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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오키나와(沖縄)에는 파도 위에 신사가 있다. 이름 하여 나미노우에구(波の上宮). 여름 나절, 한반도를 향하는 모든 태풍이 지나는 길목에 위치한 오키나와에는 태풍이 몰아칠 때마다 엄청난 파도가 바닷가에 몰려온다. 나미노우에구는 여름의 파도가 일렁이는 절벽 위에 지어진 신사이다. 이 신사는 파도를 맞으며 절벽 위에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오키나와 나미노우에구는 이름에 '궁(宮)'이 들어가 있으나 실제로는 신사이다. 이름에 '궁'이 들어가 있을 정도로 이 신사는 류큐 왕조 때부터 특별한 대우를 받았던 곳이다. 나미노우에구는 류큐 8사의 하나로서 나하(那覇) 시에서 가장 높은 위치에 있었던 유명한 신사이기도 하다. 또한 해안 가 벼랑 위에 위치해서 주변 절경이 아름답기로 소문난 곳이다. 이 신사는 바다를 내려다보게 세워져 있어서 더욱 명성을 얻었다.

아침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한적한 길이다.
▲ 나미노우에구 가는 길 아침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 한적한 길이다.
ⓒ 노시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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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장의 사진, 동서양의 문화 '융합'을 보여주다

이른 아침, 이미 날은 밝았으나 해는 전혀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오늘도 하늘에는 구름이 많이 낀 흐린 날씨가 될 것 같다. 나는 바닷가를 향해 천천히 걸었다. 평일 아침이지만 시간이 일러서인지 거리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는다. 나미노우에 신사까지 가는 길은 나하 시 북쪽 외곽지역인데 한적한 시골도시를 연상케 한다. 마을 안으로 들어서도 지나가는 사람이 거의 없이 한적하기만 하다. 동네 거리의 허름한 식당들도 문을 아직 열지 않고 있다.

아사히가오카(あさひがおか) 공원에 도착해서 일출 전망대에서 잠시 휴식을 취했다. 아열대에 위치한 나하이지만 아침 공기는 신선하기만 하다. 나는 다시 천천히 신사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신사 정문 바로 앞에 서서 보니 신사 소유의 현대식 회관 건물이 있다. 이 회관 건물은 오키나와의 전통 결혼식을 잔뜩 광고하고 있다. 오키나와의 전통 속에 있는 이 신사에서는 오키나와식 신사 결혼식이 자주 열린다.

이 빌딩의 결혼식 광고 사진 안에는 오키나와 전통의 결혼복 외에도 일본 본토 전통의 하얀 신부복과 서양식 웨딩드레스가 모두 모여 있다. 신사 앞의 사진 한 장이 동서양의 여러 문화가 융합된 오키나와의 모습을 보여준다.

나미노우에 신사 옆, 고코쿠지(護國寺)라는 오랜 역사의 사찰에 들어가 보았다. 현재 사찰 건물은 새 건물이지만 이 자리에 절이 들어서 있던 세월은 오키나와에서 현존하는 절 중 가장 오래되었다. 고코쿠지는 류큐 왕국 당시인 14세기에 창건된 오키나와 최고의 사찰이다. 하지만 오랜 역사를 자랑하던 사찰은 오키나와 전쟁 때 대부분 소실되어 버린 채 1975년에 본당, 납골당만이 현대식 기와 건물로 복원되었다.

일본에 최초로 기독교와 종두법을 전래해준 베텔하임을 기리고 있다.
▲ 베텔하임 비석 일본에 최초로 기독교와 종두법을 전래해준 베텔하임을 기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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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인 선교사의 기념비를 만나다

경내에는 기독교 포교를 위해 고코쿠지에서 1846년~1854년에 체류하고 있던 영국인 선교사 버나드 베텔하임(Bernard Bettelheim)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헝가리 태생의 영국인 의사였던 베텔하임은 선교사로서 가족과 함께 홍콩을 거쳐 류큐국의 이 고코쿠지에서 생활하였다. 류큐 왕국 말기의 왕궁을 무대로 한 여인이 살아가는 모습을 그린 유명 소설 '템페스트(テンペスト)'에서도 이 고코쿠지가 베텔하임 박사의 체류지로 나온다.

1846년 당시 베텔하임이 류큐 왕국에서 포교활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영국군이 나하 항구에 들어와 군대의 힘을 배경으로 포교 활동을 허가하도록 왕부에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류큐 왕국은 몇 가지 제한을 두고 베텔하임의 포교를 허가하게 된다. 기독교인이 하필 류큐왕국의 불교 사찰에 머물렀다는 사실도 흥미롭고, 불교 사찰 안에 일본 최초 선교사의 기념비가 서 있는 것도 이채롭다. 

베텔하임은 류큐 왕국에 체류하는 동안 류큐 방언을 습득한 후 신약 성서의 복음서 일부를 류큐어로 번역하여 류큐 성서를 쓰기도 했다. 오키나와인들이 베텔하임의 기념비를 세우고 그를 기리는 것은 그가 오키나와에 상륙해서 기독교 선교와 함께 의료활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베텔하임 박사의 기념비 한 단 아래에는 베텔하임 박사에게 우두종두법을 전수받은 나카치키진(仲地紀仁)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군대를 앞세운 류큐 상륙은 비난 받아 마땅하지만 류큐에 전한 의료기술은 오늘날까지 일본 근대의료 기술의 뿌리가 되었다.

대만에서 희생된 류큐인들의 묘로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에 이용되었다.
▲ 대만 조난자 묘 대만에서 희생된 류큐인들의 묘로 일본 제국주의의 팽창에 이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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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코쿠지 경내는 한적하지만 이 고코쿠지가 오키나와의 역사에서 차지하는 무게는 상당히 크다. 고코쿠지 안에는 1871년 11월 대만에 표류하였다가 대만 현지인들인 고사족(高沙族)에게 살해된 류큐인들의 묘인 대만조난자묘가 있다. 이 '대만사건'을 빌미로 일본은 청나라에게 배상을 요구하면서 류큐는 일본 땅이고 류큐인은 일본인이라고 주장하게 된다.

그리고 결국 일본은 메이지 정부 최초로 1874년에 대만에 군대를 파병하게 된다. 이 사건은 일본에 류큐왕국을 귀속시키고 청나라에 대한 외교적 주도권을 확보하게 된 사건이었다. 이 '대만사건'에 철저히 이용된 것이 바로 이 류큐인들이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가 일본에 배상하게 되면서 청나라는 류큐가 일본의 영토임을 인정하게 된다. 이때부터 류큐는 중국에 대한 조공, 책봉관계를 끝내고 일본의 연호 등 일본의 제도를 도입하게 된다. 즉 이 묘와 묘비는 후에 한국 침략, 아시아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는 일본의 배타적 제국주의의 시발점이었다. 이 사찰의 이름도 고코쿠지(護國寺), 즉 호국사이니 일본 제국주의를 지키던 사찰이라는 생각에 마음이 씁쓸하다.

검은 색 도리이가 번쩍거리며 신사 입구를 지키고 있다.
▲ 신사 입구 검은 색 도리이가 번쩍거리며 신사 입구를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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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결한 장소에서 소원을 빌다

오늘 나의 최종 목적지 나미노우에구(波の上宮)는 이 고코쿠지의 바로 서쪽에 붙어 있다.  나미노우에구는 나하시를 관통하는 국도 58번의 동쪽, 나미노우에 해변의 산호초 석회암 절벽 위에 자리 잡고 있다. 매년 5월에 나미노우에구는 신위를 모신 가마인 미코시(神輿) 행렬이 시작되는 축제가 열리는 곳으로 유명하다. 절벽 위에 있는 신사답게 신사 입구 도리이 뒤쪽으로는 완만한 경사의 계단이 뒤쪽 도리이까지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검은 색으로 반짝거리는 신사 입구의 도리이를 지나 천천히 계단을 올랐다.

신사의 본전이 보이는 곳에는 흰색의 또 다른 도리이가 버티고 서 있다. 이 두번째 도리이에는 큰 동아줄인 시메나와(しめなわ, 注連繩)가 꼬인 채로 신사 문 위에 길게 걸쳐 있다. 사람과 신의 영역을 구분하는 시메나와는 이 신사에서 마음을 담아 기도를 올리라는 뜻이다.

나는 이곳이 일본의 신사이지만 나의 소원을 한번 빌어보기로 했다. 이곳에서 소원이 이루어지길 비는 것은 일본의 신교에 대한 믿음이 아니라 어느 한 정결한 장소에서 나에 대한 약속을 하는 행위라고 나는 생각했다. 나는 바다에서 불어오는 아침 바람을 느끼며 무슨 소원을 빌어볼까 생각을 해 보았다.

나는 소원을 빈 후에 신사 주변을 둘러보았다. 일본의 최남단에 있고 문화적 배경도 일본 본토와는 확연히 다른 오키나와이지만 일본 도시의 가장 중요한 장소인 신사의 모습은 일본 본토와 흡사했다. 이름 있는 신사답게 신사 경내는 아주 경건한 분위기 속에 아주 청결하게 관리되고 있었다. 단지 남국의 신사답게 신사 주변을 아열대의 풍성한 나무들이 해풍 속에서 신사를 감싸고 있고, 주황색 등(燈)이 울창한 나무 아래에 숨어 있다. 구릉 같이 솟아오른 바닷가의 절벽 위에는 여러 시주자들이 바친 석등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있다.

나는 이곳에서 나의 마음까지 씻었다.
▲ 신사 손 씻는 전각 나는 이곳에서 나의 마음까지 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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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사 안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씻는 전각의 지붕에는 오키나와답게 붉은 색 기와가 올려져 있다. 그리고 이 기와들도 오키나와의 태풍에 날아가지 않도록 시멘트로 단단하게 붙여 놓은 모습이 인상적이다. 손을 씻는 작은 전각 아래에 물이 흘러나오는데 그 석함에 적힌 글이 '세심(洗心)'. 나도 손에 물을 적시며 마음의 때를 씻어내렸다.

오키나와의 신사에만 있는 것이 바로 이 전설의 동물, 시사이다.
▲ 신사의 시사 오키나와의 신사에만 있는 것이 바로 이 전설의 동물, 시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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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세히 보니 이 신사에는 일본 다른 지역의 신사에는 없는 오키나와만의 특징도 있다. 신사 본전 입구에 오키나와에만 있는 상서로운 전설의 동물, 시사(シーサー)가 참배자들을 바라보고 있다. 황토색 흙으로 빚은 시사는 신사의 본전 앞에서 앞다리를 잔뜩 웅크리고 엉덩이를 높이 쳐들고 있다.

신사의 재앙을 막기 위해 세워진 시사이지만 해학적인 얼굴이 마치 여행자를 반기는 듯하다. 만화의 주인공처럼 잔뜩 튀어나온 시사의 눈동자는 신성스러운 신사를 한참이나 포근하게 만들어준다.

자신의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 나미노우에구 본전 자신의 소원을 비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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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신사 본전의 마당은 새해에 흰 천을 펼쳐놓고 동전을 던지며 소원을 비는 명소로 이름이 나 있는 곳이다. 이 신사를 들르는 모든 일본인들은 신사의 본전 앞까지 와서 경건한 자세로 소원을 빈다. 아침에 숙소에서 나와 산책을 하고 있는 나도 아내와 딸, 가족을 위해 한국식 합장 자세로 소원을 빌어본다.

열심히 자신의 소원을 빌고 나에게 반갑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 기도하는 시민 열심히 자신의 소원을 빌고 나에게 반갑게 아침 인사를 건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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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쯤 되어 보이는 어느 한 아저씨가 신사의 본전을 향해 걸어오고 있다. 그는 본전에서 걸어 나오는 나를 보고 반갑게 아침인사를 건넨다. '오하요~(おはよう)'라고 웃으면서 말이다. 지금까지 아침시간에 일본의 수많은 신사를 여행해 보았지만 처음 들어보는 아침 인사이다. 그만큼 오키나와 사람들은 성격이 활달하고 정감이 있다.

이 아저씨도 신사 본전에 서서 두 손을 모아 합장하며 소원을 빈다. 동전함에 동전을 던지고 손뼉을 치고 다시 손을 모아 소원을 빈다. 나는 나에게 기분 좋게 인사를 건넨 이 남자의 소원이 잘 이루어지라고 응원해 주었다. 사실, 별것 아닌 듯한 미소 속의 인사 하나가 이렇듯 사람 사이의 마음을 훈훈하게 해 준다.

절벽 위에 외롭게 서 있는 신사가 운치있다.
▲ 과거의 나미노우에구 절벽 위에 외롭게 서 있는 신사가 운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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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신사가 자리한 절벽의 정상에 섰다. 신사 건물로 가득 차 아무 것도 보이지 않던 신사의 뒷면에 놀랍게도 광대한 바다가 펼쳐져 있다. 눈 아래의 바다를 내려다보는 시원스런 운치가 도시의 신사 뒤편에 있었다. 이 신사가 아름다운 이유는 신사의 절벽에서 바닷가가 내려다보이기 때문이었다. 나미노우에 신사의 바닷가 절벽이 오키나와 나하시의 명승이라는 자랑이 헛된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 명승 절벽의 신사 아래에 나미노우에 비치(波の上ビ-チ)가 펼쳐져 있다. 나하 시내에서 가장 가깝고 나하 시내에 있는 유일한 해수욕장이다. 나미노우에 시민비치라고도 하는 이 해변은 크기가 초등학교 운동장만 하다. 이 소규모 해변은 나하 시민들이 부담 없이 해수욕을 즐기는 곳이다. 정말 작은 해수욕장인데 이곳에도 아침 일찍 산책하는 사람들이 오가고 있다.

지역주민의 작고 사랑스러운 해변이다.
▲ 나미노우에 비치 지역주민의 작고 사랑스러운 해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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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쁜 바닷가가 있다는 사실은 '축복'

나하 도심과도 너무 가까운 이 해변은 누구나 찾아가기가 좋은 해변이다. 마치 조그만 호수 같은 느낌을 주는 해변이다. 주변에 상업시설은 일절 없고 코인라커 탈의실과 코인 샤워실, 파라솔과 같은 비치용품을 빌려주는 곳만 있다. 한 마디로 모래사장만이 전부인 해변이지만 동네 주민들에게는 최고의 휴식공간이고 주민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집 앞 바로 앞에 이렇게 예쁜 바닷가가 있다는 사실은 정녕 축복이다.

나미노우에 해변에서 보니 저 멀리 절벽 위에 자리한 나미노우에 신사의 붉은 지붕과 서까래가 보인다. 해변에서 보니 절벽의 모양이 기이하게 생겼다. 나미노우에 신사가 있는 석회암 절벽의 파도와 만나는 아랫부분이 칼로 오려낸 듯이 움푹 길게 파여 있다. 이곳을 수없이 드나들었을 바다의 파도가 높고 세게 저 석회암 절벽을 내리쳤을 것이다. 그리고 이 오키나와의 파도는 석회암 절벽을 깊게 깎아버렸을 것이다.

조그만 만(灣)에 만들어진 해변이라 탁 트인 맛은 없지만 괜찮은 해변이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바닷물에 기둥을 박은 나미노우에린코(波之上臨港) 도로의 고가도로가 해변의 바로 앞을 지나가고 있다는 점이다. 원래 탁 트였던 나미노우에 해변은 몇 년 전에 다리가 생기면서 시야가 막혀버린 것이다. 아름다운 해변 앞의 고가도로! 참으로 특이한 연출을 볼 수 있는 곳이다. 시야를 떡 막고 있는 바다 위의 나미노우에 다리만 없었으면 참으로 아름다운 바닷가였을 것 같다.

오키나와의 역사를 상징하는 신사와 아름다운 해변 앞에 이렇듯 육중한 다리를 세웠다는 사실이 답답하다. 아름다운 해변의 모양새를 한참 떨어져 보이게 만들고 있다. 고가도로 때문에 해변의 느낌이 살아나지 않을 뿐 아니라 바닷물 색과 고가도로의 밸런스가 맞지 않는다. 게다가 바닷물이 너무나 맑고 투명해서 이 다리가 더욱 더 한심해 보인다. 오키나와는 주변이 모두 바닷가라서 좁은 면적의 이 바닷가 풍경을 너무 쉽게 버린 것 같다.

이곳이 아열대 지방임을 알려주는 바다와 모래의 빛깔을 보면서 나는 떠올랐던 여러 생각들을 다시 버려본다. 오키나와의 바닷물 속에 잠깐 발만 담궈 본다. 수심이 깊지도 않고 모래도 껄끄럽지 않고 부드럽다. 다리에 푸르고 투명한 바닷물이 와서 닿았다. 모래사장 위로 들락날락하는 물살의 간지러움이 발에서 느껴진다. 모래가 희면서도 너무 깨끗하다. 오키나와답게 투명한 바다는 파랗고 바닷물도 맑고 나의 마음도 맑아진다.

덧붙이는 글 | 2013년 5.20일~5.23일의 일본 오키나와 여행 기록입니다.

제 블로그인 http://blog.naver.com/prowriter에 지금까지의 추억이 담긴 세계 여행기 약 300편이 있습니다.



태그:#일본여행, #오키나와, #나하, #나미노우에구, #나미노우에 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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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와 외국을 여행하면서 생기는 한 지역에 대한 궁금증을 해소하는 지식을 공유하고자 하며, 한 지역에 나타난 사회/문화 현상의 이면을 파헤쳐보고자 기자회원으로 가입합니다. 저는 세계 50개국의 문화유산을 답사하였고, '우리는 지금 베트남/캄보디아/라오스로 간다(민서출판사)'를 출간하였으며, 근무 중인 회사의 사보에 10년 동안 세계기행을 연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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