을 하고 말씀드렸지만, 이 자리에 오기까지 많은 분들에게서 도움을 받았다. 특히 제가 굉장히 아프게 됐을 때,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수많은 분들이 저에게 물질적으로, 또 마음으로 위로와 위안을 주셨다. 잊지 않고 있다."

- 무죄 선고를 받은 직후 어떤 생각이 들었나.
"'재판부가 유감의 표시를 안 하네?'였다. 이 재판은 제 재판이 아니다. 사법부가 과거의 잘못을 바로 잡을 수 있는 기회이고 검찰은 자기 잘못을 반성할 기회로 삼아야 한다는 데에 더 의미가 있다. 판결 내용과 상관 없이 말이다. 사법부의 권위는 저를 세워놓고 '징역 1년에 자격정지 1년' 이렇게 해서가 아니라 과거의 잘못을 겸허하게 인정해 사람들에게 감동을 줄 때 세워진다."

- 오늘 판결로 '유서대필사건'은 검찰이 조작한 공안사건으로 기록될 것 같다. 검찰에 하고 싶은 말이 있는가.
"지금 현재 검사직에는 없지만, 사건에 관여한 검사들은 아마 제 사건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또 (그들이) 사건 당시에도 유죄 확신을 갖지 못했던 모습을 저는 늘 잊지 않고 있다. 그 기억을 잠깐만 떠올린다면, 어떤 형태로든지 유감의 표시를 해줬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그분들의 생각(반성)이 변해야 이 재판이 가치 있고 성과가 있다고 생각한다."

- 과거에 필적 감정 내렸던 기관에 대한 소회는 없나. 원망하는가? 아니면 용서하는가?
"저는 필적 감정이 장난 같다. 저는 뻔히 아는데 그걸 갖고 과학이니 뭐니 하는 것 자체가 웃기다. 신뢰할 수 없다. 어쨌든 (그들에게) 특별한 감정은 없다. 다만 자기가 일하는 전문분야에서 '일만 열심히 하면 되지' 하는 생각은 접어야 한다. 이 일로 어떤 일이 벌어질지 상상하지 않는 전문가들은 또 하나의 악이다. 한나 아렌트가 말한 '악의 평범함'이 이거다."

- 과거 언론들도 정부와 검찰의 의도대로 움직였다고 비판했는데, 현재 상황과 비교했을 때, 달라졌나.
"제가 대답할 부분은 아닌 것 같은데... 글쎄요. 별로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 어찌 보면 김기설씨는 이 사건의 또 다른 당사자다. 추모할 시간도 없었을 것 같은데, 김씨에게 한 마디 한다면. 
"추모할 시간이 없었다는 얘기는 제가 동료의 죽음을 슬퍼할 겨를도 없이 감옥에 갔고, 그 친구가 유서도 못 쓰는 사람 되어버리고, 민주화를 위해 일하던 모든 사람들이 누명을 쓴 (당시) 상황을 말하는 것 같다. 아까도 언급했는데 이 사건은 당시를 살았던, 직접 사건에 연루됐거나 겪었던 분들뿐 아니라 많은 분들에게 상처를 안겼다. 그 모든 사람들이 피해자라는 생각을 늘 갖고 있다. 설령 제게 욕을 했던 사람들조차 어떤 면에선 피해자다. 그들이 조금은 마음을 푸는 계기가 됐으면 좋겠다 하는 게 제 심정이다."




태그:#강기훈, #김기설, #유서 대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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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정치부. sost38@ohmynews.com

오마이뉴스 사진기자. 진심의 무게처럼 묵직한 카메라로 담는 한 컷 한 컷이 외로운 섬처럼 떠 있는 사람들 사이에 징검다리가 되길 바라며 오늘도 묵묵히 셔터를 누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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